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에 깔아 놓은 회색 자갈 사이로 솟아난 봉숭아가 7월의 태양 아래 빨간 꽃을 피웠다. 아버지가 구해오신 봉숭아 씨앗을 뜰 한쪽에 심었더니 몇 해가 지나자 집 곳곳에 봉숭아가 자라나 더러는 뽑고 몇 포기는 꽃을 보리라고 길렀다. 일부러 씨를 퍼트린 것도 아닌데 늦여름 씨방에서 터져 나온 씨앗들이 그 넓은 뜰 구석구석까지 번져나간것도신기하고 두껍게 깔아 놓은 자갈 사이를 뚫고 씨앗이 자라 이렇게 튼실한 줄기를 피워 올린 것도대견하다.
봉숭아는 사실 직관적인 꽃 모양새의 아름다움 보다는 정서적인 아름다움이 더 큰 꽃이다. 그나마 일렬로 쭉 심거나 군락을 이루면 조화로움이 있어 보기가 낫지만, 뭉툭하게 올라간 줄기에다 지난하게 뻗은 잎사귀의 겨드랑이에 어색하게 매달려 피운 꽃은 가끔 생뚱맞아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봉숭아가 꾸준히 사랑을 받는 것은 다른 꽃들에 비할 수 없는 봉숭아 만의 아름다움이 분명 있기 때문일 것인데 나는 그 이유가 사람들의 정서와 추억 속에 봉숭아가 착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집 주위에 꽃을 피우는 7월의 꽃들은 봉숭아와, 담장 너머 황무지에 드문드문 서 있는 노란 달맞이꽃과 백일홍 정도이다. 봉숭아는 봉선화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도 하는데 모두 표준말이지만 봉선화라는 이름은 봉숭아보다는 왠지 더 토속적인 정서를 입은 이름 같다. 아마도 홍난파가 작곡한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인 봉선화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가요 중에는 시라고 할 만한 좋은 가사를 가진 곡들이 많은데 특히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시라고 해도 손색없는 아름다운 노랫말에 멜로디를 입힌 그야말로 노래 시가 많다. 봉숭아라는 이 곡은 박은옥이 가사를 쓰고 정태춘이 작곡을 했으며 부부가 함께 불렀는데, 내가 대학 새내기였던 1985년에 발표되어 요란하지 않은 인기를 누렸고 몇 년 후 민주화로 세상이 들끓던 시절에도 잔잔하게 대중의 가슴속에 위로의 음률로 적셔졌던 곡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태춘의 곡을 좋아하고 많이 불렀다. 정태춘의 목소리만큼 짙은 황토색의 질감을 가진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목소리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뿐 아니라 그의 음악은 짙은 한국적인 정서와 함께 시대정신과 저항정신을 담기도 했다. 특히 시인의 마을과 같은 곡은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수필과도 같거니와, 그 밖에도 남들이 그리지 못하는 철학과 실존의 정신을 종교적, 토속적 음률로 옷 입힌 곡들이 참 많아서 그의 노래를 부를 때는 덩달아 나 또한 진지해지고 때로는 비장해진다.
봉숭아는 박은옥의 맑은 목소리가 곡 전체를 끌어가고 정태춘의 잔잔한 화음은 그저 메밀국수 위에 슬쩍 얹어진 오이 고명처럼 도드라지지 않으며 본질의 맛을 더 깊게 해 주는 역할만 한다. 뿐만 아니라 편곡은 오로지 박은옥의 목소리로 그려가는 봉숭아 그림에 악기소리가 은은한 배경들이 되도록 만들어졌다. 우선은 도입부를 끌어가는 하모니카 소리와 클래식 기타의 차분한 분산화음이 그렇다. 이곡의 전체 흐름은 통기타의 철사소리가 아닌 손톱으로 한 줄 한 줄 튕기며 연주하는 클래식 기타의 따뜻한 소리가 끌고 간다. 그 위를 타고 흐르는 하모니카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어느새 아득한 추억의 시간으로 되돌려 놓기에 부족함이 없다. 거기다 이 곡을 명곡으로 만든 데는 박은옥의 특별한 목소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노래를 부르는 박은옥의 목소리는 맑다. 그 맑음은 그냥 맑음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깊이가 있어 맑되 가볍지 않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그의 특별한 목소리의 질감에 대한 가장 비슷한 표현이 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발라드 가수들의 목에서 나오는 가녀리고 맑은 목소리와는 다르게 속에서 울려 나오는 그 목소리의 맑음에는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건성 그리고 오래 정제된 감정의 표현이 용해되어 있다.
모든 대중가요들이 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지만 이런 곡들은 대중들의 기억 속 박물관 같은 곳에 소중하게 간직될 보물 같은 시대적 정서를 간직한 곡이다. 화려한 네일아트가 손톱 멋 내기의 대세가 된 세상에서 손끝마다 무명실 매어 주던 봉숭아 물들이기의 추억은 이미 낡은 흑백사진처럼 남루해졌다.
누이들이 많았던 내 유년의 칠월에는 어김없이 봉숭아 물들이기 행사가 있었다. 칠월칠석에 손톱에 물들인 봉숭아가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은밀한 염원들을 모두 마음에 담은 채, 적당히 빻은 봉숭아 꽃잎에 백반을 더하여 조심스레 손톱마다 올려주고 얇은 비닐로 감싼다음 무명실로 묶어 주었다.
한 밤을 지나고 나서 풀어보면 손 톱 위에 정성스럽게 올려두었던 봉숭아는 잠자는 동안 뭉그러져 손톱뿐 아니라 손가락 피부까지 붉게 물들여놓곤 했다. 누이들은 내게도 봉숭아 물을 들여주곤 했는데 주로 새끼손가락이나 약지까지만 해 주었다. 덕분에 정태춘 박은옥의 봉숭아라는 곡은 내 유년으로부터 사춘기 시절까지의 추억에 그 뿌리가 닿아있다.
그리운 이를 마음에 품은 채 손톱에 봉숭아를 물들이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는 설렘을 안고 첫눈 올 때까지의 몇 달을 인내한다는 것은 이젠 전설 같은 일이 된 지금, 칠월의 뜰이 봉숭아꽃으로 붉어질 때면 서로 손가락에 무명실을 매어주던 누이들의 모습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