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선생님께 보내는 세 번째 편지
* 이 이야기는 100% 창작을 통해 만들어진 허구입니다.
지명, 인물명, 단체명이나 사건명들이 실존하거나 실제와 비슷한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 격주(26. 03.01)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Q선생님 : 40대 후반의 여성. 화자인 ‘경숙’에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선생님. 지금은 남편과 미국에서 살고 있다.
경숙 : 50대 초반의 여성. 편지를 쓰는 주인공. 그린아크 초원 아파트로 이사해 겪은 기묘한 일들을 Q선생님에게 쓰고 있다.
(똑순이) 소라 : 40대 후반의 여성. 경숙의 하우스메이트. 개를 좋아하며 경숙 때문에 간접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초코·세라 : 경숙의 강아지. 경숙과 소라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둘의 자식 같은 존재.
이무백 : 40대 후반의 남성. 경숙의 전 연인. 사채로 돈을 많이 번 부모 밑에서 자랐다. 다정하고 유약한 남자.
경숙엄마 : 70대 중반의 여성. 경숙과 전형적이면서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엄마. 서로 많이 다른 듯, 닮았다.
강현주 사무국장 : 40대 중반의 여성. 우리가족 협동조합의 사무국장. 경숙이 그린아크 공동체운영위원회와 갈등을 겪을 때 많은 도움을 준다.
Q선생님이 지난번 제 편지를 읽고 우셨다고 해서 놀랐어요. 선생님을 아프게 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어요. 그래서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근데 솔직히 기분은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제 글을 읽고 울었다니 어째 어깨가 으쓱해진달까? 하하, 저 너무 뻔뻔하죠?
저는 지난번 편지 이후 무백씨와의 일을 Q선생님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내가 좀 성장했다는 뜻 아닌가, 근데 아직도 많이 더 커야한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은 사십에도 크고, 오십에도 커야하다니 참 녹록치 않네요. 이렇게 한탄하니 말도 잘 안 통하는 이역만리에 계시는 Q선생님께 죄송하네요. 제가 여기서 힘들다고 해봤자 선생님이 남의 땅에서 느끼는 외로움에 비할 바냐 싶습니다. 더구나 뉴스 보면 그 동네가 좀 뒤숭숭한 것 같은데 말이죠....
21년 겨을, 저는 반려동물병원 협동조합에 가입했어요. 세라가 슬개골 탈구 때문에 수술을 해야 해서 알아보니 협동조합 동물병원이 있더라고요. 참, 슬개골은 뒷다리 무릎에 있는 뼈 이름인데 소형견은 거기에 탈구 문제가 많이 생겨요. 보통 심해지면 수술을 합니다. 안하면 뒷다리 뼈가 자꾸 빠져서 나중에 아프고 힘들어지거든요. 혹시나 선생님이 거기서 개를 키우실 생각이면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미국은 주로 대형견 키우잖아요. 큰 개들은 슬개골 문제가 거의 없답니다.
제가 가입한 데는 ‘우리가족 협동조합’이에요. 조합에서 ‘우리가족 동물병원’을 운영하는데 슬개골 수술 평이 좋고, 다양한 공익활동을 하는 게 좋아보였어요. 근데 가입의 가장 큰 이유는 그린아크초원 때문이에요. 당시 무의식적으로 이런 종류의 단체에 발끝이라도 걸쳐놔야할 거 같은 압박 아닌 압박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너무 잘한 거 같아요. 우리가족 의사선생님이 세라 슬개골 수술을 정말 잘해주셔서 현재까지 잘 뛰고 잘 놀고요, 거기 사무국장님인 강현주님께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강현주 사무국장님은 저보다 살짝 어린 여성분인데 인상이 좋고, 이쪽 무지렁이인 저에게 협동조합이나 협회에 대해 많이 알려주셨어요.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어떤 일에 사명감을 갖고 임하는 사람들. 강현주 국장님이 그런 느낌이에요. 그러고 보니 Q선생님도 글쓰기에 대한 태도가 그래요! 제가 그런 분들을 좋아하나봅니다.
우리가족 조합에 가입한 건 기분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 덕에 협동조합에 호감을 가지게 됐어요. 우리가족 협동조합은 마포구에 있는데, 거기서 길고양이 중성화, 구조, 입양, 마포구 저소득층 반려동물 건강검진 같은 공익적인 활동을 많이 해요. 조합을 만든 목적 중 하나가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게 중요한 목표라 그렇다고 하네요. 아예 정관에 그 내용이 있대요.
‘내 거’, ‘니 꺼’만 가르치고 외치는 세상에서 ‘우리 거’를 얘기하는 그 분위기가 저는 맘에 들었어요. 근데 살짝 눈치 보이더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활동하면 빨갱이, 좌파 이런 단어를 쓰면서 뭐라 그러잖아요. 전 그런 말 들을 때 마다 속으로 ‘아니, 좋은 일 하는 걸 빨갱이, 좌파라고 하는 거면, 난 그냥 빨갱이, 좌파 할래.’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편하진 않아요.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2022년 2월, 저는 소라보다 일주일 먼저 그린아크초원 205동으로 이사했습니다. 미리 가서 사람살만하게 꾸며놓기로 했거든요. 직장에 매인 소라보단 시간여유 있고, 보증금도 적게 내니 이런 거라도 해야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 일주일간 참 재밌었어요. 매일 같이 쓸고 닦고 쇼핑 다니느라 몸은 좀 힘들었지만요. 하루하루 새 가구에 새 전자제품으로 새 집을 꾸미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이 맛(?)에 결혼하는 건가 싶더라고요. 나중에 다 카드청구서로 돌아올 것들이지만 어쨌거나 정말 좋았어요. 새 집에 새 물건이잖아요.
소라가 안방을 쓰고 제가 작은 방 두 개를 쓰기로 했어요. 글 작업 때문에 서재가 꼭 필요해서 소라가 배려해준 거예요. 눈치를 보아하니 소라는 저랑 사는 것보다는 세라, 초코랑 사는 게 더 의미가 큰 거 같았어요. 카톡도 자주 보내요. ‘세라, 지금 뭐해?’ ‘초코는 나 퇴근 기다리는 눈치?’ 참 내... 이렇게 개를 좋아하는 애가 그간 안 키우고 버틴 게 용하다 싶어요.
입주 초에 저는 이 아파트가 반려견 친화적인 동네가 될 거라고 믿었어요. 분위기란 게 있잖아요. 다들 정들었던 곳을 떠나 새 동네에 새 이웃과 살아야하는데, 공동체 어쩌구 하면서 의기투합한 사람들이 많아, 뭘 해도 해낼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어요. 연애초의 알콩함 같기도 하고, 새학기의 긴장감 같은 거랑도 비슷했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온라인에서 잘 보였어요. 아파트 온라인카페에 사람들이 이런저런 글을 올리는데 다들 다정하고 친절하고 열의가 넘쳤어요. 이것도 해보자, 저런 행사를 하겠다 등등등.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꿈을 꿨어요. ‘분명히 단지 안에 안 쓰는 공간이 있을 거다. 그런 데를 강아지 운동장으로 만들고, 실내라면 애견, 애묘호텔로 만들어서 입주민들이 품앗이로 운영하면 좋겠다.’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떠올리니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제가 조금만 열심히 하면 실현될 것 같았습니다. 초코, 세라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애견호텔이 단지 안에 있다니, 그것도 내가 제안하고 주민들과 함께 만들었다니! 그 때를 돌이켜보니 제가 참 꿈이 컸나 봐요. 호호호
여기 한국에선 몇 년 전부터 사람이 맹견에 물려 크게 다쳤다, 죽었다 이런 뉴스가 잊을만하면 나와요. 우리 아파트에서도 개끼리 물거나, 개가 사람을 문 사건들이 있었어요. 아파트 온라인 게시판에는 ‘나는 개 무서운데, 줄 제대로 안 잡아서 달려들고 쫓아오더라, 관리 잘 해라!’ 이런 꾸짖음이 종종 올라오죠.
그런 글을 보면 저도 달려드는 개를 상상하며 무서워하다가, 동시에 죄인이 된 기분이 듭니다. 세라랑 초코는 맹견과 거리가 멀지만, 사람들이 수군댈 것만 같아서요. 옛날 연서동 살적엔 길에서 초코한테 입마개하란 말도 들어봤어요. 고작 8킬로짜리 푸들인데요! 초코가 더워서 헥헥거릴 때 보이는 하얀 이빨이 뾰족해서 무섭대요. 그럴 때면 온 세상이 ‘네 개는 나에겐 혐오스런 동물일 뿐이야!’라고 외쳐대는 거 같아 힘이 쭉 빠져요.
우리 모두 각자에게 소중한 게 있잖아요. 적어도 상대가 소중하게 여기는 걸 존중해줄 순 있을 텐데, 왜 그러는 걸까요? 물론 저도 짐작 가는 바가 있어요. ‘내가 개를 사랑하니까 너도 개를 사랑해야해.’하는 강요 같은 느낌이 싫을 수 있다는 거. 개모차(강아지용 유모차)를 보면 ‘저게 무슨 꼴이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도 있거든요. (흥칫뿡, 남이사 개를 유모차에 태우던 말던!!) 인터넷에 채식 강요하는 사람들 보라고 채소를 고기로 바꿔서 강요하는 밈이 있는데, 그거 비슷한 마음 아닐까 싶어요. 근데 전 우리 개가 예쁘니까 당신도 당연히 좋아해야 된다는 건 아닙니다. 내 개를 사랑하는 날 존중해달라는 거예요. 까놓고 개야 뭐 싫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 개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까지 무시하면 안 되잖아요.
어쩌다보니 복잡하게 꼬인 얘기를 했네요. 그냥 저는 개를 좋아하는 아줌마에요. 쪼그만 계집애였을 때부터 쭉 그랬어요. 적어도 제가 사랑하는 것들이 남들한테 멸시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런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마찬가지로 저한테 별로여도 남이 소중하다고 하면 그걸 존중하려고 해요. 어차피 우린 모두 다 다르니까요.
좋게 어르고 달래도 쉽게 안 바뀌는 게 사람 맘인데, 화내고 욕하고 미워하면 절대로 바뀔 리 없죠. 그러니까 더더욱 미움의 말은 안했으면 좋겠어요.
마침내 소라가 이사 왔을 때 우리는 묘한 설렘에 휩싸였어요. 소라는 오랜만에 가족이 생겼고, 저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져 홀로 섰어요. 우리는 귀퉁이에 파란 비닐이 붙어있을 거 같은 새 가전제품으로 채워진, 도배풀 냄새도 가시지 않은 새 집에 있었어요.
날아올 청구서는 두려웠지만 구옥 빌라와 다세대 주택에서 맛 본적 없는 쾌적함이 저를 들뜨게 했어요. 마침내 ‘보통의’ 대한민국 사람이 된 건가 싶었어요. 사람들이 다 갖고 싶고, 살고 싶어 하는 국평(32평) 새 아파트에 내가 있다니!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사람구실을 하게 되었구나, 부터 별의별 생각과 감정이 휙휙 스쳐지나갔어요.
그러면서 다짐했어요. 잘 살자, 여기서 우리 강아지들이랑 행복하게, 즐겁게, 재밌게 살자. 이제 내 인생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으니까 더 충실하게 보내자. 2021년도 3월이었고 봄이 시작됐어요. 그 때 그린아크초원 아파트가 오십을 앞둔 저에게 인생 후반기를 시작할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답니다.
2025년 8월
입추가 지나도 여전히 더운 한국에서 경숙이 Q선생님에게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