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잔인해요

Q선생님께 보내는 두 번째 편지

by MINI

* 이 이야기는 100% 창작을 통해 만들어진 허구입니다.

지명, 인물명, 단체명이나 사건명들이 실존하거나 실제와 비슷한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 격주(26. 02. 15)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등장인물

Q선생님 : 40대 후반의 여성. 화자인 ‘경숙’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선생님. 지금은 남편과 미국에서 살고 있다.

경숙 : 50대 초반의 여성. 편지를 쓰는 주인공. 그린아크 초원 아파트로 이사해 겪은 기묘한 일들을 Q선생님에게 쓰고 있다.

(똑순이) 소라 : 40대 후반의 여성. 경숙의 하우스메이트. 개를 좋아하며 경숙 때문에 간접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초코·세라 : 경숙의 강아지. 경숙과 소라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둘의 자식 같은 존재.

이무백 : 40대 후반의 남성. 경숙의 전 연인. 사채로 돈을 많이 번 부모 밑에서 자랐다. 다정하고 유약한 남자.

경숙엄마 : 70대 중반의 여성. 경숙과 전형적이면서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엄마. 서로 많이 다른 듯,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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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잔인해요.>



Q선생님, 첫 편지 드린 후에 통화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일단 선생님이 미국에서 유튜브를, 그것도 요리방송을 하신다니 깜짝 놀랐어요. 저한테 Q선생님은 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어서 유튜버가 너무 의외였나 봐요.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그것도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선생님이 영화전공을 했단 얘기가 떠올라, 영상 만드는 거랑 잘 맞겠다 싶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영상을 보니 화면 깔끔하고 목소리 좋고 발음도 똑떨어져서 얼른 구독했답니다. 비록 얼굴 없는 영상이어도 그 만듦새가 선생님을 꼭 닮아서 참 신기했어요. 모쪼록 채널 잘 만들어 가시면 좋겠어요. 멀리서 응원할게요. 아! 스콘에 대한 강의와 다양한 레시피 실험영상 정말 좋았어요~ 숟가락 계량으로 요리하는 제가 보기에는 정말 대단한 실력입니다.


선생님이 글을 쓰는 게 너무 힘들어 잠시 접겠단 말씀에 참 가슴이 아팠어요. 남편분이 옆에서 지지하고 응원하고 계시다니 그건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 누구나 삶에 질곡이 있고 그걸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그린아크 초원 아파트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제가 살아온 게 그대로 드러나서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일단 저는 제 이름으로 그린아크 초원 아파트에 입주할 수가 없었어요. 자기명의의 집이 없어야하거든요. 놀랍게도 저는 집이 있었어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거의 이십년 전에 엄마가 제 명의로 엄마고향에 다 쓰러져가는 시골폐가를 샀답니다. 일종의 세컨하우스죠. 당시에 본인이 고쳐서 살 거라고 큰소리를 땅땅 쳤었어요. 근데 왜 제 이름을 썼냐하면, 조금 부끄러운 얘긴데 그 때 엄마는 신용불량자였거든요. 돈이 없는 게 아닌데, 가게(작은 미용실을 했어요.)처분하고 손에 쥔 목돈이 아까워서 빚을 안 갚았어요. 그래놓고 제 명의를 쓴 거죠. 내 참... 참고로 그 집은 여전히 폐가고 엄마는 거기 마당에 농사를 지어서 “이거 봐라! 완전 유기농이다. 얼마나 좋니?”라며 누렇고 벌레 먹은 고추, 상추 따위로 생색을 내요. 그런 초유기농 벌레 밥인지 사람 식재료인지를 만드느라 새 아파트 입주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습니다.

다행히 똑순이 소라는 우리 엄마도 없고, 본인 명의 부동산도 없어 자격을 갖췄답니다. 그런데 소라는 모델하우스를 겸한 시공사 사무실에 방문해서 설명을 듣곤 깊은 고민에 빠졌어요. 우리가 알던 전세, 월세 계약이랑은 좀 달랐어요. 전체 보증금 삼억 중에 오천을 회원보증금으로 내야해요. ‘그린아크지정 공동체운영위원회’에 회원보증금을 내고 정회원이 되어야 입주자격이 생기는 거예요.

가만 보니까 처음엔 가격이 저렴해서 경쟁률이 엄청 났었는데, 운영위원회니 회원보증금이니 하는 것들에다, 8년 지나서 분양이 될지 임대가 될지 알 수 없다고 하니 계약을 포기한 사람이 꽤 생겼나보더라고요. 그래서 뒤늦게 문의한 우리도 평형과 동호수를 어느 정도 고를 수 있었어요.

저랑 소라는 8년 보장도 괜찮았어요. 우리가 언제까지 같이 살지 모르는 거라 오히려 너무 길면 부담스러우니까요. 여기까진 그럭저럭 넘어갔는데 ‘주거공동체’, ‘사회주택’ 같은 단어가 나오면서 ‘공동체운영위원회’, ‘소셜밸류’, ‘지역사회 기여’까지 곁들여지니까 괜히 좀... 그런 쪽과 무관하게 산 저나 소라는 자격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약간... 좌파? 사회운동? 시민운동? 그런 거하는 사람들이 들어가 살아야할 거 같은 그런 분위기가 풍겨서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소라도 비슷하게 느끼는 눈치였어요. 아, 물론 저나 소라는 그런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이 있어야 주류가 아닌 사람도 목소리를 내고, 생각 못했던 방법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해서 다 같이 어울려 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둘 다 ‘어찌해야하나? 저런 아파트에 우리 같은 사람이 들어가 살아도 되는 건가?’ 고민을 하다가 기왕 왔으니 모델하우스나 보고 가자고 해서 아래층으로 향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는 짧은 동안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요약하면 ‘좀 귀찮을 거 같은데 이런데 들어가도 될까?’였어요. 먹고 살기도 바쁜데 공동체니 지역사회니 하는 단어들 땜에 뭔가 해야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저와 소라는 조금 심난한 마음으로 84A타입 모델하우스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발을 딛자마자 고민들이 옅어지기 시작했어요. 특히나 현관에서부터요!

당시 제가 무백씨랑 지내던 불광동 빌라는 꽤 넓은 편인데도 현관은 꼬딱지만해서 불편하고 옹색했어요. 그런데 새 아파트는 넓은 현관에 작은 창고와 큼직한 붙박이신발장까지 있었어요. ‘아, 이런 집에 살면 얼마나 쾌적할까~?’란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입주신청마저 불가능한 무자격자니까요. 모든 건 소라한테 달려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소라를 관찰하는데 집중했습니다. 현관을 거쳐 화장실, 작은 방들과 팬트리를 거쳐 마침내 널찍한 거실과 주방이 나타났을 때, 소라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어요. 마음에 들었던 거죠. 안방을 둘러볼 때쯤엔 이심전심, ‘우리는 여기 살아야겠다!’ 라고 느낀 걸 말하지 않고도 서로 알았답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신 후 우리는 계약을 진행하러 시행사 사무실에 다시 방문했어요. 모델하우스 보고 바로 계약하면 좀 없어 뵈기도 할 것 같고, 견물생심에 눈이 멀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걸 수도 있으니 차분히 돌아볼 시간을 가지려고 그랬어요. 소라랑 둘이 그렇게 다짐을 하고 식당에 갔지만 밥 먹고 차 마시는 내내 새로 살 가전제품 얘기랑 이사 타이밍에 대해서 얘기했었답니다. 으이구, 물욕에 눈이 먼 자들 같으니라고... 하하.


회원보증금 오천은 전세보증금처럼 이사 나갈 때 돌려받을 수 있고, 진짜 보증금 이억 오천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로 가는 거니 안전해보였어요. 한 번 입주하면 최소 8년은 보장되고, 그 이후로도 정부정책에 따라 잘하면 계속 살 수도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나라에서 보증하는 거니 중간에 터무니없이 보증금이나 월세를 올리지도 않을 거 같았어요. 다만 계약과 동시에 소모성 금액으로 사업준비비 사백만원을 내야하고, 입주하면 월세 8만원이 있어요. 사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내는 월세는 4만원인데 커뮤니티 시설을 관리, 운영하는데 쓰는 커뮤니티비 4만원이 있는 거였어요. 저도 아파트 첨 살아봐서 커뮤니티 시설이 뭔가 했는데, 왜 요즘 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헬스장부터 독서실 같은 각종 주민편의시설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뭉쳐서 말하는 거더라고요. 그린아크 초원은 커뮤니티시설이 보통 아파트보다 엄청 넓고 다양하다고 했어요.

종합하면 돌려받을 보증금 삼억에 그냥 나가는 비용이 월세 8만원과 계약하면 일시로 내는 사백인데, 저랑 소라는 서울 가까운 신축아파트에서 8년 보장받고 사는 거면 그 정도 비용은 나쁘지 않다 싶었어요.


그 때가 21년도 하반기였는데 낮에는 해가 뜨거워도 밤이면 서늘해서 계절이 바뀌는 게 몸으로 느껴지던 시기였어요. 계약을 하고 나오는데 기분이 묘했어요. 소라도 그런 것 같더라고요. 설레고 흥분되는데... 헤어짐도 있잖아요. 무백씨랑 헤어지고, 무백씨는 나랑 우리 초코, 세라하고 헤어지고... 좋은 친구지만 같이 살아본 적 없는 소라하고 같이 살아야하고.


무백씨한테 계약했다고 하니 그 아파트 보고 싶대요. 혹시나 그린아크 초원으로 이사 올 맘이 있나 싶어 물어봤더니 그런 건 아니랬어요. 무백씨는 불광동 나가면 대전에 있는 외삼촌공장에서 일하기로 했대요. 제 이삿날 정해질 때까지 대전 갈 시기를 늦춰가며 기다린 거였어요. 어째서 대전으로 갈 결정을 내렸는지 잘 알겠어서 아무 말도 못했어요. 가까우면 그 사람도 저도 너무 힘들 테니까, 거리가 있으면 그 핑계로 견디기 쉬울 테니까요.

다음 날 오후에 강아지들을 데리고 산책 겸 해서 그린아크 초원 아파트 공사현장으로 걸어갔습니다. 당시 살던 연서동빌라에서 도보로 한 시간쯤 걸리는데 우리는 초가을, 개들이랑 긴 산책을 한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걸었어요.

저는 예전에 지하철로 초원역을 지나면서 그 동네가 도시와 도시 사이의, 시골 같지 않은 시골이란 기억이었는데, 상전벽해수준으로 달라졌더라고요. 일단 지하철 역 앞은 완전 공사판이었어요. 역 앞에 상가빌딩 수십 채가 한꺼번에 지어지는 중이라 어지럽고 복잡하고 시끄러웠어요. 상가를 지나면 나머지는 전부 아파트 단지에요. 반은 다 지어서 이미 사람이 살고 있거나 곧 들어가 살 수 있을 정도였고, 나머지 반은 높이 솟은 크레인과 회색 콘크리트가 한 쌍으로 나란히 서서 멀리서도 소음이 들릴 정도로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신도시란 게 이런 게 만들어지는구나!’싶더라고요. 이렇게 만드는 과정을 보는 건 처음이라 좀 신기했어요. 그렇게 그린아크 초원으로 가면서 ‘내가 살 새 집이 여기 있다.’라고 생각하니 정말 묘하대요. 저 같이 전세 들어가는 사람도 이런데, 분양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설레고 좋을까 싶었어요.

그린아크 아파트 껍데기는 완성직전이었어요. 조경이나 단지바닥은 공사 중이었지만 건물이 색까지 다 칠해져 올라가 있으니 실감이 확 났어요. 모든 것의 실감이.... 헤어짐, 새로운 시작, 이사, 오십 살 등등....

나랑 무백씨는 아파트 정문 앞에서 오랫동안 꼭 끌어안고 있었어요. 세라와 초코는 토끼풀로 가득한 풀밭을 신이 나서 돌아다녔어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동차들만 바쁘게 우리 옆을 지나쳤어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순간을 기념했어요. 서로가 각자의 인생 한 토막에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절대 잊을 수 없고,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어른이 된다는 건 잔인해요.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겪어야하고 견뎌야 하잖아요.



2025년 8월

무더운 여름에 Q선생님을 생각하며 경숙 씀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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