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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Jul 05. 2024

유럽에서의 첫날 밤

5월 27일 런던 - 에든버러


돈의 맛을 제대로 맛보고는 킹스크로스 역으로 향했다. 피카딜리라는 지하철을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는 역. 하지만 하필이면 오늘 운행을 안 한다고 했다. 영국은 지하철 파업도 잦고, 운행을 안 할 때도 종종 있다던데, 소문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패딩턴 역에서 아무거나 갈아타면 킹스크로스역에 간다고 했다. 



패딩턴역에 거의 다 왔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구글 지도를 켜고 킹스크로스역을 검색하니 패딩턴이 아니고 패링던 역. 두 번이나 확인을 받았는데, 영국 발음은 역시나 어려웠다. 하마터면 생전 처음 오는 나라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킹스크로스역에 도착했다. 런던은 날씨가 매일 흐리다던데 오늘은 다행히도 하늘이 새파랬다. 오랜만에 밟은 땅과, 맑은 날씨, 낯선 영국의 풍경을 즐기는 기분이 너무 좋았지만 곧 에든버러로 떠나야 했다. 이틀 전, 회사 동료들의 추천으로 갑자기 에든버러행 기차를 끊어둔 상태였다. 


한 시간 정도 짧은 여유가 있었는데, 일단 무거운 29인치 캐리어를 어딘가에 맡겨야 했다. 킹스크로스 역의 짐보관소는 하루에 12달러. 이틀을 맡기면 3만 원이 넘는 돈을 짐을 맡기는 데 써야만 했다. 인터넷의 힘을 빌려 Bouce라는 어플을 통해 근처의 작은 짐 보관소를 찾았다. 하루에 4.3달러. 역 내부에 비해 1/3 가격으로 무거운 짐을 덜어낼 수 있었다.



백팩 하나로 조금은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킹스크로스 역 뒤쪽에 있는 작은 하천으로 향했다. 뛰노는 아이들과 낮잠 자는 사람, 산책하는 강아지까지. 초록색 잔디 위로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영국과 호주가 원조를 두고 싸운다는 플랫화이트를 한잔 사가지고는 잔디에 앉았다. 물 위에 떠 있는 보트에는 사람들이 산다는데, 너무 신기한 광경이라 주변의 모든 상황이 신선하기만 했다. 유럽에 온 게 실감이 났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아쉽게도 곧 기차시간이 다가와서 다시 역으로 가야만 했다. 좀 더 늦은 기차를 끊을 걸. 과거의 내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도 에든버러에서의 시간도 궁금하니 서둘러 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국음식은 아무리 맛없다지만 그래도 기차에서 먹을 영국 스러운 음식을 사고 싶었다. 하지만 역에는 마땅한 음식이 없어서 Leon이라는 곳에서 컵에 담긴 소시지 같은 걸 하나 사들고는 기차에 올랐다.


Limo라는 이름의 기차였는데, 다른 기차에 비해 저렴하기도 하고 최신 기차라고 해서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끊을 때부터 좌석이 따로 배정되지 않아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시간에 맞춰 기차에 올랐는데, 사람들이 통로를 막고 서서는 좌석을 찾고 있었다. 한참을 찾아 지정이 안된 자석을 찾아 겨우 앉을 수 있었다. 



겨우 산 컵 소시지에는 포크가 안 들어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컵 채로 들고 마시듯이 먹을 수밖에 없었다. 맞춤형 뷔페에서 돈의 맛을 느낀 게 바로 얼마 전인데, 갑자기 처량한 신세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창 밖에는 비가 꽤 거칠게 내리고 있었다. 그래 이게 영국의 날씨지.



기차로 4시간 반이나 걸리는 에든버러 여정. 12시간 비행을 마치고 또다시 긴 시간 기차 이동을 선택한 게 후회가 됐다. 게다가 계속 비가 오락가락 하니, 기분도 날씨처럼 오락가락 요동을 쳤다. 괜히 에든버러행을 선택했나 후회를 하며 그래도 재밌게 지내야지 싶어 네이버 카페에 동행을 구하는 글을 올렸다. 근 6년 만에 찾는 여행 동행에 긴장 반, 걱정 반이었다.



4시간 여를 달려 도착한 에든버러의 하늘은 다행히도 파란, 맑은 하늘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영화 속 세트장에 온 듯한 회색의 중세시대 마을 모습에 지친 몸에도 다시 에너지가 돌았다. 숙소가 있다는 올드타운 쪽으로 이동을 하며 신기한 도시의 모습을 눈에 계속 담고 있었다.



한참을 찾아 도착한 숙소는 Code pot이라는 곳으로, 캡슐 호텔 같은 형태의 도미토리를 갖춘 곳이었다. 이 역시도 6년 만에 다시 경험하는 건데, 이 나이에 무슨 도미토리를 가나 싶었지만 비싼 유럽 물가에 굴복하고야 말았다. 도미토리라고는 하지만 1박에 10만 원에 육박, 한국의 어지간한 1인실에 맞먹는 가격이었다.



동행과 7시쯤 만나 저녁을 먹기로 한 터라, 급하게 샤워만 하고 나와 혼자 하는 에든버러 여행을 시작했다. 아까의 맑았던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 빛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 느낌의 중세시대 느낌인 에든버러 풍경과 만나 그 독특한 풍경을 완성해 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맑았어도 너무 좋았겠지.


따로 에든버러에 갈만한 곳을 찾아보고 온 건 아니라 그냥 발길이 가는 대로 이곳저곳을 걸었다. 숙소가 있는 올드타운을 한 바퀴 돌고, 역을 기준으로 반대편에 있는 뉴타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뉴타운은 올드타운에 비해서는 조금 신식이었는데, 올드타운을 조망할 수 있기도 했다. 



올드타운이 한눈에 보이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또 플랫화이트를 한잔 사서 마셨다. 조금의 여유를 즐기긴 했지만 에든버러를 볼 시간이 많지 않아서 서둘러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이번에는 뉴타운을 또 정처 없이 걸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여 계속 걸어갔는데, 생각보다 너무 멀어 다시 올드타운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벌써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저녁 메뉴는 영국의 대표 음식인 피시앤칩스. 약속장소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한국인 한 명이 수줍게 다가왔다. 예진이라는 이름의 그녀. 브이로그를 찍어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고 했다. 피시앤칩스와 소시지, 맥주 두 잔을 시키고는 통성명을 하고 한국에서의 생활, 여행 오게 된 이야기, 여행 일정 이야기를 하며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첫 피시앤칩스는 간도 잘 맞고 바삭바삭해 아주 대 성공!



식사를 마치고 나니 9시쯤. 하지만 밖은 아직도 밝기만 했다. 10시가 좀 안되어 일몰이 시작된다고 해 서둘러 에든버러의 일몰명소, 칼튼힐을 향해 갔다. 생각보다 오르기 쉬운 뒷동산 정도의 코스. 그래서인지 돗자리를 깔고 앉은 청춘들과 유적지에 올라서 경치를 바라보는 사람까지 꽤 많은 인원이 있었다. 



여유로운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지만, 내려다 보이는 에든버러의 전경이 장관이었다. 에든버러의 올드타운과 뉴타운,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는 파노라마 뷰에 마음이 뻥 뚫렸다. 동행과 함께 서로의 사진을 찍으며 일몰을 찍고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칼튼힐을 내려오자 날은 어둑어둑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같은 숙소에 묵고 있다는 동행. 숙소 가는 길에 바에 들러 위스키 한잔을 마셨다. 한국에서는 위스키 종류가 몇 개 없었는데, 글렌키치에 글렌스택, 글렌피딕 등 글렌친구들이 어찌나 많은지 하나를 고르는데 몇십 분이 걸렸다. 



스코틀랜드라 맛도 특별하고 가격도 저렴할 줄 알았는데, 코딱지만큼 따라준 술이 또 왜 그렇게 비싼지. 내 싸구려 입에 위스키는 그저 쓰기만 한 눈살 찌푸려지는 알코올에 불과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12시가 다 된 시간. 이제 야경은 다신 없어, 다짐하며 캡슐 속에서 유럽 첫날 밤 잠에 들었다.



에든버러는 아름다웠지만, 12시간 비행에 4시간 기차는 무리야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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