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함 대신
한강을 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서행하는 경찰차를 따라 골목을 걸었다. 종종 보지만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은 카페가 눈에 띄었다. 앞의 경찰차가 정차했다. ‘테이크아웃 할인’. 하필 눈이 거기에 멈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드시고 가세요?”
“가져갈게요.”
카페를 나왔다. 손에 들린 커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건 콜드브루였다. 분명한 콜드브루. 아메리카노보다 CMYK 색상 값이 선연히 섞인 검정의 모습. 더 진하고, 더 맑은 그것. 뒤를 돌아보며 맛을 봤다. 콜드브루였다. 확실히.
현대인의 3대 영양소라는 카페인, 니코틴, 알코올 중에 카페인을 주 영양소로 삼은 인간이 바로 나다. 일명 ‘커피 두통’이라는, 커피를 제시간에 안 먹어주면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오는 카페인 중독 증상까지 경험한 후 진정한 ‘각성’을 하고, 하루 석 잔 섭취하던 커피를 결연히 노력해 하루 두 잔-그중 한잔은 디카페인-으로 줄인 사람이 바로 나다. 이건 아메리카노일 리 없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건,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하였사온데…”라며 홍시임을 증언한 절대 미각의 소유자 장금이의 미각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물어봐? 기분이 나빠졌다. 콜드브루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엄연히 다른 거니까. 콜드브루의 맛을 느끼고 싶었던 게 아니다. 아메리카노의 시원함과 콜드브루의 시원함은 다르다.
입으로는 짜증을 툴툴 내면서 발은 앞을 향했다. 돌아갈 생각이라곤 없이 집 쪽으로 걸었다. 나는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메뉴를 잘못 받았다고 이렇게까지 확신하면서, 어째서 불확실성에 의탁하고 싶은 걸까. 플라스틱 컵 안의 액체가 잔인했다.
대학 가면 잘 될 줄 알았다. 대학에선 학교를 바꾸면 잘 될 줄 알았다. 졸업하고 대학원 가면 잘 될 줄 알았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대로 하고, 탄탄대로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었다. 아니어서, 대학원을 휴학했다. 그리고 글을 썼다. 뭐라도 될 줄 알았다. 이것저것 배웠다. 남들이 한다는 자격증을 따려고 생각해보거나 취미를 만들어보거나 어학 시험을 쳤다. 유학을 준비하거나 구인 구직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프리랜서의 밥벌이를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 아니었고, 되는 건 없었다.
말하자면, 내 삶의 키오스크는 고장 났다. 인생은 자판기도 아니고 입력한 코드대로 출력되는 프로그램도 아니다. 고장 난 키오스크에서 잘못 나와 버린 주문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눌렀는데 나온 콜드브루다. 여태 입력한 주문은 모조리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튕겨 나왔다. 기대한 것과는 다른 맛을 내면서. 그건 잔인한 맛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기다렸던 것과 전혀 다른 맛. 예상과 다른 맛을 감지하는 미뢰에게 민망할 정도로. 나는 준비하지 않은 걸 수습해 나아가면서, “엄마, 나 괜찮아” 따위의 말로 내 행보를 고대했던 나와 내 삶의 미뢰들을 안심시키면서, 원하지 않았던 일을 원해왔던 일처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무척이나 생소했고 그래서 매번 나를 당황시켰다. 다룰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벗어난 이들을 다루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들여야 할 것으로 생각했던 힘의 세기보다 더한 힘을 썼고, 요령을 몰라 늘 어려웠다.
아메리카노 대신 출력되어 버린 콜드브루를 손에 들고, 지금까지의 불확실성이 내게 준 맛들을 생각했다. 그 잔인하고 괴로운 맛 한편엔 평생 모를 수도 있었을 새로운 맛이 있기도 하였다. 편입과 휴학과 새로운 영역으로의 이동이 낳은 좋은 사람들과 만남을, 글을 읽은 사람들의 후기를, 쉬운 마음으로 별점 평가를 하지 않게 된 나의 결심을, 안 된다는 사람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밀어붙인 것들을. 지나온 시간이 소중했다.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 오히려 좋았던 날들과 실망했던 동시에 다행스러웠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은 맛이 없지 않았다.
간직하고 싶었다. 바로잡지 않기로 했다. 키오스크가 고장 난 데에는 마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 불확실함을 확신하는 동안 콜드브루가 담긴 컵의 얼음이 녹아내렸다. 물이 섞인 콜드브루는 처음 그것의 검정보다 옅어져 갔다. 아메리카노의 색처럼.
이제 필요한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드는 완벽함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콜드브루에서 아메리카노엔 없는 무언가를 찾는 일이다. 기대를 잃는 잔인함이 얼마나 클지는 몰라도, 반드시 기쁨은 있다. 분명 잔인함보다 기쁨이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