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인천 - 방콕
4시 40분, 공항버스 첫차에 올랐다. 퇴사 이틀 만에 떠나는 여행이라 단체 회식에, 팀 회식에,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다니느라 짐도 제대로 싸지 않은 채였다. 그래도 비즈니스 라운지에서는 샤워도 가능하다기에 예정시간보다 30분 정도는 더 자고 일어나 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섰다.
태어나 처음으로 타는 비즈니스클래스였다. 코로나 이전에는 매년 한 번 이상 여행을 다녀서 카드도 마일리지가 모이는 카드를 썼던 덕분이었다. 인천에서 방콕을 경유해 런던에 들어가는 일정, 게다가 방콕에서 런던을 가는 비행기는 몇 석 안나오는 퍼스트클래스를 어렵게 끊었다. 나에게 주는 퇴사 선물이었다.
공항버스에서 무심코 메일함을 열어 보았는데, 퇴사한 회사 대표의 메일이 와 있었다. 예전에 직접 만든 책에 응원과 감사의 메시지를 적어 선물했는데, 그에 대한 답장이었다. 책에 적힌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보고 그동안 이해가 부족했다며, 직원을 알 수 있는 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진심 어린 이야기였다. 앞으로에 대한 응원도 함께 적혀있었다. 쿨한 이별을 겪고 회사에 느낀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른 새벽 일어났지만 잠은 오지 않고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살짝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 같기도.
공항에는 예정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서둘러 체크인을 마치고 수화물을 부쳤다. 오래된 29인치 캐리어에는 주황색의 Priority가 붙었고, Royal Silk와 Royal First라고 적힌 두장의 티켓이 손에 쥐어졌다. 씻지 않아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편한 비행을 위해 츄리닝에 슬리퍼를 신었지만 왠지 모르게 어깨는 자꾸 올라갔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즈니스 라운지에 도착했다. 뭔가 행색이 부끄러워 쭈뼛거리며 티켓을 내밀었다. 비즈니스 라운지는 생각보다 컸다. 위스키와 맥주 등 각종 술이 가득한 알코올 바와 무한정 먹을 수 있는 뷔페식 식사 코너, 안마의자에 샤워실까지 갖춘 꽤 럭셔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전면 통창에는 비행기 활주로가 광할하게 펼쳐져 있었다. 나 어쩌면 성공한 삶인가? 왠지 모르게 신이 났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 라운지가 아닐까 싶어 아침 비행기지만 온더락으로 위스키 두 잔을 들이켰다. 맥주도 조금, 아이스크림도 한 입, 다 찔끔찔끔 맛을 봤다.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실에서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2시간이 조금 넘는 대기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면세점을 몇 바퀴 돌고 밥을 먹어도 시간이 남아 게이트 앞에서 한 없이 기다릴 노릇이었다.
이대로 떠나기 너무 아쉬워 탑승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라운지를 나섰고, 게이트에 도착하니 Final call이 반짝이고 있었다. 일찍 탑승해야 좌석이나 전경 등 사진을 찍을 텐데, 늦장을 부린 대가였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라운지에서의 풍요로움과 느긋함이 낯설지만 행복했다. 누군가 재력의 증명은 비행기를 탈 때 드러난다고 하던데, 그 말이 딱 맞다 싶었다.
표를 끊을 때만 해도 1-2-1 배치라 창가에 혼자 앉는 좌석이었는데, 기종이 바뀌었는지 2-2-2 배치라 옆자리에 짝꿍이 있었다. 3시간 이상의 비행은 화장실 가기 부담스러워 보통 복도 좌석을 선호하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블로그 콘텐츠를 위해 좌석 곳곳을 사진 찍으려던 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자리에 앉으니 승무원이 오늘 담당하게 된 엘리스라며 소개를 하고는 웰컴 드링크를 물었다. 샴페인을 골랐더니 직접 자리에서 샴페인을 따라주고는 이륙 후 간식과 아뮤즈부쉬를 가져다주었다. 생전 처음 먹는 아뮤즈 부쉬에 신나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이 내 사진을 찍어준다며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승무원에게 애피타이저도, 빵도, 식사도 먹지 않는다고 말하곤 바로 잠들어버린 그. 언젠가 저렇게 비즈니스석에 무딘 사람이 되겠다 다짐했다.
웰컴드링크에 이어 나온 빵과 샐러드, 그리고 메인 스테이크, 디저트까지. 일반 기내식과 달리 접시에 담겨 나오는 게 고급 레스토랑 코스요리가 부럽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나니 기내를 어둡게 하고 휴식을 준비해 줬다. 하지만 이 짧은 순간도 아쉬워 와인에 칵테일에 타이티맛 아이스크림까지 주문해 먹었다. 5시간의 비행에 샴페인도 몇 잔을 마셨는지 모른다.
5시간의 비행이 끝나자 엘리스와 사무장이 다가와 비행은 편했는지, 앞으로의 여정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온다. 제 인생 최고의 비행이었죠.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먼저 하차하는 달콤함을 느끼며 비행기 연결통로를 나오자, 다른 승무원이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뭐가 잘못됐나 싶다가, 생각해 보니 다음 여정이 퍼스트 클래스. 퍼스트 클래스 승객을 위한 에스코트 서비스였다.
공항 라운지에 머무를 건지, 방콕 시내에 다녀올 건지 확인하고는 출국심사 FAST TRACK으로 안내까지 해주고, 입국심사를 무사히 통과하는지 뒤에서 지켜봐 주는 친절함. 아이고, 내가 도대체 뭐라고.
그렇게 몇 번의 돈 맛을 체감하고,
드디어 런던으로 가는 경유지인 태국 방콕에 입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