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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Nov 02. 2024

이름도 모르던 도시, 오르후스가 좋아지다

6월 4일 오르후스

해가 너무 일찍 떠서 7시가 되니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아침부터 건조해서인지 감기기운인지 목이 아파왔다. 여행 중에 감기에 걸리면 꽤나 골치가 아프기 때문에, 물을 끓이고 평소에는 안 먹던 따뜻한 차를 홀짝였다. 식탁에 앉아 한국에서 벌려둔 일을 조금씩 마무리했다. 8,000km 떨어진 오르후스에서 일을 하고 있다니, 어쩌면 꿈꾸던 디지털 노마드를 이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을 마치고 씻는 사이, 친구가 아침을 준비해 줬다. 오늘은 오르후스에서의 마지막 날이기에 그동안 먹었던 식재료 중 애매하게 남은 것들을 먹는 '냉장고를부탁해' 스타일이다. 친구가 좋아하는 빵 위에 구멍 난 치즈를 올리고, 남은 햄에 계란 스크램블, 그리고 약간의 과일이었다. 그새 친구가 해준 한식에 적응됐는지, 아침부터 한식이 그리웠다.



아침을 먹으며 친구가 또 여러 곳을 추천해 줬는데, 그중 모에스고르 박물관을 가보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려고 하니 30분이 넘는, 9km 떨어진 꽤 먼 곳이어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공항버스 말고는 덴마크에서 한 번도 버스를 타본 적이 없기에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 버스 티켓 어플을 깔았다. 15분 거리에 5,000원, 확실히 한국에 비해서는 물가가 비쌌다.



15분을 걸어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정류장에 키 큰 남자 하나가 책을 보며 여유롭게 앉아있다. 그래, 이게 유럽이지. 잠시 뒤 버스가 왔는데, 따로 티켓을 태그 하는 곳이 없어서 주변을 살피다 그냥 자리에 앉았다. 이럴 거면 표를 왜 샀나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아까운 내 5,000원.



모에스고르 박물관은 우리나라로 치면 민속 박물관 같은 곳인데, 사선형의 잔디로 된 지붕이 특징적인 곳이다. 초록색 동산 같은 잔디 지붕에서 어린아이들이 소풍을 와서 음식을 먹기도 하고, 뛰어놀기도 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박물관 주변에는 다른 높은 조형물이 없어서 마치 전망대에 올라온 것 같기도 했다.



박물관에서는 덴마크 역사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입장료도 꽤 비싸고 큰 관심이 없어서 박물관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잔을 시켜서 지붕 위에 앉았다. 사방이 뻥 뚫린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주변에도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풍경 덕분인지 커피 맛이 엄청 훌륭하게 느껴졌다.



주변초등학생들이 견학을 와서 도시락을 먹고 있었는데, 혼자 앉아 있는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계속 옆에 와서 '곤니찌와'하며 하하 호호 웃고 있었다. 사실 인종차별인 걸 알지만, 어린애들이 뭘 알까 싶어 관심을 안 주니 그냥 두니 제 풀에 지쳐서 멀리 도망가듯 뛰어갔다. 어리니까 봐주는 거야.



박물관에서 바라본 풍경도 멋있었지만, 주변에 숲이 잘 조성되어 되어 있고 독특한 학교도 있어서 숲 냄새를 맡으며 산책을 하기에도 좋았다. 나무도 한국과 다르게 둘레와 키가 정말 커서 경이로울 정도였다. 시간만 더 있다면 잔디밭에 누워서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니 점심을 먹기 위해 친구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오래 걸리더라도 돌아갈 때는 자전거를 타고 숲길을 달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출발할 때는 30분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출발하자 왜인지 시간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게다가 금방 차도에서 차와 뒤엉켜 달려야 해 원하던 숲길 라이딩의 느낌은 거의 느껴보지도 못했다. 그나마 가끔 나오는 내리막길에서 맞은 바람이 시원해 기억에 남았다. 


자전거를 오랜만에 타서인지 설상가상 엉덩이와 다리가 무척이나 아파왔다. 반쯤 오니 하체뿐 아니라 온몸이 아파 왔는데 반납을 하고 싶어도 반납 포인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50분이나 자전거를 타고 와서야 친구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다시는 자전거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도착하니 친구가 해둔 김치볶음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다 지쳐서 먼저 먹었다며, 미안하다고 하는 친구가 왜 이리 고마운지. 오전에 다녀온 박물관 여행기를 공유하고, 친구가 소개해주는 몇 곳을 또 지도에 찍어두고는 피곤이 몰려와 에어베드에 지쳐 누웠다.


이제 곧 오르후스를 떠나야 했기에, 얼른 나가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누워있는 몸은 말을 전혀 듣질 않았다. 그래도 30분쯤 누워있으니 약간은 충전이 돼서, 겨우 다시 몸을 일으켜 나갈 채비를 했다. 오후 코스는 오르후스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오르후스 미술관. 어쩌다 보니 하루종일 전시 투어의 날이 되어 버린 하루.



오르후스 미술관은 꼭대기에 있는 레인보우 파노라마로 유명한 곳으로 지금은 론뮤익이라는 극사실주의 작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20분 정도 걸어 미술관에 도착해 티켓을 끊었다. 학생이냐고 묻는 직원. 그래도 좀 어려 보였나 보다. 성인 가격인 180 크로네를 내자 꼭대기부터 내려오는 게 좋다며 책자를 내민다. 학생이라고 뻥칠걸 그랬나.



안내대로 꼭대기인 레인보우 파노라마부터 구경했다. 분명 겉에서 볼 때는 색이 멋졌는데 내부에서 보자 그냥 색안경을 낀 느낌이 아쉬웠다. 그래도 이와 왔으니 둥글게 몇 바퀴를 돌며 인증사진을 찍고는 천천히 내려오며 전시를 관람했다. 론뮤익 외에도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꽤 많았다.



특히 지하에 있는 설치작품이 인상적이었는데, 학교 교양시간에 배운 제임스터랠과 올라프엘리어슨의 작품도 있다. 일본의 버려진 교실에 천둥 치는 듯한 상황을 재현한 작품은 인상적이어서 10분을 가만히 앉아서 감상했다. 생각보다 미술관 자체 규모가 커서 꽤 오랜 시간을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오늘도 느낀 건, 확실히 나는 미술관 체질은 아니라는 것.



미술관을 나와 오르후스의 가장 예쁜 집이 모여있는 거리로 향했다. 관광지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 작은 거리였다. 규모도 생각보다 작고, 날씨가 맑지는 않아서 기대보다는 볼 게 별로 없었다. 그냥 현지 사람들 집은 어떻게 생겼나 내부를 기웃거리고는 다음 코스로 향했다.



마지막은 DOKK1라는 공공도서관이었다. 덴마크는 동사무소 같은 공공업무를 도서관에서 한다는 친구의 설명에 이끌려 방문한 곳. 우리나라 동사무소와 다르게 상시 개방되어 있어서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했다. 우리나라의 도서관이나 동사무소와 다르게 대학생들이 과제도 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어서, 대학교에 몰래 잠입한 느낌이 들어 재미있었다. 게다가 해변가에 있어 뷰도 좋아서 방문한 곳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현지인처럼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태블릿을 펴 들고 잠시 작업을 하며 친구와의 약속 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오늘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핑 돌았다. 친구가 살지 않았으면 몰랐을 도시. 현지인같이 살며 생각보다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물가가 비싸서 좀처럼 외식을 안 하는 친구가 오랜만에 외식을 제안했다. 친구와 함께하는 오르후스의 마지막 저녁식사. 친구가 평소 좋아하는 식당에 방문했는데,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어딜 가도 보통 이상은 하는 북유럽의 감성이 너무 좋았다.



저녁 메뉴는 비건 파스타와 라자냐. 메뉴가 자주 바뀌는데, 친구가 좋아하는 메뉴가 하필이면 오늘 안된다고 했다. 사실 비건이라고 해서 파스타는 크게 기대 안 했는데, 쌀알 같은 면이라 파스타보다는 리소토 같아서 신기하고 먹을수록 매력이 있었다. 먹을수록 건강해지는 느낌이라 더 만족스러웠다. 라자냐도 무난 무난.



로컬 맥주도 두 잔이나 시켰는데, 한국의 맥주와 맛이 달라 특별하고 다시는 못 먹을 맛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마셨다. 매일 음식을 해주는 게 미안해 저녁을 대접하려 했는데 한사코 거절하는 친구, 무슨 복을 타고났길래 이런 친구를 곁에 뒀을까. 고마운 마음이 한가득 더 생겨났다.



오랜만의 외식에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워 덴마크의 키치 한 맥주 브랜드인 Mikkeller펍을 찾았다. 친구와 몇 년 전 코펜하겐에서 같이 방문했다는데 나는 기억이 나질 않는 나. 기억력이 좋지 않다며 또 한 번 핀잔을 받았다. 맥주맛도 맛이지만 디자인과 아트웍이 너무 좋아 기회가 된다면 또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9시 반, 바깥은 역시나 아직도 환했다. 부랴부랴 코펜하겐으로 떠날 짐을 싸고는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다운로드하다가 그대로 일찍 잠에 들어버렸다. 


이름도 모르던 도시, 오르후스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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