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라면 소리라도 질러야,
그 소리라도 들어야

누가와 함께 걷는 기다림 (3)

by 교회사이

기다리며 읽는 누가복음서, 대림절 첫 번째 주 화요일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 있는 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서 3:1-6)


고도를 기다리세요 1.JPG photo by noneunshinboo


지금 사는 것이 광야입니까? 자주 광야입니까, 아니면 내내 광야입니까? 앞으로도 광야일 것 같습니까? 아무리 둘러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흙먼지 뒤집어쓴 돌덩이고 바짝 마른 잡풀 뿐인가요? 그나마 보이는 한 그루 나무는 잎 내고 꽃 피웠던 시절만 기억하나요? 그나마 내 것 아닌 남의 것, 남의 기억인가요?


지금 혹시,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 두 사람 사이에 계신가요?


‘막연한 기다림’


참 먹먹한 말입니다.

사는 것이 그만, 일이 되었습니다. 노는 것도 일이 되면 힘이 드는데, 사는 것이 그만 일이 되어버립니다. 힘에 부쳐 그만두고 싶고, 앉아 쉬고 싶고, 내쳐 아예 눕고 싶고. 그러다 웬 설움이 남의 것인 양, 사실은 내 것으로 갑자기 북받쳐 올라오고.


‘그런데 . . . , 그러면 . . . , 그럼에도 . . . , 그래도 . . . 기다려라’, 해서 또 막연히 기다린다면 그건, 정말 광야입니다. ‘가만 있어 기다려라’, 해도 그럴 수 없는 광야이면, ‘싫어!’ 소리는 차마 지르진 못해도 그 외치는 소리에 귀는 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게 나를 향한, 나를 위한 외침이면 내 귀와 맘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요한의 길 2.jpg photo by noneunshinboo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광야로 사는 나에게, 광야로 있는 나에게 물길 내고, 꽃길 되겠다, 오십니다. 먼저 그 외침 들어야 그 외침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외침에 내 귀 닫으면, 나중에 내 눈 닫히면, 더 나중에 내 맘도 닫히면, 그러다 정말 내가 광야로 있지 않을까요? 지금 광야라면 소리라도 질러야, 그 소리라도 들어야 우리 살지 않을까요?


성탄,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의로우신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여 주십시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아멘.” (시편 4:1)


*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t)의 두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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