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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Jul 13. 2024

이 나이에 야간 버스라니

5월 28일 에든버러

캡슐형 침대라 그런지, 이동을 많이 해서 지쳤는지 말 그대로 꿀잠을 잤다. 7시쯤 일어나 대충 단장을 하고는 어제 미리 지도에 표시해 둔 숙소 근처 커피 맛집을 찾았다. The Milkman이라는 작은 카페인데, 한 블로거에 따르면 오트밀로 변경한 라떼가 맛있다고 했다.


에든버러 The Milkman


말 그대로 오픈런. 8시 오픈시간에 맞춰 갔는데도 가게 안팎으로 손님이 꽉 차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혼자라서 안쪽 구석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블로그 추천메뉴와 직원 추천 빵을 시켜 아침으로 먹었다. 창가에 앉으니 에든버러의 작은 골목이 보였는데, 외국인들 특유의 밝은 에너지와 새파란 하늘에 여행의 설렘이 확 몰려왔다.



그래, 나 유럽에 와 있었지.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또 다른 카페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에든버러의 대표 유적지, 에든버러 성이 한눈에 보인다는 숨은 핫플이었다. 가는 길에 올드타운과 뉴타운 사이에 있는 커다란 공원을 천천히 산책하며 지났는데 한가로운 사람들의 모습과 스코틀랜드 전통음악 버스킹에서 유럽의 여유로움을 또 한 번 느꼈다.


]


Waterstones라는 영국 프랜차이즈 서점의 3층에 있는 카페에 왔다. 아침의 따뜻한 라떼로는 조금 아쉬워 아아 한잔을 주문하고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기대를 많이 했는데 파랗던 하늘은 곧 비가 올는지 잿빛이고, 창문도 더러워서 생각보다 뷰가 아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쁘게 사진을 찍어줄 사람도 없었다. 창가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봐 금방 자리를 비켜줬다.



오전 커피 투어를 마치고는 숙소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했다. 야간버스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짐을 숙소에 맡기고 에든버러를 돌아다닐 참이었다. 이 나이에 야간버스라니. 소중한 유럽에서의 낮 시간을 이동시간에 다시 허비하기는 아깝고, 숙박비도 아낄 겸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자정 출발 버스를 타서 에든버러를 더 여유롭게 볼지, 조금 이른 버스를 타서 런던에 일찍 도착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에든버러에 더 볼 게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버스 예매도 해야 하고 갈 곳도 찾아봐야 해서 라운지에 충전을 하고 간식을 먹으며 앉아 있었다. 배터리는 왜 이렇게 빨리 다는지. 여행 때문에 새 폰도 사서 왔는데 말이지.



30분의 고민 끝에 런던에 빨리 가기로 결정하고 10시 버스를 예매하고 숙소를 나섰다. 정말 날씨요괴가 맞는지 바깥은 날씨가 더 흐려지고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행선지 없이 뉴타운을 향해 무작정 걷고 있는데, 조금씩 내리던 비가 점점 굵어지고 날도 추워지고 있었다. 예감이 안 좋았다.


설상가상 12시를 막 넘겨 슬슬 배도 고파왔다. 한 손에는 우산,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점심 먹을 곳을 찾았다. 구글 평점이 좋은 오래된 바 하나를 찾았는데, 점심 먹을 만한 메뉴가 있는지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비가 점점 거세져서 맥주라도 배불리 먹어야지 생각하고는 서둘러 바를 향해 갔다.


에든버러 Kay's Bar


Kay's Bar라는 이름의 오래된 바는 동화에 나올 법한 귀엽고 작은 집모양에 흰색 문과 붉은색의 조화가 귀여운 곳이었다. 딸랑! 현관에 달린 종이 울리며 문을 여니, 마치 오래된 외국 영화 속 바에 들어온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정통 스코틀랜드 바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라는 구글 리뷰가 딱 들어맞는 공간이었다.



입구 왼쪽에는 오크통이 있고, 그 앞에 신문을 보는 배불뚝이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바에는 다양한 생맥주 Tab이, 캠버비치를 닮은 바텐더의 뒤에는 수많은 스코티쉬 위스키가 진열되어 있었다. 메뉴를 물으니, 따로 음식은 없다며 랩으로 싸놓은 미니 햄버거 같은 음식을 내민다.



오늘의 요일 스티커가 붙어있는 샌드위치. 어릴 때 엄마가 집에서 만든 햄버거가 떠오르는 비주얼이다. 썩 맛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점심은 먹어야 했기에 무난한 베이컨햄 샌드위치와 맥주를 주문했다. 맥주를 고민하니 친절하게 시음까지 도와주는 츤데레 캠버비치. 가까운 맥주 양조장에서 만들었다는 로컬 생맥주를 주문했다.



구석에 앉아 샌드위치와 맥주를 먹으며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음악 하나 없는 조용한 공간. 신문 넘기는 소리와 바텐더와 손님의 대화소리, 다른 손님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채워져, 마치 영어 듣기 평가 영국버전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들어오는 손님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서로 아는 듯 자연스레 모여 앉아 떠드는 게 동네 사랑방 같은 느낌이다. 제일 좋아하는 찐 로컬의 삶에 들어온 느낌, 맥주까지 더해져 기분이 좋아졌다.



웨어 아유 프럼?


용기를 내 바 자리로 옮겼는데, 캠버비치가 어디에서 왔는지, 맥주는 맛있는지 말을 걸어온다. 때맞춰 옆에 앉아있던 배불뚝이 아저씨까지. 영어를 잘 못하기도 하지만, 영국식 발음이 어려워서 대화라기보다는 말 뜻 알아맞히기 게임 같다. 언젠가 영어를 좀 더 공부해서 다시 찾아야지. 그때는 한층 더 깊이 기억할 수 있겠지.

  

비가 좀 잦아들어, 밖으로 나왔다. 에든버러까지 와서 실내에만 있기는 싫어 갈 곳을 찾다 보타닉 가든이라는 곳을 찾았다. 30분 정도를 걸어야 하는 거리, 가는 길에 젤라또 맛집에 들러 당 충전을 하며 되겠지 싶었는데 하필이면 쉬는 날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구글은 영업 중이라고 했는데. 좋았던 기분이 금방 다운됐다.



보타닉 가든은 규모가 정말 컸다. 여의도 공원보다도 더 큰 느낌의 공원, 서문으로 들어가 동문으로 나오는 코스로 걷기로 했다. 정원자체를 걷는 시간만도 거의 한 시간이 걸릴 정도. 비 올 때 나는 나무와 풀 냄새를 좋아하는데, 거기에 귀여운 다람쥐까지 원 없이 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사실 잘 꾸며져 있지만 관광객이 오기에는 조금 아쉬운 동네 큰 서울대공원정도.



다시 올드타운을 향해 가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10시 버스를 타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숙소는 이미 체크아웃을 해서 갈 곳이 없었다. 어딘가 실내를 찾아 발 빠르게 걷고 있는데 박물관처럼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그렇게 우연히 Scottish National Portrait Gallery를 구경했다.



과거의 초상화부터 최근에 프로필사진까지,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와 모델 등 다양한 유형의 얼굴이 담긴 공간이었다. 작품보다는 공간이 인상적이었는데, 영국의 많은 건물이 그렇듯 꽤 오래된 건물을 갤러리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나라의 서울역사박물관이 떠올랐다.


꽤 오랜 시간을 여유롭게 둘러보았는데, 아직 저녁시간도 되지 않았다. 갈 곳도, 할 것도 딱히 없어서 박물관 벤치에 앉아 에든버러 동행 글을 검색했다. 다행히 오늘 오후에 에든버러에 온다는 분이 있어, 같이 저녁을 먹자고 연락을 하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다행히 비는 조금 잦아든 상태였다.


오전에 멀리서 본 에든버러 성 내부를 한 번 보고 싶어, 에든버러 성을 향해 갔다. 에든버러 성 입구가 가까워오니, 가드가 길을 막아섰다. 미리 예약을 해야 하는데 오늘은 입장 티켓이 모두 판매되어 입장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즉흥 여행파, P의 최후였다. 하는 수 없이 숙소 근처에 있던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을 보러 갔다.



성당을 한참 둘러보고 있는데 저녁 동행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마침 지금 대성당 앞을 지나고 있다고. 그리고 때마침 어제 만난 동행도 저녁을 같이 먹자며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갓 전역한 의진님과 어제의 동행 예진님과 현지인에게 추천받은 오래된 펍 근처 식당으로 갔다.



스테이크 하나와 간단한 사이드 두 개만 시켜 나눠먹기로 했다. 영국의 외식비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식사 후 야외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다시 또 비가 내렸다. 마지막까지도 에든버러의 날씨는 날 도와주지 않았다. 식당 안에는 자리가 없어 편의점에서 간단한 마실걸 사들고는 의진님의 숙소 라운지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한 30분 정도가 지나고, 곧 버스를 타러 가야 할 시간이 됐다. 하루종일 혼자 비도 맞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다 이제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서로가 좀 편해졌는데 야속하게도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자정 버스로 예약할걸. 아쉬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취소는 할 수가 없어 짐을 찾으러 가야만 했다. 서둘러 숙소로 가는 길. 에든버러에서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애증의 도시지만, 아쉬움이 마구 몰려왔다. 노을은 또 왜 이렇게 예쁜지.



오전에 맡겨둔 짐은 다행히 무사했다. 하지만 비를 맞아 젖었다 마른 옷과 신발이 너무 찝찝했다. 숙소 짐 보관소 앞 화장실 있는 공용 샤워실이 열려있었다. 주변을 기웃 거리며 몰래 도둑 샤워를 했다. 고객에게 무관심한 호스텔의 장점이었다. 개운하게 준비를 마치니 생각보다 살짝 늦어 서둘러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향했다.



야간버스는 여느 유럽의 버스처럼 2층이었다. 현지인들에게는 꽤 익숙한 교통수단인지, 거의 좌석을 꽉 채운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 안에는 중간중간 큰 소리로 통화를 하거나, 주정을 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귀중품을 따로 빼긴 했지만, 혹시나 가방을 훔쳐가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며 쪽잠을 잤다. 불과 며칠 전까지 퍼스트클래스에 앉아 있었는데. 영화 기생충도 아니고, 모습이 웃기기만 했다.



버스는 밤길을 쉼 없이 달려 뉴캐슬, 리즈 등을 들러 런던에 도착했다. 휴게소는 서지 않았고 각 터미널에서 꽤 오래 정차했다. 그래도 버스 내부에 화장실이 있어 다행이었다. 9시간이 조금 더 지나 런던 빅토리아 터미널에 도착했다. 예정시간보다 30분이나 늦은 시간이었다.


서른셋의 야간 버스, 아마 내 생에 마지막 야간 버스겠지?

이제 다시 영국 런던 여행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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