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I May 27. 2024

멍냥토크회_배변봉투함을 만들다.

2022.05~07.23

  역사를 기록한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그간은 남의 일이었으니까 역사가들의 노고를 힘들이지 않고 치하했다. 입바른 소리는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내가 멍냥토크회의 2년 남짓한 주관적 역사기록을 남기려고 하니 만만치가 않다.

  첫번째 힘듬은 팩트체크다. 펙트가 (너무 많이) 틀리면 안 된다. 날짜나 시간을 세밀히 맞추는 건까진 못해도 부족한 내 기억에만 의지했다가는 날조와 거짓이 가득할 판이다. 그래서 남겨진 기록을 다시 읽고, 캡처하고, 사진의 메타 데이터등을 확인하는데 이게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귀찮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인생인데,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다니! 하지만 쇼는 이미 시작되었다....

  두 번째 힘듬은 과거의 환기가 불러일으키는 묵은 감정의 동요다. 나는 멍냥토크회를 하며 여러 일들을 겪었고 거기에는 기쁨부터 슬픔까지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기록을 위해 과거를 돌아보다 보면 욱 하고 치받기도 하고, 나의 실수와 모자람에 깊은 한숨과 이불킥을 할 때도 있다. 더 슬픈 점은 이러저러한 일을 겪었기에 나라는 인간은 더 성장했는가?라고 돌이켜보면 여전히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도 글은 쓸 수 있다. 이번에는 배변봉투함에 관한 이야기다. 이 배변봉투함은 물리적이고 다수 대중이 혜택을 누린다는 점에서 멍냥토크회가 우리 아파트 공동체 남긴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배변봉투함이 최초 논의된 것은 22년 5월 경이다. 카톡의 대화내용을 통해 확인했다.

  과거의 대화를 살펴보니 배변봉투함 설치제안에는 마을공동체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어있다. 나는 그 마음을 다시 확인하며 귀여움과 고마움,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다. 당시 회원들 모두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엔 마을카페에 반려견동반이라는 이슈도 있었기에 약자(?)가 된 듯한 뉘앙스도 있다. 에너지도 상당했다. 그에 반해 회원간의 관계성은 약했다. 동아리 초창기고 우리 모두는 다른 곳에서 살다 온 외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동네에서 부대끼며 같이 살 사람들이라 조심조심 하는게 대화에서 느껴진다. 과거의 카톡대화를 보고 있자니 지금 덕질 중인 아이돌 그룹의 초창기를 돌아보는 느낌이랑 비슷한 것 같다. 고작 2년 전인데 다들 젊고 살짝 어색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다.


  배변봉투함의 진행과정은 단순하다. 당시 CM운영위원회(조합 사무국이 주관한 동아리 회장들 모임) 회의에서 멍냥토크회 회원들의 의견을 정리해 배변봉투함 설치를 제안했다. 하지만 기성품은 비싸고 예쁘지도 않아서, 사무국의 비용지원으로 목공동아리와 콜라보를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목공동아리 회원인 동시에 우리 동아리의 회원이기도 한 HK가 디자인과 제작에 팔을 걷어붙였다. HK는 열심히 동아리활동을 했고,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주요인물이기도 하다.

  아파트온라인카페에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펫'이란 단어는 거슬리지만, 당시 저 글을 작성한 임시 CM센터장이자 사무국장인 SI는 반려동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어찌 사람이 다 내 맘 같겠는가? 배변봉투함 제작설치를 지원해 준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배변봉투함의 디자인은 HK가 주도했지만, 제작은 전적으로 목공동아리가 맡았다. 기술을 가진 분들이고, 나를 비롯한 멍냥의 대부분 회원들은 목공의 '목'자도 모르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대신 가서 사포질을 하거나 니스칠을 하는 정도의 도움을 드렸다.



  배변봉투함의 기능적인 부분에 대한 연구, 어울리는 디자인을 고려하며 도면을 만들고, 제작을 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주민들이 직접 만들고 설치하는 과정자체에 의미가 있으니 한 달 반 정도는 숙성기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배변봉투함의 개수와 설치장소도 동아리 내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맘 같아서는 동별로 입구에 하나씩 설치하고 싶었지만, 설치와 관리는 전적으로 우리 동아리 몫이다. 아파트단지가  그리 크지도 않다. 그래서 이런저런 고려 끝에 정문 근처 101동 옆, 단지 중앙인 104동 앞, 후문 105동 쪽에 하나씩 해서 총 3개를 설치하기로 하고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구했다. 아파트에 시설물을 설치하는 건 관리사무소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조합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일이고, 취지가 좋으니 관리소에서도 선선히 허락해 주었다.




  사진의 메타데이터로 22년도 7월 23일 오전 11시경부터 설치한 것을 확인했다.

  설치를 같이 했던 멤버 두 분은 고양이 보호자였는데 지금은 동아리 회원이 아니다. 어쨌거나 동네에 사는 분들이니 종종 얼굴을 본다. 그중 한 분과는 마을에서 있었던 격동(?)으로 인해 편하지만은 않다. 물론 만나면 반갑게 인사 나눌 것이다. 일이 좀 있었다해서 이웃이 이웃이 아니게 된 건 아니니 말이다.

  나는 누누이 동아리 단톡방에서 우리가 한번 연을 맺었다면 회원이든 아니든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이웃이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동아리가 뭐 대수라고 탈퇴 같은 걸로 서먹해지면 쓰나? 오히려 이런 식의 관계 맺음이라도 있었던 것이 개인은 물론 공동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의 배변봉투함은 꽤 낡았다. 야외에 서있는 물건이니 비바람을 견디는 게 쉽지 않다. 앞쪽 A4용지를 넣는 아크릴 안내판은 세 개의 배변봉투함이 각각 한 번 이상 망가져서 새로 붙였다. 경첩과 자물쇠 걸고리는 녹이 슬어있고, 비를 직접 맞는 지붕 나무패널은 접착된 결들이 벌어졌다. 또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의 회비로 내부의 '똥츄'를 3번 정도 채웠다. 저 안에 들어가는 비닐 양이 상당해서, 그간 채운 비닐양이 8000매는 족히 된다.




 

  배변봉투함은 이제 아파트 풍경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너무 잘 녹아들었는지, 봉투가 준비 안되어있을 때도 종종 있다. 멍냥토크회 회원의 유일한 의무가 이 배변봉투함의 비닐세팅인데, 나 포함 적지 않은 회원들이 무심히 지나친다. 그렇지만 그 상태가 계속 방치되진 않는다. 어느 날 문득, 엊그제 배변봉투함에 봉투 안 삐져나와있던 것 같던데...라고 환기되면 산책할 때 가서 봉투를 세팅한다. 가끔 누군가가 세팅해 놓았을 때도 있다. 그걸 보면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다. 아, 나 말고도 우리 회원 누군가는 이걸 기억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햇볕처럼 마음을 뭉근히 데워줘서 그렇다.

  언젠가는 완전히 망가져서 다시 만들어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래도 나는 배변봉투함이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주길 바란다. 멍냥토크회가 남긴 물리적으로 가장 큰 유산이자, 공동체를 향한 작지만 뿌듯한 구애이기 때문이다.   

 









이전 05화 멍냥토크회_봄소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