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런던
야간버스를 타고 도착한 빅토리아 터미널. 도착하니 배가 고팠는데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곳이 많이 없었다. 다행히 바로 옆에 꽤 큰 빅토리아 역에 일찍 연 카페와 패스트푸드점이 있었다. 와사비와 Pret, KFC 등 몇몇 곳을 기웃거렸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한 끼에 거의 만원이 되는 돈.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돈 주고 간단한 아침으로 먹기에는 부담이 됐다.
무슨 영국까지 와서 맥도날드야?
그러다 한쪽 구석에 있던 맥도날드를 발견. 런던의 맥모닝은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싶어 아침으로 선택했다. 사실 뭔가 영국 스러운 걸 먹고 싶긴 했는데, 애매한 걸 먹느니 차라리 저렴하고 보장된 메뉴를 먹자 싶었다. 곧 만날 대학교 친구에게 얘기하니 차라리 와사비를 먹으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런던에 오긴 했지만, 계획은 딱히 없었다. 야간버스를 타고 온 터라 피곤하기도 하고, 씻고 싶어서 숙소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하지만 체크인까지는 아직 여섯 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다. 일정을 고민하며 점심 동행 구하는 글을 올렸다. 한국에서 여행준비를 하며 봤던 영상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꼭 보라고 한 게 떠올랐는데 마침 오늘이 그날이었다.
근위병 교대식이 시작하는 11시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남아, 런던의 명물인 빅벤, 런던아이, 웨스터 민스터 등을 보고 교대식 장소로 가기로 정했다. 그러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았다.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기차를 타기 위해 잠깐 땅을 밟은 걸 빼면 런던을 경험하는 첫 순간이었다.
런던의 풍경은 새로웠다. 에든버러가 중세 느낌이라면, 근현대 느낌에 정제된 현대 느낌을 한 방울 떨어뜨린 모습이었다. 건물 풍경만 봐도 새롭고 재밌어서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잠시 멈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또 얼마 못 가 멈춰 서고, 또 멈춰 섰다. 상상 속 유럽의 모습 그 자체였다. 15분 거리를 30분도 넘게 걸어온 것 같았다. 오히려 빅벤과 런던아이는 사진 속 모습 그대로여서 큰 감흥이 없었다.
한참을 걸려 기마근위병 교대식이 이뤄지는 곳으로 왔다. 보통은 버킹엄 궁전에서 보지만, 유튜브에 의하면 기마근위병 교대식을 보고 버킹엄 궁전으로 가면 훨씬 다채로운 관람이 가능하 댔다. 아직도 시간이 꽤 남아, 주변을 걸어 다니며 마저 거리를 구경을 했다. 유명한 트리펠가 광장에는 챔스 결승전 행사 때문에 펜스가 쳐져 있어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 차라리 조금 기다릴걸.
10시 50분쯤이 되어 교대식 장소에 도착하니, 좀 전에 비해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인간펜스를 치고 기다리고 서있었다. 유럽인들에 비해 키도 작아서 까치발을 들어도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주변을 돌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릴 걸 후회가 됐다. 아까는 정말 한 명도 없었는데 말이지.
시간이 좀 지나자 백마를 탄 근위병과 흑마를 탄 근위병이 줄지어 나왔다. 한참을 빙빙 둘러 의식 같은 걸 하더니 원형 경기장 쪽에서 대형을 갖춰서는 한참을 가만히 서있었다. 관람객들도 하나 둘 떠났지만 근위병들은 움직일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앞에 있던 경찰에게 물으니, 몇 분간은 이대로 있는다고 했다. 더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메인 근위병 행진이 이뤄지는 버킹엄궁전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궁전으로 가는 길에 세인트 제임스 공원을 지났는데 규모가 정말 크고 조경도 잘 되어 있어 걸어갈 맛이 났다. 잔디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거나, 소프트볼 게임을 하거나, 아이와 뛰어놀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도심 한복판의 잘 만들어진 공원에서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가장 유럽 스러운 풍경이라고 느껴졌다.
행진은 공원 옆 더 몰 거리에서 15분 정도 후에 열렸다. 다들 버킹엄궁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쭈뼛쭈뼛 눈치를 한참 보다가 사진을 부탁했는데 역시나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래도 혼자 여행에서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게 어딘지. 곧 시작한 근위병 행진. 거리에 걸린 수많은 영국국기 아래로 군악대와 말을 탄 근위병, 행진하는 근위병의 모습이 웅장하고 멋있었다. 확실히 이국적인 광경이었다.
혹시 동행 구하셨나요?
아침을 먹으며 남긴 점심 동행을 구하는 글에 댓글이 달렸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유명한 스테이크 맛집인 플랫아이언. 성별도, 나이도 모르는 사이, 약간의 설렘과 두려움으로 만난 동행은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랬다. 바스라는 지역에서 유학을 했는데, 떠나는 비행기가 저녁이라 낮에 할 것을 찾다가 동행을 구한 거랬다.
유학생이 왜 여행 동행을 만날까, 조금 의아했지만 이야기를 해보니 꽤 성향이 비슷했다. 즉흥적인 여행 스타일과 주변에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 모습, 정처 없이 걷는 걸 좋아하는 것까지. 점심만 먹고 여행을 할 생각이었지만, 같이 다녀도 좋겠다 싶어 동행을 제안했고, 그렇게 그녀의 비행시간 전까지, 내 체크인 시간까지 함께 여행을 다니게 됐다.
다른 지역에 살았지만 그래도 나름 런던 선배인지라 차이나타운과 소호거리, 코벤트 가든을 함께 걸으며 맛집 정보와 재밌는 얘기를 많이 들려줬다. 30분 가까이를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배터리가 다 되어 갔고, 근처 갈 곳을 찾다가 마침 근처에 미리 구글맵에 찍어둔 펍을 발견해 맥주를 마시며 충전을 하기로 했다.
올드 뱅크 오브 잉글랜드라는 이 펍은 과거 영국은행으로 쓰이던 꽤 재밌는 히스토리를 가진 펍이었다. 독특한 외관과 고급스러운 내부, 그 사이 자리 잡은 힙한 느낌의 펍까지, 생각보다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더 많은 맥주를 먹으려 Pint 대신 양이 적은 Half를 시켰는데 그 모습에서 벌써 영국 현지인이 된 듯한 착각과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영국 유학 이야기, 코로나 때를 버틴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의 말미에는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곳을 알게 되었고 비행기 타기 전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며, 악수를 건네던 그녀. 평소에도 많이 못 보던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낯선 여행지에서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소름도 돋았지만, 덕분에 나 자신을 조금 더 객관화할 수 있었고,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런 동행 만나기도 쉽지 않아서, 헤어지고 나니 살짝 여운이 남았다.
헤어진 후 지하철을 타고 킹스 크로스 역에 돌아와 이틀간 맡겨둔 골칫덩어리 29인치 캐리어를 찾고,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배정받은 자리는 아쉽게도 2층 자리. 3박을 해야 하는데 매번 2층을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옛날에는 왜 그렇게 2층을 좋아했는지.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동행 만날 시간이 가까워 서둘러서 샤워만 하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왔다.
점심 동행이 추천해 준 Waxy라는 아이리시 펍에 도착하니 다른 두 명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지하에 있는 미로 같은 느낌의 어둑어둑한 펍은 뭔가 무섭기도 하면서 신기한 느낌. 치과의사인 형님과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는 20대가 있었는데, 모두가 I라 계속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게다가 아직 결혼도 안 했지만, 언젠가 태어날 아이에게 보여줄 비디오를 찍는다는 형님은 뭔가 독특하면서도 멋있는 사람 같았다.
피시앤칩스와 맥주를 먹으며 서로의 일 얘기와 여행의 이유, 여행 계획을 물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다른 동행 한 명이 합류해 총 4명이 됐다. 조그마한 샤넬백을 들고 온 그녀는 2주간 외국에서 지내며 웹소설을 쓰는 노마드 생활을 한다고 했다. 작가명과 소설제목은 비밀이지만 2주간 거의 천만 원에 가까운 숙소에 머물고 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잘 나가는 웹소설 작가 같았다.
저녁을 먹은 후 커다란 광고판으로 유명한 피키딜리 광장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뭔가 애매한 텐션에 금방 헤어지겠거니 싶었지만, 웹소설 누나의 리드로 자연스레 2차 자리를 찾아갔다. 원래 가려던 펍은 자리가 없어 그 맞은편 가게로 자리를 잡았는데, 마침 야외 테이블 1개 자리가 나와 있었다.
런던에서의 야장이라...
꿈꿔본 적도 없는 일이었지만, 다양한 사람을 구경하고, 화려한 인력거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영국사람은 서서 맥주를 마신다던데, 정말로 건너편 펍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맥주 500ml를 하나씩 들고는 서서 신나게 떠들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와인 한 병에 파스타로 시작한 식사는, 피자 한 판과 와인 한 병을 추가해 끝이 났다. 시간도 12시 가까이 된 시간이었는데, 해가 길어서 9시가 넘어서야 어둑어둑해져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헤어질 즈음에는 이미 조금 취한 터인지 텐션이 많이 올라가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어느새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까지 했다.
숙소까지 30분 거리를 걸어오니 거의 새벽 1시. 같은 도미토리 친구들은 다들 잠에 들어 있어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를 죽여가며 세면도구를 꺼냈다. 급하게 나오느라 짐 정리도 못했는데, 더는 부산을 떨 수 없어 일단 누워 자기로 한다. 군대 이후로 이 얼마만의 도둑고양이 취침 준비인지.
근위병 교대식에 맛집 탐방, 기념사진에 야장을 하다니, 런던의 첫날 일정 생각보다 바쁘고 알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