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오르후스
에어매트가 살짝 딱딱했는지 몸은 뻐근하고 아침 일곱 시쯤 일찍 눈이 떠졌다. 그래도 추운 곳에서 한참을 걸은 터라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감기는 걸리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서 핸드폰을 하는데 카톡이 울렸다. 바로 옆 방에 있던 친구가 보낸 아침거리를 사자는 카톡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트로 향했다.
집 앞에는 두 개의 마트가 있었는데, 친구는 그중 한 마트의 빵집을 유독 좋아한 댔다. 단골 가게가 있는 걸 보니 외국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친구가 좋아하는 베리가 든 바게트 빵과 치즈, 햄. 야채를 샀다. 친구는 그 재료들로 아침을 뚝딱 차려줬다. 빵 위에 얹은 구멍 난 치즈와 특이한 햄, 야채와 과일까지 오랜만에 먹는 낯선 양식 한상이었다. 친구가 좋아한다던 빵은 역시나 꽤 맛있었다.
오늘의 일정은 친구가 소개해준 Den Gamle By라는 올드타운 박물관이었는데 하필 바깥 날씨가 우중충했다. 게다가 밖에 나와 자전거를 타려고 휴대폰을 보니, 왜인지 인터넷 신호가 잡히지를 않았다. 이심을 안 바꾼 탓이었다. 어젯밤까지도 바꾸기로 다짐을 하고는 아침에 바쁘게 나오느라 깜빡해 버린 나 자신이 미웠다.
박물관까지 걸어가기로 했는데 다행히 오프라인 지도를 다운로드한 터라, 찾아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30분이 넘는 거리라 힘들었는데, 날씨까지 우중충해서 괜스레 더 우울해졌지만 말이다. 특히나 날씨가 좋을 때 더 예쁜 곳이라는 친구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아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도 다행히 박물관에 도착하니 날씨가 좀 맑아져 있었다. 사실 가격이 꽤 비싸서 안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30분을 걸어오고 나니, 안 들어가면 오히려 손해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매표소를 한참 서성이다 표를 끊고는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문을 열고 들어가니 빨간색 전통 의상을 입은 할아버지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문을 잡아주며, 웰컴 투 올드타운을 외치며 눈인사를 건넸다. 그 장면이 너무나도 영화 같아서 실제로 옛날의 덴마크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덴마크의 역사를 그려놓은 이곳은, 실제 사람들이 옛날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옛날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체험공간에 가까웠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민속촌 같은 느낌의 공간. 몇몇 상점에는 해당 시절의 옷을 입고 그 당시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는데, 그 모습이 시대를 넘나드는 것 같아서 매우 묘한 기분이었다.
어떤 집에 들어서니 옛날 사람 복장을 한 사람이 점심시간이라 밥을 짓고 있다며, 덴마크식 전통 아침식사를 만들고 있었다. 불도, 조리기구도, 요리도 실제와 같아서 마치 과거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직원에게 실제로 여기 살고 있냐고 물었더니, '연출 상으로는 그렇지'라는 다소 당연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도 모르게 과몰입을 했나 보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포즈도 취해주는 모습이 정말 프로페셔널해 보였다. 돈이 아까워서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순간이 아쉬웠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듯한 경험이 너무 생생하면서도 새로웠다.
덴마크의 미술, 디자인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과 근현대의 팝 레트로 느낌으로 구현해 놓은 거리를 마지막으로 모든 관람을 마쳤다. 친구와 약속한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생각보다 볼 게 많아서 예정보다 늦게 박물관을 나왔다. 인터넷이 안 돼서, 늦는다는 연락도 못해서 마라톤 하듯 빠르게 집으로 뛰어갔다.
점심메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빔국수와 파전이었다. 친구가 요리하는 동안 지하에 내려가 빨래를 걷어왔는데 미로 같은 지하실은 언제 가도 재밌었다. 빨래를 걷어오고 나니 친구는 이미 비빔국수 재료를 다 썰어서 면을 삶고 있었다. 요리를 뚝딱뚝딱하는 모습에서 친구의 다년간 유학생활이 실감 났다.
점심을 맛있게 한 그릇 뚝딱 하고는 이심을 새롭게 개시하고 오후 계획을 고민했다. 언제 외식을 하면 좋을지, 동선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파워 J인 친구는 혼자 이런저런 선택지를 고민하며 제안하고 있았고, 파워 P인 나는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이 이것저것 찾아만 볼 뿐이었다.
친구가 내린 결론은 같이 카페에 다녀오고, 친구는 다시 집으로, 나는 혼자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친 친구와 jumbo라는 카페를 향해갔다. 친구가 좋아하는 베이커리 카페 중 하나인 기찻길이 보이는 카페였고, 일본 느낌이 나는 분위기에 여러 종류의 빵을 팔고 있었다.
rabarbar가 올라간 대니쉬와 kartoffelkage(감자케이크)에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여름에만 맛볼 수 있다는 rabarbar라는 채소는 시큼한 맛이 특이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친구의 남편과 남편 친구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일이 바쁜 친구는 먼저 집으로 떠나고, 기찻길이 보이는 카페가 좋아 사진을 찍으며 한참의 시간을 더 보냈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친구가 추천해 준 항구 쪽을 가보기 위해 덩키리퍼블릭을 켰다. 가까운 정류장은 생각보다 멀어서 십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15분 정도의 거리를 걸어갔다. 막상 자전거를 타려니 수신호라던가 방향을 잘 몰라서 은근 걱정이 됐다.
30분 단위로 되는 과금을 더 저렴하게 타기 위해서 목적지보다 조금 멀리에 자전거를 세웠다. 항구 근처에는 친구가 말한 수상스포츠가 한창이었다. 하늘에 달린 도르래를 잡고 서핑을 하는 스포츠였는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운동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맥주를 마시며 하염없이 몇십 분을 바라보다가 더 먼 바닷가 쪽으로 이동했다.
바닷가 쪽에는 신식 건물이 많았는데, 건축 수업에서나 들어본 특이하고 깔끔한 아티스틱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나가는 길 공원에 있는 해먹에 누워 지친 몸을 누이고 여유를 만끽했는데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썩 좋았다. 게다가 날씨도 완전히 개어서 푸른색 하늘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니 바다에 뛰어드는 사람, 요트 타는 사람, 러닝 하는 사람이 다양하게 있었는데, 그 여유로운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요트와 물놀이하는 사람들. 지나가는 기차 바닷가에서 공놀이하는 사람들까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너무 좋았다. 아 맞다 나 바다멍 좋아했지. 여유를 즐기고 있으니 여행객과 거주자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전거로 한 바퀴 돌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플 상에 자전거가 있다고 표시된 곳으로 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자전거가 없었다. 오류인 듯싶었다. 결국 20분을 걸어와 처음 자전거를 댄 곳에 다시 왔다.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를 한 바퀴 돌았는데 기분이 생각보다도 더 좋았다. 저녁시간에 맞춰 서둘러 친구집으로 자전거를 이동했는데 기준 시간이 초과되어 천천히 돌아갔다. 가는 길에 공원에 들러 십 분 정도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메뉴는 닭볶음탕이었다. 매번 식사시간에 맞춰서 음식을 미리 준비해 주는 친구. '이런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생각했다. 오히려 반찬이 없다며 미안하다는 이야기가 가슴이 뭉클하게 했다. 맥주와 같이 먹으며 부모님 이야기, 부부 경제권 이야기, 취미이야기까지 두 시간을 떠들었다.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아직도 밖은 환하기만 했다.
올드타운에 카페, 그리고 천국 같던 항구, 친구가 정성껏 차려준 저녁까지.
천국에 온 것 같은 완벽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