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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Apr 13. 2022

긍정과 부정 사이,
그 어디쯤에 서 있는 나

노는(遊)신부의 사순절 ‘함께 걷는 어둠’


사순절 성주간 수요일, 걸으며 읽는 마가복음서 (37)


“. . . 대제사장이 예수께 물었다. ‘그대는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바로 그이요. 당신들은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 . . 대제사장의 하녀 가운데 하나가 와서,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빤히 노려보고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하여 말하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 . . .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서, 엎드려서 울었다.” (마가복음서 14:53-72)


The Taking of Christ, Caravaggio (1602), Dublin, National Gallery of Ireland


“그대가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인가? 당신도 그 예수와 한패인가?”

“모두가 걸려 넘어질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아니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은 알지도 못하오.”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동시 묘사 同時描寫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사건, 그러나 다른 두 공간, 다른 두 장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플래시백으로 또 다른 시간, 또 다른 한 장면이 끼어듭니다. 


두 장면이 한 오페라 무대 위에 병치(juxtaposition)되어 오른쪽 무대와 왼쪽 무대에서, 혹은 위쪽 무대와 아래쪽 무대에서 동시에 펼쳐집니다. 한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각각 레치타티보로 전개되는 두 장면이 마치 하나로 보이고 들립니다. 극을 더욱 극적으로 만듭니다. 불협화한 듯 보이는 두 장면이 하나의 사건으로 협화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회상의 장면까지 뒷 배경 막에 나타납니다. 이젠 아예 세 장면이 교차 편집되어 대조와 대비를 통해 빠르게 전개됩니다. 무대 위에 두 장면이 그리고 배경 막에 한 장면이 잠깐씩 차례로, 때론 동시에 펼쳐집니다. 정교하게 연출되어 장면들이 서로 엇갈리다 마주치고 또 마주치다 엇갈리고를 반복합니다. 동시성입니다. 사건의 긴박감을 줍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가 이 세 장면을 하나로 연결시킵니다. 닭의 울음소리가 비장미를 더합니다. 보는 이의 긴장감을 최대한 끌어올립니다. 


예수는, 그리고 베드로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이 사건은 어떻게 전개가 될까? 그 결말은 어떻게 될까? 그 사이에 인터미션(intermission), 휴지기休止期)는 없습니다. 아주 잠깐의 휴지부(休止符)도 없습니다. 숨고르기 없이 그 끝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한곳에 다 모였습니다. 그 당대의 권력자들 한가운데 당당하고 위엄있게 서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자들 뒤에서조차 끝 간데 없이 쪼그라들고 초라해져 고개를 숙인 제자 베드로가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네가 말한 그이가 바로 나다.” 


“너는 예수와 한패인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


긍정과 부정, 그 벽을 사이에 두고 같은 시간, 그러나 다른 공간에 있는 스승과 제자의 슬픈 이중창입니다. 서로 보이는 벽을 사이에 둔 불협화(不協和)의 대비와 대조는 긴박감과 긴장감 속에 더욱 비애감을 느끼게 합니다. 


저곳이 제자들이 그토록 바랐던 승리와 영광의 자리였다면 분명 달라졌을 텐데. 개선하는 왕을 맞는 승리와 영광의 합창이 울려 퍼졌을 텐데. 제자들과 사람들로 꽉 찼을 텐데. ‘그분을 알다마다요. 내가 바로 그 첫째가는 제자, 베드로입니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제자들 중의 제자 베드로가 바로 나입니다’ 묻기도 전에 그랬을 텐데. 지금 이렇게 외롭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여기선 차마 한 성질하는 베드로도 선뜻 앞에 나서질 못합니다. 못 배운 제자의 잘못일까요? 못 가르친 스승의 잘못일까요? 누구의 탓일까요? 

늘 따라다니고 붙어다니던, 언제나 기세가 등등했던 리더격 제자도 모른다 외면받는 그 제자의 스승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제자 훈련에 철저히 실패한 스승은 외롭습니다.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은 분명 예수를 따라다니는 사람들과 한패가 아닙니까? 당신은 저 예수를 잘 알지 않습니까? 당신은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까?”


“난 모릅니다. 그 촌구석의 나사렛 예수, 난 모릅니다. 고난과 고통, 그런 거 난 모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맞는 그 예수는 난 모릅니다. 부활의 주님, 승리와 영광의 주님은 압니다. 그 예수님은 잘 압니다. 하지만 지금 저기 초라한 뒷모습의 나사렛 예수는 난 모릅니다. 그 철저하게 실패한 예수라는 이를 나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난 압니다. 초라해 보이고 쓸쓸해 보이고 슬퍼해 보이는 저기 나사렛 예수, 저분을 난 잘 압니다. 그 나사렛 예수가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제자입니다. 저분을 따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저분을 따라 나는 끝까지 이 길을 갈 것입니다. 나는 저 나사렛 사람 예수를 사랑하는, 그리고 저분의 사랑을 받는 제자입니다.” 


긍정과 부정 그 사이에 닭의 울음소리는 있습니다. 

그 닭 울음 소리는 베드로뿐 아니라,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정신이 번쩍 들게합니다. 


The Denial of St Peter, Caravaggio (1610),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모욕과 치욕과 굴욕과 조롱 속에 홀로 서 계신 스승 예수, 살을 찢는 고문과 처절하고 참혹한 죽음을 목전에 두신 스승 예수, 그리고 겁에 질려 차마 그 집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거기 그 집 안마당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섰다 하는 제자 베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고 산다 하는 예수의 제자로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는 저 예수님을 안다고 대답할 자신이 있는가? 난 저 베드로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저 초라하고 실패한 예수님을 ‘난 모른다’ 부정하고, 그 닭 울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닭 울음 소리에도 통회와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신이 나에게 있는가? 


그게 아니면, 


‘난 예수의 제자요, 난 그분을 잘 압니다’ 그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그분을 긍정할 자신이 나는 있는가? 이 어둔 밤을 그분과 함께 지날 자신이 나는 있는가? 도망치지 않고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곁에서 지킬 자신이 나는 있는가? 그리고 마침내 밝아오는 아침을 빈 무덤에서 맞을 자신이 나는 있는가? 




긍정과 부정 사이. 


나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어쩔 줄 몰라 앉지도 서지도, 그리고 오도 가도 죄다 못한 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은 아닌지. . . 


엉거주춤하는 사이, 

저기 닭이 날 측은하게 쳐다봅니다. 

그러다 날 샌다고, 

그러다 곧 울겠다고. 


내가 아니라 네가 울겠다고. 



그래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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