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 대신2
완벽주의. “아이가 완벽주의 성향이 있네요.”<금쪽같은 내 새끼>에도 자주 나온다. 실패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자기가 해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워하며 그러한 이유로 그 일을 피한다. 피하는 과정에서 ‘문제 행동’으로 보이는 여러 양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늘 그렇듯이, 문제는 눈으로 보이는 문제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이 나타나게 된 삶의 방식들이다.
나도 이 완벽주의 때문에 지난한 시간을 보내왔다. 내 경우엔 분노를 표출하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혼자 앓는 쪽이었던 것 같다. 완벽주의는 통제에 대한 집착과 특정 행동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땐 책 쌓아 놓는 순서나 빨래 널 때 나름의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결벽에 가까운 강박이 있기도 했다. 옛날보단 나아졌지만 통제적인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카페에서 두 중년 어른의 대화가 들렸다. 한 사람은 말했다. “기도 제목이 뭐냐고 하데, 그래서 좌절하는 거라고 했어.” “좌절?” “그래, 좌절! 내가 뒷전에 있어도 괜찮을 수 있게 말이야.”
대화에서 짐작해보건대 그는 긴 세월 동안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살다 보면 같은 분야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할 때를 만난다. 그는 그 시기를 만났지 싶다. 그는 친구에게 고백했다. 자기에겐 좌절이 필요하노라고, 실패의 감정을 제대로 만나야 그걸 소화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못해도 괜찮고, 못할 수도 있고, 실패해도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수많은 좌절이 필요했다. 이제 실패는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준비하기까지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한 것이 당연하고, 그게 준비되지 않은 게 결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안다. 전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아직 충분히 좌절하지 못해서 내 부족함이 드러날 때면 여전히 괴로움을 느낀다.
캐시 박 홍은 그의 책 <마이너 필링스>에서 늘 어딘가의 경계에 서 있는 자기 정체성의 상징과도 같은 '서투른 영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서투른 영어는 한때 부끄러움의 원천이었지만, 이제 나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서투른 영어는 나의 유산이다. 나는 완벽한 영어에서 일부러 멀어질 것을 외치는 작가들과-영어를 탈취해 도망자의 언어로 비틂으로써 영어를 어지럽히고, 뒤흔들고, 난도질하고, 괴랄하게 만들고, 타자화는 작가들과-문학적 계보를 공유한다."(136쪽)
오늘도 괴로움의 시간 속에서 충분히 실패하고, 이 실패를 잘 감당하는 법을 배우련다. 못한 것도 나의 행함이니. ‘완벽’이라는 건 애초에 내 것이 아니다. 그건 남의 것이다. 남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신기루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나를 평가하는 잣대가 될지라도 수치라 여기지 말라. 심지어 그것이 ‘마이너 필링스’와 자신의 위선에 관한 수치일지라도. 심지어 그것이 정체성과 같은 불가항력의 좌절의 발단이었대도. 그러한 이유로 더욱이 인정해야 할 때다. 캐시 박 홍의 말처럼, 서투름은 나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