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함 대신
보탬 없이 심장을 울리는 과목이 있었다.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수강 취소를 하고 14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슬프다. 첫 수업에 이미 영혼을 빼앗긴 듯…….
듣고 싶지 않은 수업을 듣게 됐다. 버거울 게 뻔했고, 잘 알지도 못하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내용이다. 거의 반 강제적으로 듣게 됐다. 개강한 지 한 주 만에 퀴즈를 본다는데 그 퀴즈가 이제 약 한 시간이 남았다. 공부는 했지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시험을 치를 수나 있을까 걱정이 된다. 걱정하고 싶지 않은데. 아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거라도 나왔으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버거운 수업이다.
좋아하는 수업을 들으려면 네 과목을 들어야 했다. 두 수업이 이미 품이 많이 들 거라, 나머지 두 수업을 하나의 과목인 것처럼 듣는다면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무리 공수가 덜 드는 수업이래도 실질적으로 그렇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을 네 개 들으면서, 딸린 과제와 시험을 치고, 학점 관리를 하면서, 따로 내 연구를 하고, 장학금과 교환한 노동도 하고, 글을 쓰고, 혹 그걸로 책도 만들고, 동료들과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과외를 하고… 지금 이렇게 나열해 보니 많긴 많아서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위안해 본다.
다 할 수 있다고 자신 있다고 되뇌었지만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내심 나는 알았다. 단 하나의 선택지는 좋아하는 과목을 버리는 일이라는 걸. (대학원 졸업 사정상 상황이 그랬다.) 거기엔 하고 싶은 걸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대신하기 싫은 걸 하는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막상 한 편의 용기와 한 편의 각오로 선택하고 나니, 시원했지만 또 섭섭하기도 하였다. 하기 싫은 걸 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마음이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마음을 낳았다. 설명하기도 어렵다. 싱숭생숭하다는 뜻이다.
무슨 과목 하나 가지고 이러는지. 누가 보면 세기의 사랑을 하고 이별한 수준. 몸이 아프기 싫어서 한 선택인데 마음이 아프다.
마음산책에서 출판된 에세이 <쓰는 직업>에서 20년 간 기자 생활을 해온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20년을 버틸 수 있었냐고 누가 묻는다면, 훌륭한 기자가 아니어서라고 답하고 싶다. 방황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고, 성공에 대한 욕망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기대감 없이 일을 일로만 대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일에 대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에 지나치게 매몰되지도, 상처받지도 않을 수 있었다." (217~218쪽)
나는 훌륭해지지 않기로 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이 과목을 성공적으로 끝내겠다는 욕심과 실력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 공부를 공부로 이수해야만 하는 절차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감정을 섞지도, 집착하지도, 매몰되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일견 비겁해보이더라도 몸을 사릴 때였다. 오래도록 버티려면 우선 다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