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일 런던
런던에 왔으니 뮤지컬은 한 번 봐야겠다 싶었다. 유튜브에서 취소티켓 재판매인 데이시트를 통해 뮤지컬을 저렴하게 볼 수 있다고 한 게 떠올랐다. 2층 침대에 한참을 누워 블로그 여기저기를 검색해 봤다. Todaytix라는 어플을 설치하고 원하는 뮤지컬의 데이시트 티켓을 10시에 맞춰 광클하면 된다고 했다. 무려 29.5파운드, 한국돈으로 5만 원 정도 되는 돈으로 뮤지컬을 볼 수 있다는 거였다.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데이시트를 하려면 뭔가 먹으러 나가기에 시간이 애매했다. 바로 나갈 준비를 하고 숙소 라운지에 앉아 데이시트를 기다리며 오늘 일정을 정리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라운지에서 파는 빵과 커피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빵이 맛있어 놀랐다. 숙소에서 파는 거라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의외였다. 밖에서 아침을 못 먹어 느낀 아쉬움이 싹 사라지는 맛이었다.
뮤지컬은 런던 여행에서 가장 교과서 같은 뮤지컬로 통하는 프로즌을 선택했다. 레미제라블이나 라이온킹도 추천을 많이 했는데, 레미제라블은 가볍게 볼 뮤지컬은 아니라고 하고, 라이온킹은 아쉽게도 데이시트를 현장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영어로 진행할 테니, 전체 스토리를 아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10시가 되어 어플에 접속하니, 정말 29.5파운드에 뮤지컬 표를 구매할 수 있었다. 2층이나 3층 자리도 있었지만 앞쪽 자리도 꽤 많은 자리가 있었다. 좌석별 가격도 모두 다른데, 원래 꽤 높은 가격인 자리를 운 좋게 고를 수 있었다. 역시 한국인은 티켓팅에 강한 민족이었다.
티켓팅 성공의 기쁨을 안고 런던 시내 일정을 계속 고민했다. 마땅히 가고 싶은 곳이 떠오르지 않아 친구의 추천 코스였던 테이트 모던에 가기로 결정하고, 혼자 다니면 심심하니 점심동행을 구하는 카페 글에 댓글도 남겨놓았다. 혼자서도 꽤 잘 놀 줄 알았는데 매번 동행을 구하다 보니, 혼자는 허전할 것 같았다.
숙소 밖으로 나오니 오늘의 날씨는 흐림이었다. 맑은 날도 벌써 끝이 난 건가, 비도 조금 흩뿌려 기분이 살짝 꿀꿀해졌다. 일단 빨간색 이층 버스 하나를 잡아타고 테이트 모던으로 향했다. 런던 버스비의 하루 상한선인 데일리캡을 알게 되어, 오늘은 하루 종일 버스만 타고 다닐 생각이었다.
방치되어 있던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테이트모던. 생각보다 규모가 매우 컸다. 내부는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러 개의 전시관이 있어 무료와 유료 전시가 뒤섞여 있는 형태였다. 지하의 어두운 공간에서부터 차례로 올라가며 전시장을 돌아다녔다. 기대를 많이 했는데 다른 전시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큰 감흥은 없었다. 오히려 두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나 경호원이 창가에 기대 이야기하는 장면 등 사람들의 모습이 더 예술 같았다.
전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너무 지쳐서 카페를 찾아갔다. 10층에 있는 런던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겸 카페였는데, 아쉽게도 추락 사고가 있던 터라 테라스는 갈 수가 없었다. 하늘도 흐려서 생각보다 풍경이 아쉬웠다. 그래도 창가에 앉아 런던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시니 좀 살 것 같았다.
하루종일 전시장을 헤매니 배가 슬슬 고픈데, 점심 동행을 만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라는 버로우 마켓으로 향했다. 시식코너가 많아서 그거만 돌아도 꽤 배가 부르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걷기에는 꽤 먼 거리라 또 한 번 빨간 버스에 올랐다. 데일리캡 덕분에 버스 타는 게 부담이 없었다.
버로우마켓은 유명한 관광지답게 사람이 정말 많았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서 알아서 흘러갈 정도였다. 특히 빠에야, 초코딸기, 트러플리조또 등 유명한 음식이 있는 쪽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소매치기를 당하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가방끈을 조이고 긴장을 하며 걸어 다녔다.
기찻길 아래에 자리 잡은 시장이라 기차가 몇 번씩이고 지나갔는데, 시끄럽긴 해도 그 활력이 꽤 마음에 들었다. 유럽 스러우면서도 유럽이 아닌 느낌이 들어 묘했다. 하지만 기대에 비해서는 시식이 많지 않았다.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모자라서 노티드 도넛의 원조 집이라는 브레드어헤드에서 크림브륄레 도넛을 하나 사 먹었다.
도넛을 먹으니 커피가 당겨 친구에게 추천받은 카페 몬머스를 찾았다. 하루에 커피만 3잔째, 할당량인 하루 한잔을 이미 넘었지만 뭔가 커피를 안 먹으면 아쉬울 것 같은 집이라 꼭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커피를 직접 로스팅해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는데 분위기도 좋았다. 한국에 이런 곳이 있으면 매일 오겠다 싶을 정도였다. 좋아하는 녹색으로 꾸며져 있어 더욱 좋았다.
공간을 즐기다 보니 약속 시간이 다가와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모르는 동행을 만나러 가는 길. 몇 곳의 리스트를 보내줬는데, 스테이크 집을 가보기로 했다. 동행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는데 다른 동행이 또 온다고 했다. 술도 같이 먹으려 했는데 세 명이 됐으니, 와인이나 한 병 먹자 싶었는데 오는 길의 동행이 뿌이 퓌메라는 와인을 콕 집어 주문했다.
알고 보니 영국 유학을 하며 쉬는 날에는 소믈리에로 일하고 있다는 동행. 한량의 느낌이 물씬 나는 모습이었다. 어제에 이어 또 유학생이라니, 생각보다 유학생활은 심심한가 보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남자 셋이 앉아서 와인 한 병에 스테이크를 먹게 됐다. 대낮에 스테이크에 와인이라, 한국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여유가 너무 행복했다. 어젯밤에 이은 두 번째 야장이었다. 가격은 135파운드. 런던에서 먹은 것 중 가장 큰 지출이었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한 순간.
소믈리에 동행이 일을 하러 가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트레펠가 광장에 걸어갔다. 런던 웸블리에서 다가오는 주말에 펼쳐질 챔스 결승전을 축하하는 행사가 한창이었다. 이렇게 광장을 막고 행사를 하는 건 이례적이라고 하는데, 영국인들의 축구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서울시청 광장이 떠올랐다.
광장을 둘러보고 소믈리에의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유학생답게 갈만한 곳을 잘 꿰고 있었다. 거의 현지인 밖에 없는 바. 가장 좋아하는 로컬 바이브였다. 소믈리에 동행이 좋아하는 걸 추천해 준다며 맥주도 사줬다. 영국인처럼 밖에 서서 런던프라이드를 마시니 나도 뭔가 유학생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하러 가야 하는 소믈리에 유학생은 떠나고 남은 동행과 둘이서 내셔널 갤러리를 둘러봤다. 마감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서둘러 봤는데, 규모가 상당했다. 많은 작품을 지나쳐 걸어왔는데도 한 시간도 넘게 걸렸으니 말이다. 다 돌고 보니 결국 느낀 건 테이트모던도, 내셔널 갤러리도, 박물관과 미술관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시장이나 다니고 새로운 모습의 골목을 유랑하는 게 나에게 훨씬 잘 맞았다. 여행은 스스로를 발견하는 거라고 했던가, 그 말이 딱 맞았다.
곧 뮤지컬 시간이 다되어 동행과도 헤어지고 소호 거리를 돌아다녔다. 오전부터 다니니 배터리가 없어서 코벤트가든 근처의 애플 스토어를 찾아가 도둑 충전을 했다. 구글맵에, 검색에, 이것저것 찍느라 배터리가 남아날 수가 없었다. 주변 눈치를 보는데 의외로 나 같은 여행객들이 꽤 많이 보여 안심이 됐다.
바로 근처에 프로즌이 열리는 공연장 로얄 드루어리 레인이 있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오페라 공연장 느낌의 내부가 너무 예술적이고 웅장해 정말 아름다웠다. 그곳을 꽉 채운 사람들의 모습도 너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듯, 가족들이 다 같이 뮤지컬을 보러 온다고 했다. 엘사드레스를 입은 아이들, 올라프 인형을 들고 코스프레 옷을 입은 사람들까지, 영국에서의 뮤지컬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하나의 여가 문화라는 게 딱 보였다. 그 밝은 에너지가 너무 좋았다.
음식은 물론 술도 팔고 있었는데 뮤지컬을 보며 음식을 먹는 게 매우 자연스럽다고 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오는 길에 사 온 와인을 먹으며 보니, 왠지 현지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영어를 모두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뮤지컬도 정말 재밌었다. 원래 뮤지컬을 보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어서 집중을 잘 못했는데, 무대나 배우의 연기가 좋아서인지, 시각 효과가 좋아서인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이 인상적인 공연이었다. 특히 올라프 역을 맡은 배우가 너무 인상적이었는데, 인형과 하나 되어 표정연기와 춤을 추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생동감이 넘쳤다.
공연을 보고 나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출구에는 프로즌 노래를 틀어놓은 화려한 인력거 여러 대가 기다리고 있어 뮤지컬의 여운을 조금 더 오래 남길 수 있었다. 저녁을 걸러 배가 살짝 고파 점심에 만난 동행에게 연락했으나, 다른 저녁동행을 구한 데다 예약 필수인 식당을 간 터라 함께 할 수가 없었다. 괜히 근처에서 애매하게 기다리다가, 노랫소리에 이끌려 한 바에 들어왔다.
적당히 어두운 바에서 음식을 먹으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과, 라이브 공연을 하는 광경을 뒤에서 바라보니 또 한 번 영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밥 대신 맥주 두 잔에 노래 몇 곡으로 배를 채우고 점심동행과 다시 만나 또 다른 바에 왔다. 함께 온 다른 사람은 하이네켄의 챔스 결승전 초대 이벤트로 공짜 4박 5일 여행의 첫날이라고 했다. 이런 이벤트를 잘 안 믿었다고 하는데, 첫 당첨에 영국 공짜여행이라니, 너무나 부러웠다. 앞에 마신 와인과 맥주에 또다시 맥주가 더해지니 점점 취기가 올라왔다. 밤 길을 비틀비틀 걸어 숙소에 도착하니 11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왜 영국에 오면 뮤지컬을 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던, 숨겨진 취향을 발견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