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에는
비가 오는 토요일 오후, 지브리 OST를 틀어놓고 커피를 탔지.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과 코쿠리코 언덕에서 이별의 여름을 듣는다.
늦은 아침을 먹고 두어 시간 잠시 예정된 일정을 마치고 내 사무실에 앉아 도시의 비 오는 거리, 차들이 물을 차고 달려가는 거리를 내려다보네.
비오는 오후를 오가는 사람들
하늘 빛 봄날을 꿈꾸는 걸까.
비바람에 출렁이는 가로수들은
내게 손을 흔드네.
작별이여 안녕.
이제 남은 오후.
비 오는 날은 뭐 하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뭐 하냐 물어나 볼까.
밥이나 먹자고 할까.
차나 한잔 하자고 할까.
그러다 문득 생각했지.
아무것도 안 하기로.
늘 무엇을 해야 하고
늘 촘촘히 짜인 일들을 소화해 내는 삶에서
아주 가끔씩은
고독해지는 것도 썩 괜찮은 일.
남과 이야기하고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과 함께인 삶에서 혼자인 시간.
얇은 우비를 덧입고
인적이 드문 태백산 산책길로 걷는다.
몇 백 년은 되었을까?
소나무들이 하늘을 덮은 이 숲길은.
말을 건다.
얼마 전 병원에 며칠 입원했던 일은 어땠는지
요즈음은 힘들거나 걱정되는 일은 없는지
혹시 지도에 없는 길로 잘못 가지는 않은 건지.
대답했다.
“다 그렇게 사는 걸.”
내가 웃으며 말했다.
“넌 참 대단한 놈이야.”
나도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내가 원래 그렇게 타고난걸 뭐.”
등줄기가 차가워 뒤를 보니
바람에 뒤로 젖혀진 우의를 여며 준다.
“춥다, 감기 걸리면 고생이야.”
“그런데 말이야, 꼭 그렇게 살아야 하니? “
“무슨...?”
“그런 거 있잖아. 정의, 정직, 진실."
"네가 좋아하는 뭐 이런 것들.”
내가 말했다.
“나도 뭐 대단치는 않아.”
“남들처럼 적당히 살면 어때?”
남들처럼...
적당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어난 계곡물이 박수를 치며
바위를 핥고 넘어가는 걸 보았다.
“그럴 수도, 근데 내가 남이 아닌 걸 어떻게 남들처럼 사니.”
“적당히 살면 몸도 편하고 남과도 좋지 않아?”
“그렇겠지. 어쩌면 남들은 내게 미친놈, 지만 잘났나 할지도 모르지.”
“그니까. 너라고 무슨 대단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갑자기 앞에서 몰아치는 비바람에 어깨를 돌려 등지고 걷는다.
“맞아, 근데 그게 잘 안 돼. 남처럼도 싫지만 적당히는 더더욱.”
“몸이 좀 불편해도 마음이 편한 길로 가는 게 편한 걸.”
“그렇지, 남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근데 너, 너무 멀리 왔어.”
뒤 돌아본 숲길은 벌써 깊고 어두운 동굴이 되었다.
“비도 오는데 오늘은 이쯤에서 적당히 돌아갈까?”
“겁나니?”
“겁은 무슨, 그냥 걱정돼서 그러지.”
“이런 날씨에 숲길을 걷는 게 이상하긴 하지.”
“맞아, 남들이 보면 이것도 미친 짓이라고 할걸.”
나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이제 다리도 저리고 좀 피곤해.”
“기다릴 거야, 집에 가자.”
“그래 가자.”
모두 각자의 삶을 살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것.
남이 정해놓은 길로 가기는 싫고
남이 가던 길로 가기는
더더욱 싫은 걸.
흐르는 물살에 떠밀려 가기보다는
흐르는 물살을 박차고 거슬러 올랐지.
그 길은 늘 아팠고
때로는 너무 위험했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그치만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고
남에게 보다는 나에게 비굴하지 않기를 바랐지.
비 오는 날 오후.
난 혼자 있었지.
여전히 이별의 여름이 흐르고
커피 향이
안개처럼 자욱한 방안에
홀로이 앉아
다시오지 않을 오늘에 인사를 하나니
작별이여 안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