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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Feb 06. 2023

광야로 살지 않을 이유

마태복음서, 길 위에서 길을 가르치는 예수 (6-2)

함께 읽고 걷는 더 드라마, 예수의 길 떠난 가족


“8 또다시 악마는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 말하였다. 9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10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11 이 때에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마태복음서 4:8-11)


Christ in the Wilderness, Ivan Kramskoy, 1872Tretyakov Gallery, Moscow


1.        


사탄은 이번에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 말합니다. 일종의 거래를 제안합니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사탄은 지금 하늘로 향한 예수님의 시선, 그리고 나의 시선을 여기 땅으로 돌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향한 시선을 그만 거두고 여기 이 땅에 있는 ‘나’에게 집중하라 합니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다. 보이지 않는 거기, 보이지 않는 곳,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네 눈에 보이는 여기, 지금 당장 너를 흔들림 없이 서게 하고 높이 세워줄 수 있는 바로 여기, 지금 네 손에 닿는 이것, 네 손에 있는 그것이 너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니, 거기 말고 여기를 보아라. 지금 네 앞에 선 나를 보아라. 내 앞에 서 있는 너를 보아라. 지금 너와 내가 서 있는 여기, 이곳이 네가 있을 자리다, 여기가 네가 살아야 할 현실이다. 여기를 내가 너에게 주겠다, 너를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하겠다, 여기 모든 것이 너의 것이다.”  


좀 전까지는 내가 나인 것을 증명을 하라 하더니, 이제는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내가 너를 증명할 테니, 그런 너의 수고를 덜어줄 테니, 대신 나를 섬겨라, 그리고 너를 섬겨라 합니다, 보다 현실적이 되어라, 현실을 살아라 합니다. 

내가 너를 증명할 것이고, 네 손에 쥔 것이 너를 증명할 것이고, 네가 사는 곳이 너를 증명할 것이고, 네가 먹는 것과 입는 것이 너를 증명할 것이고, 네가 이룬 것과 네가 선 자리가 너를 증명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실을 떠나 살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하라. 유혹입니다. 달콤합니다. 다 내 것이 된다니, . . . 영혼이라도 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나에게 요구합니다.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해라, 그러면 내가 너를 증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나를 사탄에게 맡긴다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탄을 따르겠다는 증명입니다. 나의 능력, 나의 소유, 나의 이름, 나의 자리가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겠다는 증명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2.        


어디를 가던, 무엇을 하던 증명을 요구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야 하고, 내 능력이 정말 얼마나 되는지, 내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세상입니다. 심지어는 내가 정말 누구인지, 내가 정말 나인지 나도 나에게 증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드는 세상입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사는 것 같습니다. 나를 증명하느라 애를 쓰느라 진이 다 빠져 사는 것은 아닐까 싶은 세상살이 같습니다. 


그러다 외로워지고 힘들어지고, 점점 지쳐가고, 그래서 그만 하고 싶고, 그만 멈추고 싶고, 그러나 혹시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나를 증명할 길이 사라지면 어쩌나, 나의 존재가 하찮게 여겨지면 어쩌나, 그러다 영 낙오자가 되면 어쩌나, 실패한 사람으로 보이면 어쩌나, 돈도 잃고 명예도 잃고 사랑도 잃고 사람도 잃으면 어쩌나 싶어 갖은 애를 또 쓰고 사는 우리는 아닐까.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는 여기를 광야로 사는 것은 아닐까. 여기가 광야여서가 아니라 내가 광야로 사는 것은 아닐까. 내가 나를 시험하며, 계속되는 긴장 속에 여기를 정말 광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너무 좋다 하신 여기인데. 사람들이 비록 엉망으로 만들었어도 여전히 너무 사랑하셔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여기인데. 나는 여기를 계속해서 광야로 알고, 계속해서 광야로 믿고, 계속해서 광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를 광야로 살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주님께서는 여기 이 땅에 오셔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고픈 오천 명을 먹게 하시고 또한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셨는데. 이제 내가 너희가 먹을 빵이고 마실 물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나를 먹고 나를 마셔라, 그러면 다시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하셨는데. 장사치들의 소굴이 된 성전, 보기에 화려하고 웅장한 그래서 오히려 우리를 기 죽이는 성전, 서로의 앞에 서고 위에 앉고 저 높은 자리로 오르려고 애쓰는 성전,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하나님께서 더 이상 계시지 않는 성전은 더 이상 필요 없다 허물고 다시 짓겠다, 아니 아예 내가 새 성전이 되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성전 꼭대기 대신 거기 언덕 위 십자가 그 위에서 몸을 던지신 주님입니다. 더 이상 우리가 여기를 광야로 살지 않기 원하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광야가 아닌 하나님 나라로 여기를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를 광야로 살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 무엇도 없었던 태초부터 계셨던 주님, 그 주님에게서 생기지 않은 것은 없고, 그래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시작이고 생명이고 빛이신 주님, 모든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거기 하늘에서 이 땅 위로, 그것도 가장 낮은 곳, 동물의 먹이통에 뉘인 아기로, 섬기는 종으로, 발을 씻기는 노예로, 가장 가난한 자가 되신 이유가 우리를 하늘 아버지의 자녀, 즉 가장 부유한 자들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를 광야로 살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광야에서의 시험을 우리를 대신해서 다 끝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 마지막 시험도 마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다 하셨습니다. 이미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 하셨습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그렇게 살라 하셨습니다. 이미 시험도 있기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를 광야로 살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찔리면 피가 나고, 부딪치면 멍이 들고, 넘어지고 떨어지면 많이 아프고. 사랑이 떠나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그 사랑이 더 이상 내 곁에 없으면 내 손과 발과 가슴이 너무 아파 저립니다. 우리에겐 배고픔도 있고 목마름도 있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채워지지 않은 빈 깡통으로, 엉망으로 깨진 그릇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여기를 광야로 살 이유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해야 할 이유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를 의지하며 도우며 함께 살아갈 이유,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자녀로 함께 있어 서로를 보듬고 살뜰히 챙기고 사랑하며, 서로의 아픈 조건과 슬픈 상황과 쉽지 않은 처지를 알아주고 서로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나누며 함께 걷고 살 이유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가신 길이고 가르치신 길이고 그것이 주님의 길입니다. 또한 교회의 길이고 교회로 모인 우리의 길입니다. 


3.        


어릴 적 소풍을 가면 꼭 한 번은 했던 것이 보물찾기입니다. 굳이 그걸 왜 숨겨놓고 찾으라고 했는지, 굳이 경치 좋고 놀기 좋은 곳에 와서 굳이 뭘 숨겨놓고 또 그걸 찾으라고 했는지, 그때도 지금도 이해를 저는 못합니다. 아마도 한 번도 보물을 찾은 경험이 없어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보물찾기가 우리의 삶이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분명 참 답답한 노릇일 것입니다. 


보물찾기. 자연학습을 위해 자연으로 나왔으면 자연을 충분히 느끼고 경험하게 하면 좋을 텐데. 좋은 곳, 좋은 것들을 뒷전으로 미루고, 보물 하나 더 찾겠다며 눈에 불을 켜게 만드는 보물찾기가 과연 자연 학습일까? 차라리 여기 소나무가 무엇이고 참나무가 무엇이고, 무슨 꽃이 지금 필 때이고, 어떤 나무에서 어떤 열매가 열리는지, 보고 알고 만지고 느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경쟁 없이 그저 함께 먹고 뛰고 놀고 하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우리는 보물찾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는데, 그 귀한 보물은 우리 곁에 와 있는데, 그만 보물찾기를 하느라 여기를 광야로 사는 것을 아닐까, 여기를 하나님 나라로 살면 되는데. 우리는  여기를 굳이 보물찾기의 전쟁터로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 요단 강가는 죄를 고백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고 다시 물 밖으로 나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다’ 그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듣는 곳이지 사금을 찾느라 정신 팔려 광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photo by noneunshinboo 


4.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주님께서 오늘 광야에서 받으신 그 시험의 결과는 이미 나왔습니다. 이제 시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시험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시험과는 관계없이 예수님의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통해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과 딸입니다. 아들과 딸로 살면 됩니다. 증명이 필요 없습니다. 불이 꺼진 시험장에 여전히 남아 혼자 끙끙대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나는 너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한다.” 


예수께서 사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명하실 필요가 없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할 이유가 없으신 것처럼, 하늘과 땅, 그 위와 아래,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조금 있다가 사라질 것들을 갖기 위해 사탄에게 고개 숙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을 받는지 아닌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오셨는지 아닌지,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지 아닌지, 내가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는지 아닌지, 그리고 내 곁에 그 하나님께서,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실 것인지 아닌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런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아닌지, 그럴 만한 사람인진 아닌지, 증명할 필요도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사랑하는 딸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광야의 시험을 통과해서가 아닙니다. 그 말씀을 하셨을 때는 시험은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광야로 살지 않고, 하늘에서와 같이 여기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입니다. 물론 쉽진 않습니다. 꽃 길만 걷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시편 23:4-5)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십니다. 나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광야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 위해 우리는 광야를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기를 지나갈 뿐입니다. 광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하늘에서와 같이 여기 이 땅에서 사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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