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1일 런던
그럼 같이 런던에서 여행하면 재밌겠다!
이번 유럽 여행은 대학교 친구 도희를 만나기 위한 여행이다. 영국에서 석사, 핀란드에서 박사를 마친, 가방끈이 가장 긴 이 친구는 핀란드인 남자 친구를 만나 결혼하고 지금은 덴마크 오르후스에 살고 있었다. 오르후스까지 가는 비행기가 싼 곳이 런던, 로마, 프랑크푸르트여서 그중 가장 가고 싶던 런던을 선택한 거였다. 사실 여행을 이야기할 때만 해도 혼자였는데, 그 사이 아이가 생겨 출산 전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이 되어 버렸다.
전날 도착해 친구(라고 하지만 사실 대학 교수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친구는 왜인지 아침부터 연락이 되질 않았다. 친구와 점심을 같이 먹을지 말지 자기 전까지도 내 의사를 물어보던 그녀였다. 카톡도, 문자도 답이 없어 한참을 기다리다가, 일단은 아침을 먹으며 답장을 기다리기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홀몸도 아닌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말이다. 게다가 런던의 날씨는 또 우중충하고 비가 날리고 있었다.
아침을 먹으러 온 곳은 소호거리에 있는 베이글 맛집 B Bagle. 아침 한정으로 베이글을 주문하면 커피를 공짜로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버스를 타고 서둘러 왔다. 하지만 연락을 기다리며 꾸물거린 탓에 9시가 넘어서야 도착했고, 결국 커피를 따로 주문해야 했다. 까짓 거 얼마나 할까 했는데, 아침으로만 만원 넘게 지출을 하게 된 정말 살인적인 런던의 물가였다.
그래도 야외 테이블에 앉아 베이글과 따뜻한 라테를 마시고 있으니, 런더너가 된 듯 기분은 좋았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친구는 아직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어디를 갈까 한참을 찾다가, 걸어서 갈 수 있는 대영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마침 곧 오픈시간이라 딱 오픈런이 가능할 것 같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유명한 관광지인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미리 입장 예약도 하지 않아 후문으로 입장을 해야만 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대한 흥미가 많이 떨어진 터라, 다른 곳을 갈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양의 소장품이 있다고 하니, 런던까지 와서 안 보고 가기에는 아쉬울 것 같아 줄을 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친구 없이 혼자가 될 때를 대비해 앞으로 놀 거리를 고민해 봤다. 어제 재밌게 본 뮤지컬이 떠올라 다른 뮤지컬에도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현지 유학생이 요즘 핫하다고 추천했던 가장 최근 오픈한 백투더퓨처가 생각나 데이시트를 예약하는 어플을 켰다.
다행히 데이시트 표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친구와의 스케줄이 정해지지를 않으니 선뜻 구매하기에는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매 대기시간 5분 간은 좌석을 선점할 수 있었는데, 박물관에 들어온 후 관람을 하면서도 계속 구매 취소와 구매대기를 반복하며 좌석을 선점하고 있었다. 무언가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결정은 잘 못하면서 미련을 가진,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대영박물관은 유물로 미어터진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소수민족관, 일본관, 아프리카관 등 영국이 지배했던 여러 지역의 유물들, 심지어 해당 국가에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수많은 물건들도 볼 수 있었다. 한국관에는 청자와 백자, 불상들이 많았다. 박물관의 규모가 정말 컸는데, 생각보다 관심 가는 유물은 없어 점점 흥미를 잃고 힘이 들었다. 역시나 박물관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문 출구 쪽을 향해 가는데, 정문으로 들어왔다면 이미 경험했을 메인 홀이 눈앞에 웅장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그 양쪽에 있는 잘 꾸며진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전시장 내부의 장식과 건물의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마지막에 보게 된 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만큼 지쳤던 몸과 마음을 리프레시시켜주었다.
박물관을 다 돌아보니 1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거의 2시간을 끌어오던 백투더퓨터 데이시트도 드디어 구매를 했다. 연락이 안 되는 친구가 걱정되긴 했지만, 친구만 기다리며 하루 일정을 날려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박물관을 샅샅이 돌아보고 나니 배도 슬슬 고파와 유학생에게 소개받은 나폴리 피자 맛집으로 향했다.
VASINIKO라는 이름의 가게였는데 나폴리 현지보다 더 맛있는 피자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오픈시간인 12시가 조금 안되어 도착해, 또 의도치 않은 오픈런으로 가장 먼저 입장을 했다. 2인석에 혼자 앉아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드디어 친구에게서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카카오톡을 확인을 안 하고 있었다고, 미안하다는 메시지였다.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있다니 다행인 노릇이었다.
친구와는 저녁쯤 만나 같이 여행을 하기로 하고 시그니처 피자와 맥주 한 잔을 시켰다. 평소 먹던 피자와는 다르게 정말 얇고 쫀득한 도우가 처음 경험하는 맛이었다. 이탈리아 맥주라는 MORETTI도 피자와 정말 잘 어울렸다. 치즈가 많은 피자라 먹다 보니 조금 느끼했던 터라 다음에는 토마토 베이스의 피자를 주문해야겠다 생각하고는 밖으로 나섰다. 내리던 비도 딱 맞춰 그쳐 있었다.
친구를 만나기까지 시간이 꽤 남아 런던에 있는 랜드마크 중에 아직 보지 못한 곳, 타워브리지를 보러 가기로 했다. 데일리캡을 사용하려고 버스를 탔는데, 악명 높은 런던의 교통체증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도로가 2차선이다 보니, 차량이 멈추거나 버스가 멈추면 뒤에 차들이 한참을 멈춰야 했는데 공사하는 곳도 많아 우회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걷는 것보다 더 느릴 정도로 느렸다.
교통체증 때문에 예상보다 한 시간 이상 늦게 타워브리지에 도착했다. 친구도 갑자기 빨리 보자고 재촉을 해 사실상 거의 바로 버스를 타고 돌아가야만 했다. 급하게 사진 한 장을 남기고는 다시 소호거리 쪽으로 향했다. 버스 밖보다 버스 안에서의 시간이 더 긴 하루였는데, 약속 시간에도 살짝 늦게 됐다.
뭐 하러 타워브리지까지 갔다가 왔어?
숙소에서 나온 지 거의 8시간이 지나서야 드디어 유럽에 온 목적,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만나자마자 왜 약속장소와 반대 방향에 갔다 늦었냐고 핀잔을 주는 친구. 그래도 오랜만에, 그것도 타지에서 만나니 반가움이 컸다. 친구도 정말 오랜만에 런던에 왔다고 했다.
그래도 런던에서 꽤 오래 살았던 터라 골목골목 다니며 추억 속 장소들을 소개해주고, 쇼핑을 하기 위해 리버티 백화점을 찾았다. 한국의 백화점과 다르게, 과거의 느낌이 드는, 고풍스러운 건물 나무 실내가 인상적인 그곳에서 시그니처 원단인 리버티프린트의 의미도 알게 되고, 잘 모르던 영국브랜드도 알게 되었다. 백화점을 구경하며 쇼핑을 조금 하니, 홀몸이 아닌 친구가 힘들어하길래 근처 카페를 급히 찾아 쉬는 시간을 가졌다.
내일 진행할 만삭 사진 촬영에 필요한 용 인형을 구매하고 싶다는 친구. 용의 해에 태어날 아기를 위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비싼 인형 가격에,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하고는 결국 저렴한 인형을 골라 들었다. 조카선물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인형을 사줄까 했는데 극구 사양하는 탓에 인형은 결국 사주지 못했다.
곧 뮤지컬 시간이 다가와서 친구가 먹고 싶어 하는 피시앤칩스 식당을 찾았다. 마땅한 곳이 없어 소호거리를 헤매다가 며칠 전 허탕을 쳤던 맥주 바를 찾아왔다. 실내가 너무 시끄러워 걱정했는데, 다행히 2층에 다이닝 공간이 별도로 있었다.
영국식 에일로 요리한 POT PIE와 피시앤칩스, 그리고 에일을 시켰다. 영국의 에일은 한국에서 마시던 에일과 다르게 미지근하고, 탄산도 적고, 시큼한 맛이 강해 시킬 때마다 맛이 없어 놀라지만, 뭔가 영국에서만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계속해서 시키게 됐다. 음식 맛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예상외로 너무 맛있고 특이했고, 런던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친구도 피시앤칩스 먹은 것 중 가장 맛있다는 평이었다. 의외의 맛집 발견!
맛있게 먹다 보니 뮤지컬 시작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친구와 내일보기로 급하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냅다 뛰었다. 생각보다 식당과의 거리가 좀 멀었다. 거의 뮤지컬 시작시간이 다 되어서야 공연장에 입장하게 되어 공연장을 둘러볼 세도 없이 직원의 안내로 2층 사이드에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곧이어 공연이 시작됐다. 사실 뮤지컬을 보기 전에 백투더퓨처 영화를 미리 보고 보려고 했으나, 게으름 때문에 줄거리만 읽고 봤는데, 확실히 전체 줄거리도 잘 알지 못하니 집중이 잘 안 됐다. 프로즌에 비해 대사도 어렵게 느껴졌다. 어제만큼의 재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나 인터미션 시간이 되고 나서 공연장도 둘러볼 수 있었다. 아델피 공연장은 어제보다 규모가 꽤 작은 데다가 시설도 현대식이었다. 사람은 오늘도 바글바글 들어차있었는데 화장실이 몇 개 없어서 줄을 길게 서 있었다. 이미 한 번 뮤지컬 문화도 경험한 터라,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결국 2부는 졸음과 싸우며 보게 됐다. 집중력도 많이 떨어지고, 맥주도 먹었던 탓인 것 같았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특수효과도 최신의 독특한 기술이 많이 사용된 것 같았지만, 확실히 몰입이 안 됐다. 영어 대사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워서 내용을 아는 작품을 보는 게 좋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뮤지컬을 다 보고 나니 10시 반이 넘은 시간이었고, 이대로 들어가기는 너무 아쉬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마침 조금만 걸어가면 런던아이와 빅벤 야경이 있어, 야경을 한참을 구경했다. 친구의 연락만을 기다리며 갔던 오전의 박물관과, 여러모로 아쉬웠던 오후의 뮤지컬까지,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하루였다.
그렇게 런던에서의 아쉬운 하루가,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