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삶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삶은 예술이다'와 같은 말을 한 번씩은 들어봤을 거다. 너무나도 뻔해서 곱씹어볼 의지가 들지 않는 이 흔한 말을 뒤집으면 '예술은 삶이다'가 된다. 물론 어떤 명제가 참일 때 동시에 참이 되는 것은 그 명제의 대우이므로 '삶은 예술이다'라는 문장을 참이라고 가정할 경우 '예술이 아니면 삶이 아니다'라는 말이 참인 명제가 된다.
물론 이런 수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예술과 삶이 꽤 지독하게 엮여있나보다'라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고 싶었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둘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니까.
나는 비전공자 전업 그림쟁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을 배운 경험이 전무하냐 하면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주변에서 어린 시절 미술학원을 다닌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나도 그 중 하나다. 그리고 요즘의 교육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나,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미술이라는 과목의 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간호학과에 진학했고, 그로부터 5년 뒤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을 때까지 어떤 그림 교육도 받지 않았다.
비전공자가 어떻게 그림을 업으로 삼을 생각을 했을까. 여기서는 조금 오만해져야 비전공자인 내 의견을 명확히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하게도 내 생각이 모두에게 정답은 아니니 가볍게 읽으시길 바란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감각이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닮게 그리는 재능이나 색에 대한 타고난 미적 감각을 의미하는 것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내가 말하는 '감각'은 말 그대로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을 통해 외부로부터 뇌로 전달되는 감각을 포함해서 그것을 머릿속에서 처리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세상을 충실히 감각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상을 묘사하는 행위, 데생이라고 불리는 소묘 실력은 계속하면 무조건 늘게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에 계속했냐고 물으신다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하겠다. 물론 나도 묘사 연습을 했었고, 한 때는 매일 1장씩 꾸준히 하던 시기도 있었다. 변명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무언가를 사실과 비슷하게 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그림은 내 취향이 아니다. 다만, 내 그림의 설득력을 높히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묘사 실력은 필수라는 생각을 하게 됐었고, 연습을 했고, 내가 만족하는 정도의 묘사 실력에 도달하고서는 그만 뒀다. 그래서 난 아직도 데생에 뛰어나지 않다.
니가 그러니 그림에서 그런 '실력'적인 측면을 낮게 평가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에 정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면서도 나에게 예술은 정답이 없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걸 일러둬야겠다. 나는 이탈리아의 거장들이 그린 그림들이 뛰어난 묘사 실력 때문에 유명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그림에 묘사를 넘어서는 매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견을 가진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누구나 지금의 형편 없는 데생 실력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묘사 실력을 키울 수 있다.
그러면 네가 말하는 세상을 충실히 감각한다는 것은 연습으로 잘할 수 없는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이번에도 역시나 아니오라고 말하겠다. 감각하기도 연습을 통해서 키울 수 있다. 하지만 단호하게 말하건데, 묘사 실력을 키우는 것이 훨씬 쉬울 거다.
단순히 따라 그리는 행위에 재능이라는 것이 있듯 세상을 감각하는 행위에도 재능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민함이라는 형태로 드러나는데 이 글에서 예민함에 대해 다룬다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그건 다음에 따로 다루기로 하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을 충실히 감각하기 위해서는 메타인지라고 부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귀에 들리는 소리, 친구가 하는 말, 어머니가 집안일을 하시는 뒷모습, 지하철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과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같은 말 그대로 우리가 감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든 자극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을 내 머릿속 저장소에 잘 정리해두어야만 언젠가 나도 모르게 이 경험들이 뭔가를 만들어서 휙 던져줄 수 있다.
화창한 날씨를 감각하는 순간 어린 시절 소풍이 떠오를 수도 있고, 어제 봤던 네셔널지오그래피의 아프리카 초원이 펼쳐질 수도 있으며, 윤동주 시인의 시가 떠오를 수도 있다. 아마 개인의 경험에 따라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 작업은 우리의 의식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히 경험을 잘 정리해두는 것뿐이지 정리된 경험을 하나의 재료로 만들어주는 건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것들을 감각하고 하나의 경험으로 잘 정리해두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사용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 혹은 해야하는 일을 해내야 한다. 사랑할 수 있다면 사랑해야 하고, 울 수 있다면 울어야 한다. 신난다면 즐겨야 하고, 짜증이 난다면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짜증을 내야 한다. 본인의 에너지가 허락하는 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장소를 둘러봐야 한다. 순간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그 순간을 충실히 감각해내는 방법이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있어서 어떤 재료를 쓸 것이고, 어떤 풍으로 표현할 것이며, 크기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겠다라고 계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결국 우리의 인생을 잘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있는 이 순간 순간들을 충실히 감각하는 것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료를 모으는 중요한 방법이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그림들 속에는 우리의 삶이 녹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삶과 예술을 그렇게나 지독히 엮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이라도 더 오늘의 하늘을, 오늘의 밤하늘을, 오늘의 골목길을, 오늘의 점심을 조금이나마 더 충실히 감각할 수 있길 바란다. 나는 그림이, 미술이, 예술이 그 감각을 자극하고 길러주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