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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제 Oct 11. 2024

오르후스와 사랑에 빠지다

6월 2일 - 런던 - 오르후스


맥주까지 마시느라 늦게 자는 바람에 3시간 밖에 못 잤고, 친구는 미안하게도 내 코골이 때문에 제대로 잠을 못 잤다고 했다. 게다가 이래저래 생각보다 시간이 약간 늦어져서 서둘러 짐을 싸서 스탠스테드공항으로 향했다. 다행히 걸어서 5분 정도 되는 가까운 곳이었다. 



유럽 저가 항공의 대명사인 라이언에어를 탈 예정이라 수화물 무게를 줄여야 했다. 옷을 여러 벌 껴입고 배낭에 무거운 물건을 욱여넣었다. 안 그래도 잠을 못 자 피곤한데 껴입은 옷과 돌덩이 같은 배낭 때문에 몸이 더 무거웠다. 게다가 공항에 와서야 호텔 옷장에 아끼는 옷을 걸어둔 채 그냥 온 게 떠올라 슬펐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때였다. 



스탠스테드 공항에는 새벽부터 사람이 많았다. 특히 맨바닥에 그냥 누워있는 사람들이 많아 너무 의아했다. 체크인 카운터가 매우 붐볐는데 직원들은 여유롭게 손님들의 안부를 묻고, 손도 정말 느려 답답했다. 패스트트랙이 가능하냐는 임산부 친구의 말에는 돈을 내면 해준다는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의 공항과 너무 대조되는 풍경이었다.


여유롭고 느린 직원들 덕에 탑승수속도 예상보다 훨씬 늦었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내 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엑스레이에서 무언가 발견돼 다시 한번 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짐을 먼저 받은 친구는 벌써 지쳐서 짐에 도대체 뭘 넣었냐며 핀잔을 줬다. 결국 짐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괜히 30분 넘게 짐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서비스 강국인 한국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낀 순간이었다.


 

탑승수속을 마치니 우리 게이트에는 벌써 파이널 콜이 떠있었다. 항상 30분은 일찍 가는 성격이라, 파이널 콜을 보자 마음이 너무 급했다. 하지만 보딩시간이 다 지나고도 비행기로 가는 버스를 타지 못했다. 파이널 콜이 떠 있는 채로도 30분은 족히 지나서야 모든 탑승이 마무리 됐다. 덴마크에 가기도 전에 이미 몸과 마음이 지쳤고, 친구는 거의 녹초가 됐다.



노란색과 파란색의 조화가 강렬한 플라스틱 같은 얇디얇은 좌석 덕에 자리도 매우 불편했다. 웨이트로즈라는 영국의 편의점에서 산 치즈케이크를 꺼내 먹고는 이륙도 보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옆자리 아이와 엄마가 매우 시끄럽게 떠들어 댔지만, 부족한 잠과 공항에서의 스트레스 덕분에 비행 내내 기절한 듯 잘 수 있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려서 덴마크 오르후스에 도착했다. 이름은 매우 낯설었지만, 덴마크 내에서는 수도 다음으로 큰, 꽤 발달된 도시였다. 친구가 난민수용소 같지 않냐고 한 오르후스 공항은 증축 공사 때문에 필수 시설만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북유럽 특유의 정제된, 깔끔한 인상은 꽤 인상적이었다. 영국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흰머리의 젠틀한 기사님이 친절하게 맞아주는 공항버스를 타고, 오르후스 시내로 향했다. 기사님은 운전하면서도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밝음을 잃지 않았다. 북유럽스러운 여유로움이 한껏 느껴졌다. 창밖은 윈도우 배경화면 같은 모습이었다. 40분 정도 달려 종점인 시내버스정거장에 도착하니 한가롭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반겨주었다.



시내 구경도 잠시, 친구의 집에 가기 위해 다시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더 갔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 신났는지, 한국 친구의 첫 방문이 설렜는지 친구는 가는 내내 창밖에 보이는 장소에 대해 설명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쳤던 공항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활기가 돌아온 모습이었다.



친구네 집 앞 정거장에 내려 365 discount라는 슈퍼에 들렀다. 머무는 동안 먹을 장을 보고 유럽에 오면 꼭 먹어야 할 납작 복숭아도 하나 사들고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넓은 마당이 있는 북유럽식 뾰족집을 상상했지만, 아쉽게도 친구 집은 오래된 아파트였다. 그래도 수동으로 여닫는 엘리베이터와, 오래됐지만 깔끔한 유럽식 아파트는 꽤 생경한 모습이었다.



친구 집이 있는 6층에 도착. 커다란 거실이 있고 오른쪽에는 작은 침실, 오른쪽에는 주방과 화장실이 있는 작지만 알찬 구조였다. 집안 곳곳의 소품과 그림, 인테리어에서 친구 부부의 취향도 느낄 수 있었다. 외국 드라마에 등장할법한 깔끔하고 감각적인 모습이었다. 여행에 밀린 빨래를 위해 친구가 예약한 빨래방을 이용하기 위해 서둘러 빨랫감만 챙겨 빨래방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한 달 전 미리 예약을 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빨래방은 오랜 시간 관리가 안된 듯 더럽고 먼지도 많았다. 친구는 아직도 손으로 하나하나 기록하고 자물쇠를 걸어서 예약을 잡는 아날로그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열을 올렸는데, 실제 모습을 보고는 마치 과거에 온 듯 재미있으면서도 웃펐다.



빨래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친구는 정성스레 점심을 차려주었다. 밥솥으로 새 밥을 짓고 직접 담근 김치에 한국에서 사 온 사리곰탕까지, 금세 뚝딱 차려진 근사한 한상이었다. 제대로 잠도 못 자서 힘들 텐데 고마울 따름이었다. 후식으로 납작 복숭아까지 먹으니 행복감이 차올랐다.



친구는 밥을 먹으면서도 동네에 갈만한 곳을 계속해서 알려줬는데, 마침 오늘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좀 쉴까 했지만 오르후스 벼룩시장을 볼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서둘러 옷만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유독 좋아서 거리만 걸어 다니기만 해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파란 하늘과 초록색 나무, 갈색의 집이 어우러진 풍경이 영국과는 또 다른 새로운 유럽의 느낌이었다.



기대했던 벼룩시장은 장난감, 식기, 옷 등을 팔고 있었고 부피가 좀 크다 보니 살만한 건 없었다. 그사이 친구는 카톡으로 계속해서 주변의 갈만한 곳을 보내주고 있었고 지도에 하나씩 기록해 두며 다음 갈 곳을 고민하고 있었다. 천천히 산책하니 확실히 크지는 않은 동네였지만, 구석구석 구경할 곳이 많아 보였다.



발길 따라 간 두 번째 오르후스 여행지는 친구가 강력추천한 셀링 백화점 루프탑 전망대였다. 백화점에서 운영하는 곳이라고 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규모도 매우 크고, 맥주바, 레스토랑도 있어 꽤 잘 꾸며져 있었다. 높은 건물이 없어 뷰도 사방이 뻥 뚫려 오르후스 전경이 보이고, 멀리 바다까지 보였다. 여행지에서 방문한 전망대 중 가장 만족스러웠다.

 


기분이 너무 좋아 맥주를 두 잔이나 마시고는 뜨거운 해를 맞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싶었다. 해먹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데, 아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항의를 하기 위한 시위대 같았는데, 피켓을 들고 코스프레까지 한 모습에서 유럽의 자유로움도 느껴졌다.



1시간쯤 시간을 보내고는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여행 오면 항상 동네를 천천히 걷곤 했는데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동네 사람들 이 많은 펍을 발견해서는 또 한잔을 했다. 일부러 가게 앞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는데 배부름과 행복함, 맥주의 취기가 올라와서는 낮잠을 잤다. 그래도 핸드폰은 꼭 쥔 채로 말이다. 



친구네 집에 돌아오니 친구가 저녁으로 제육볶음을 요리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쌈까지 제대로였는데, 누군가와 같이 살면 이런 느낌일까 묘하게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저녁 먹으며 수다를 떨고는 친구가 게스트가 오면 사용하기 위해 중고마켓에서 구매했다는 만오천 원짜리 에어매트를 설치했다. 며칠간 나만의 잠자리가 되어줄 꽤 훌륭한 침대였다. 


에어매트에 누워 잠시 쉬는데, 이대로 잠들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낮에 느낀 좋은 날씨가 계속 떠올랐다. 친구가 말해줬던 무한의 다리라는 곳에 자전거를 빌려 타서 가보기로 결정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덴마크의 따릉이라고 할 수 있는 동키리퍼블릭을 설치해 자전거를 빌렸다.



무한의 다리까지는 자전거로 20분 정도 가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겠다고 무료 쿠폰도 쓰고, 목적지보다 조금 일찍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분 이용에 거의 5,000원이 빠져나갔다. 북유럽의 물가가 실감이 났다. 



힘들게 도착한 무한의 다리는 바닷가에 만들어 놓은 원형의 나무다리였다. 사실 친구 말처럼 볼 게 별로 없는 곳이 맞았지만, 때 마침 노을이 지고 있어 꽤 멋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한가로운 사람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사람들은 맥주도 먹고 데이트도 하고 돗자리도 펴고 수영도 하고 제각각으로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 돈을 아끼려는 생각에 일단은 걷기 시작했다. 원래는 최대한 걸어가다가 자전거를 빌리려고 했는데 자전거 정류장이 없어 30분이나 걷게 됐다. 낮과는 달리 저녁이 되니 날씨도 춥고 바람도 많이 불어왔다. 결국 자전거로 20분이면 올 거리를 30분을 걷고, 10분은 자전거를 타서 겨우 도착했다. 집에 오니 갑자기 한기가 올라오고 왠지 감기가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영국에서 산 감기약 LEMSIL을 물에 타먹고는 에어매트에 누워 기절한 듯 잠에 들었다.

덴마크 오르후스에서의 행복했지만 슬픈 결말의 첫날밤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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