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오르후스 - 코펜하겐
오늘도 역시나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일찍 잠들어서 인지 배가 많이 고파서 마트에서 사놓은 요거트를 급하게 흡입했다. 오늘부터는 친구와 함께 코펜하겐으로 2박 3일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친구는 아침 일찍부터 기차에서 먹을 김밥을 싸고, 나는 서둘러 씻고 여행 채비를 했다. 친구가 만들어준 덴마크식 아침식사도 먹었는데, 죽도 밥도 아닌 게 맛이 정말 없었다. 함께 올려준 냉동 베리도 전혀 어울리지를 않았다.
서둘러 싸고 오래 정든 에어베드도 정리하고 돌아보니, 며칠간 묵은 친구 집에 정이 들어 아쉬움이 덮쳐왔다. 다시 오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에 더욱 슬펐다. 하지만 기차시간이 다가와서 서둘러 기차역으로 가야 했다. 친구 덕분에 버스 다인승차를 했는데, 다인승차를 처음 이용한다는 친구는 많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조금 늦게 나와 기차 시간이 빠듯했는데, 다행히도 늦지 않게 오르후스 역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적한 역사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또 한 번 유럽에 온 걸 실감하게 했다. 날씨도 오랜만에 화창해서 기분도 괜스레 좋아졌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앞부분이 뭉뚝한 덴마크의 기차도 신기한 모습이었다.
기차 예매를 늦게 한 탓에 자유석 티켓을 구매했는데, 코펜하겐까지는 3시간이나 가야 했다. 게다가 좌석 위에 있는 빈자석 표시 화면도 고장이 나서 주인 없는 자리를 알 수도 없었다. 몇 개의 역을 지나친 끝에 빈자리를 찾던 유목민 생활을 끝내고 주인 없는 자리를 찾아 겨우 앉아 가게 되었다.
자리에 앉아 친구가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만든 김밥을 먹었다. 급하게 만드느라 그런지, 외국이라 김이 안 좋아서 그런지 김이 눅눅해져서 아쉬웠지만, 김치가 들어가 있어서 맛은 좋았다. 기차에서 김밥을 먹고 있으니, 무궁화호를 타고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창밖 풍경을 보고서야 유럽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코펜하겐 역에 도착하니 역사 뒤로 놀이기구와 덴마크 국기가 보인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놀이공원이라니, 뭔가 낭만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놀이공원 티볼리인데,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은 장시간 이동에 지친 친구를 위해 호텔에 체크인부터 했다. 호텔은 코펜하겐 시내에서는 꽤 떨어진, 공항과 가까운 곳이라 지하철을 타고 또 30분 정도를 이동해야 했다.
꽤 신식인 Zleep이라는 이름의 호텔은 방은 정말 작았지만 나름 깔끔했다. 창 밖으로는 코펜하겐 지하철이 모노레일같이 작게 보였다. 잠시 누워 쉬다가, 간단하게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코펜하겐 첫 코스는 친구가 꼭 가고 싶어 하던 코펜하겐 디자인무지엄이다. 이곳에서 열리는 Irma라는 브랜드의 디자인 전시를 꼭 보고 싶다고 했다.
여자아이가 그려진 심벌로고가 귀여운 Irma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슈퍼 브랜드다. 하지만 얼마 전 아쉽게도 영업을 중단했고, 브랜드의 디자인 역사를 회고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는 거였다. 몇 년 전 친구와 덴마크 여행을 왔을 때 깔끔한 매장 분위기와 톡톡 튀는 상품디자인이 인상적이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함께 오자는 친구의 뜻이었다.
코펜하겐 디자인뮤지엄에 가기 위해 다시 시내로 향했다. 덴마크의 디자인 역사를 볼 수 있는 상설전시를 먼저 봤다. 특히 각 도시별 인상을 패션으로 풀어낸 작품을 인상적으로 보고는 다른 작품은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Irma 전시를 빠르게 보기 위해서 말이다.
Irma 전시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고, MD나 상품 디자인은 모두 유리 쇼케이스 안에 들어 있어서 자세하게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실제 슈퍼마켓처럼 꾸며진, 한국식 팝업스토어를 기대했던 터라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포토존이 잘 마련되어 있어서 사진은 꽤나 많이 찍었다. 그래도 아주 오래된 디자인인데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모습에서, 잘 만든 디자인의 중요성을 느꼈다. 슈퍼마켓에서 이 정도의 헤리티지라니...
뮤지엄 야외에 앉아 주변에 갈만한 식당을 찾았다. 덴마크는 음식이 발달한 곳은 아니다 보니, 덴마크스러운 음식은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친구가 찾아낸 인도네시아 음식점 saji로 향했다. 덴마크에 와서 먹는 인도네시아 음식이라니, 아직 인도네시아는 가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시내를 지나 한적한 골목에 들어서니, 한국의 한남동 같은 동네가 나타났다. Saji는 약간의 반지하 같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동네가 동네인 만큼 꽤나 비싸고 코지한 음식점이었다. 분위기는 캐주얼한데, 서비스나 가격은 파인다이닝 같은, 묘한 인도네시아 음식점이었다. 기본으로 주는 물에도 돈을 받는, 유럽다운 곳이었다.
별 기대 없이 치킨과 춘권, 국물음식을 시켰는데, 음식이 꽤나 깔끔하고 맛있었다. 나는 오늘도 맥주를 먹고, 친구는 무알콜 와인을 추천받아 시켰다. 임신을 한 터라 술을 못 마시는 게 가장 아쉽다는 친구. 항상 무알콜 와인을 마시면 과일주스 같았는데, 이번에 시킨 와인은 꽤 입에 잘 맞았나 보다. 신이 나서 텐션도 계속 올라간다. 가격은 조금 비쌌지만 여러모로 기분 좋은 식사를 해서 기억에 많이 남는 식당, Saji.
저녁을 먹고 나오니, 아직 밖은 밝은데 시간은 벌써 8시가 다 되어 간다. 휴일이라서 백화점이나 상점도 대부분이 문을 닫고, 갈만한 곳이 없다. 결국 편의점에서 아침에 먹을 빵을 사서는 일찍 숙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코펜하겐에서의 즐겁지만 아쉬운 첫날이 그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