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런던
런던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부터 분주했다. 체크아웃을 위해 짐부터 싸야 했다. 혹시나 한식이 그리울까 열심히 소분해 온 컵라면은 아직 반도 먹지 않아서 아침으로 해치우기로 했다. 호스텔 로비로 내려가 냄새가 너무 날까 주변 눈치를 보며 작은 컵라면을 먹고는 방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짐을 꾸렸다. 그 사이 콘센트가 없는 화장실은 익숙해졌고, 드라이기도 자는 사람이 시끄러울까 눈치 안 보고 쓰게 됐다.
모든 짐을 꾸겨 놓은 캐리어를 호스텔 로비에 맡겼다. 보통 호텔에서는 숙박하면 짐은 무료로 맡아주는데, 호스텔이라 그런지, 유럽이라 그런지 얄짤없이 4파운드를 받아갔다. 야박한 유럽 인심에 괜스레 한국이 그리웠다. 오늘은 친구의 만삭사진 촬영을 도와준 후 마지막 런던여행을 함께하고 스탠스테드 공항 근처의 호텔로 가는 일정이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온 이유는, 친구에게 줄 깜짝 선물을 위해서였다. 전날 만삭사진 때 함께 찍을 용모양 인형을 만지작 거리던 게 계속 떠올랐다. 결국 비싸서 내려놓는 친구의 아쉬움이 느껴져, 친구 몰래 출산 선물로 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침 일찍이라 역사 안에 있는 작은 장난감 가게만 문을 열었고, 아쉽게도 용모양 인형이 없었다. 두 곳을 방문했지만 결국 허탕이었고, 하는 수 없이 빈 손으로 친구가 예약한 스튜디오로 향했다.
스튜디오가 있는 워털루 역에 도착했다. 친구와 함께 마실 모닝커피를 손에 들고 약속장소 앞에 있는 친구를 만나 건넸다. 친구는 모르겠지만 깜짝 선물을 사지 못한 미안함의 커피였다. 워털루 역은 처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거리에는 한국어로 "포장마차"라고 적힌 술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스튜디오 입구가 있었다.
민트색 건물의 입구에는 you라는 이름의 작은 간판이 있었다. 흑백 사진 스튜디오였는데, 한국에서 흔한 셀프스튜디오 문화가 요즘 외국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친구의 첨언이었다. 유럽으로 워홀 와서 스튜디오나 운영할까,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스튜디오로 올라갔다. 친구는 캐리어를 들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스튜디오가 2층이었다. 영국은 또 0층부터 시작이라 한국으로 치면 3층까지 올라야 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니 작은 대기실 겸 작업실이 있었다. 찌그덕 거리는 나무 바닥에 깔끔한 가구와 인테리어, 창밖에 보이는 소소한 풍경이 꽤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나도 유럽에 살고 싶다" 생각이 잠시 스쳤다. 사진을 찍는 공간은 그 옆에 작은 방이었다.
하얀 배경지가 깔려 있고, 그 앞쪽에 카메라가 세팅되어 있어 직접 셔터를 눌러 사진을 촬영하는 거였다. 작은 소품들도 있어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했다. "와 이거 꽤 쏠쏠한데?" 큰 투자금이 들지 않을 것 같아 진짜로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스쳐갔다.
넉넉할 것 같았던 40분의 촬영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처음엔 포즈도 고민하고 신중하게 찍던 친구도, 시간이 갈수록 급하게 사진을 찍어댔다. 잠시 옷을 갈아입거나 쉬는 타이밍에는 나도 사진을 찍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사진을 몇 장 건질 수 있었다. 셀프 스튜디오는 처음이라 좀 어색했지만 말이다. 친구 덕에 만삭사진도 간접 경험하고, 외국에서 스튜디오 촬영을 해보는 경험도 해볼 수 있었다.
친구 짐도 호스텔에 맡기고 점심 행선지인 노팅힐로 향했다. 영화 노팅힐의 배경이 되는 곳이었다. 포토벨로거리에는 거의 매일 마켓이 서는데, 토요일에만 앤티크 마켓이 서서 꼭 오늘 와야만 한다고 했다. 역 근처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는데, 확실히 마켓 근처에 오자 관광객이 많았다.
스페인 빠에야와 독일 핫도그, 베트남 스프링롤, 한국 김치볶음밥까지 점심으로 먹을 만한 세계 음식도 많이 있었다. 몇 가지 음식을 조금씩 사서는 같이 나눠먹고는 포토벨로 마켓을 구경했다. 빈티지한 물건에 기념품까지 구경할 거리가 많았고, 마켓 위 다리를 건너는 기차 풍경이 생경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했다.
사진촬영에, 마켓 구경까지, 많이 힘들었는지 친구가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자고 했다. 꽤 팬시해 보이는 줄이 긴 일본 빵집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빵은 그럭저럭 이었는데, 바로 옆에 노팅힐 영화의 배경인 노팅힐 서점이 있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영화도 미리 보려고 다운로드해놨는데, 결국 게으름에 보지도 못한 게 생각나 아쉬웠다.
노팅힐 구경을 마치고는 근처 공원으로 가서 잠깐 수다를 떨며 쉬었다. 홀랜드 공원이라는 곳인데 영국은 곳곳에 꽤 큰 규모의 공원이 많았다. 영국의 대표 칵테일인 핌스를 하나 집어 들어마시고 있는데, 주변에 다람쥐가 계속 뛰어다녔다. 평생 본 다람쥐보다 더 많은 숫자를 볼 수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런던 디자인뮤지엄. 친구가 엔조마리의 전시를 꼭 보고 싶다고 했다. 잘 모르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초록색의 배와 빨간색의 사과가 그려진 포스터를 보니 작업이 눈에 익었다. 2만 원이 넘는 티켓가격에 조금 놀랐지만, 오랜만에 디자인 교양 쌓기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영국의 디자인 역사를 볼 수 있는 상설 전시가 더 마음에 들었다.
전시를 보고 나니 친구가 근처에 있는 파리바게뜨를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한국식 빵이 그립다고 했다. 유럽 한복판에 있는 한국 브랜드라니, 게다가 유럽의 아이템으로 만든 한국 빵집이라 더 신기했다. 물론, 아쉽게도 한국식 빵은 없었지만 말이다. 시내에 온 김에 부츠에 들러 영국에서의 마지막 쇼핑을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호스텔 로비에서 파리바게뜨에서 산 조각케이크를 먹고 있는데, 친구가 쉬고 싶다며 야경 동행을 한 번 구해보라고 했다. 아무래도 일정이 너무 힘들었나 보다. 나 때문에 너무 무리한 건가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친구의 대학원 시절 추억이 담긴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을 예정이니,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친구의 대학원 시절 추억이 담긴 중국집이 있었다. 스트레스받으면 매운 걸 먹으러 오던 식당이랬다. 친구의 기억에 비해서는 손님도 많이 없고, 가게도 축소됐지만, 다행히 식당은 그 자리에 있었다.
메뉴는 Shui Zhu Yu (水煮鱼)와 마파두부. 정말 오랜만에 먹은 마라 매운맛이 너무 맛있었다. 한국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마라를 먹던 터였다. 다른 손님은 대부분 중국인인 찐 중국집이었다. 친구는 신이 났는지 사진도 찍어달라고 하고, 3 공기는 되어 보이던 밥도 싹싹 비워냈다. 기분이 나아진 듯해 다행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마지막 행선지를 고민했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밤이기에, 타워브리지의 야경은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캐리어를 끌고 가야 해서 조금은 힘들 것 같았지만, 친구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흔쾌히 동행해 주었다. 근처 M&S에 들러 기념품 과자와 조카 장난감을 사들고 친구의 대학원 건물도 잠시 구경하고 짐을 재정비하고는 타워브릿지행 버스에 올랐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라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타워브리지 야경은 예상보다 더 예뻤다. 내 눈에는 빅벤, 런던아이, 웨스트민스턴사원 등 다른 곳보다 유독 타워브리지가 더 예쁘게 느껴졌다. 친구는 "야경을 미리 좀 보지 그랬어!"라고 투덜대면서도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었다. 밤늦게 무리가 되는 일정일 텐데도 말이다. 덕분에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건질 수 있었다.
아쉬운 야경을 뒤로하고 스탠스테드공항행 급행열차를 타기 위해 리버풀스트리트 역에 왔고, 딱 5분을 남기고 무사히 기차에 올랐다. 무조건 30분 전에는 역에 도착해야 하는 극 J 친구는, 굉장히 불안해 보였다. 옆에 있는 나까지 괜스레 초조해졌다. 그래도 공항으로 가는 50분 동안 기절하듯 꿀잠을 잤다. 친구는 계속 깨어서 짐을 감시했지만 말이다.
생전 처음 들어보고, 처음 방문한 스탠스테드공항은 히드로 공항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았다.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는데, 친구 남편의 도움으로 레디슨 블루라는 꽤 좋은 공항 호텔에 저렴하게 묵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묵은 곳 중 좋기로 손가락 안에 드는 호텔이라, 잠만 자야 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M&S에서 사 온 트러플맛 감자칩에 기네스 한 병을 따 들고는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친구는 내 코골이 때문에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