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 몸의 기운은 젊을 때처럼 펄펄하지 못하고, 일터의 스포트라이트도 희미해진다. 평생 곁을 지키던 관계들도 하나둘 정리되는 순간이 오면, 사람 마음은 자연스레 어딘가에 기대고 싶다. 자녀에게, 평생의 반려자에게. 하지만 200년 전, 오랜 고독과 유배의 시간을 관통한 정약용은 이 상식을 단호하게 뒤집는다. "늙어서 기댈 곳은 자식도, 아내도 아니다."라고 한다. "혼자 버텨라."라는 냉혹함이 아닌 노년일수록 자기 삶의 중심을 잃지 말라는 원칙이었다. 삶에 대해 깊고 뜨거운 성찰일 것이다.
오늘날, 정약용의 경구는 철학적 사유를 넘어선 생존 조건이 되었다. 가족과 이웃의 끈이 느슨해진 사회, 홀로 사는 노인이 급증하는 현실 속에서 "누구에게 기대어 살 것인가"라는 명제는 가장 시급한 문제다. 기대수명이 길어졌다는 것은 곧 홀로 독립해서 살아야 할 시간도 길어졌다는 뜻이다.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70대 어르신들이 만든 생활동행 모임이 이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병간호나 재정 지원 같은 거창한 돌봄이 아니다. 하루 한 번의 안부, 일주일에 한 번 함께 걷는 부드러운 연결이다. 모임을 만든 74세 어르신은 "자식은 있지만 기대고 싶지 않았다. 기대면 실망도 크고, 자유롭지 않다. 내 노년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는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자발적인 운영을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정약용이 말한 자기 마음을 지키는 삶이 이렇게 현대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관계의 독립성은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주에 사는 60대 후반 부부는 40년 결혼 생활 동안 서로의 공간과 취미를 철저히 존중한다. 남편은 도서관 자원봉사, 아내는 수채화 교실. 하루 대부분을 각자의 리듬대로 보내고 저녁에 자연스럽게 만난다. 평생 함께 살아도 서로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이들의 고백은 노년의 사랑이 얼마나 성숙한 독립성을 기반으로 하는지 보여준다. 기대하고 살지 않았기에, 오히려 이러한 관계가 더 편안하고 따뜻하다.
노년의 독립은 경제, 건강, 정신이라는 세 가지 기둥 위에서 이루어진다. 경기도의 71세 마트 계산대 보조 어르신은 "자식에게 용돈 받고 싶지 않아서 일한다. 내가 벌어 내가 쓰는 게 편하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일은 생계가 아닌 존재의 리듬이다. 하루를 계획하고, 사람과 교류하며,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조절하는 과정이 곧 자존감을 지키는 힘이다. 경제적 자립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주도권 문제인 셈이다.
건강도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영역이다. 60대 후반 당뇨 전 단계 판정을 받았던 한 어르신은 약 대신 매일 1만 보 걷기를 선택해 1년 만에 정상 수치를 되찾았다. "건강을 자식에게 맡길 수도 없고, 의사가 매일 타이르지도 않는다. 결국 내 몸을 지키는 건 나 자신이다." 삶의 균형과 건강을 유지하는 힘은 외부의 돌봄이 아닌, 스스로 작은 결심과 꾸준한 반복에서 비롯된다.
익산의 디지털 배움터에는 70~80대 어르신들이 매일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 "자식에게 배우면 서로 화만 난다. 내가 쓰는 기계니까 내가 배워야 한다." 그들의 말 속에는 단순한 학습을 넘어, 나는 여전히 삶의 주인공이라는 의지가 담겨 있다. 배우는 행위는 곧 삶의 주도권을 능동적으로 되찾는 과정이다.
요즘 50대는 이전 세대보다 일찍 노년의 독립을 준비한다. 자녀가 부모의 노년을 책임지는 시대가 끝났음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여행하는 연습, 혼자 밥 먹는 연습, 혼자 여가를 보내는 연습을 자연스럽게 시작한다. 노년의 독립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능력이 아니라, 삶 속에서 천천히 길러지는 생활 기술에 가깝다.
정약용의 말은 전혀 멀게만 들리지 않는다. 기댈 수 없다는 말은 관계를 부정하는 문장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라는 조언이다. 기대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자유롭고 당당해지며, 서로를 짐이 아닌 선물처럼 대할 수 있다. 스스로 삶을 꾸려갈 때, 노년의 관계들은 오히려 더 밝고 따뜻해진다.
늙는다는 것은 홀로 남겨지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회복의 시간이다. 타인을 향하던 시선이 나에게 향하고, 남을 돌보던 마음이 나를 돌보는 데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정약용이 오래전 던진 질문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당신은 늙어서 누구에게 기대겠는가?" 그 질문의 답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나에게."
2025년 12월 더탑뉴스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