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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업글할매 Dec 16. 2023

제주도 성산 일출봉

업글할매의 행복한 역이민 생활 #25

그냥 놀러 가자면 전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남편이  참으로 희한하게도 숙제라고 하면 말을 들어준다. 아마도 지난번에 우리 집에서 공부 모임을 할 때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숙제라고 하면 눈 감아 주던 것이….


이번에도 눈치 빠른 업글할매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바로 숙제가 남편하고 손 잡고 가까운 곳 다녀오기라고 했더니 기가 막혀서 째려보던 남편이 웬일로 성산 일출봉을 가잔다.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또 빛의 속도로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나섰다. 어디 나가자고만 하면 저렇게 어린애 마냥 좋아한다고 기어코 또 핀잔을 준다. 성산 일출봉을 간다는데 그까짓 핀잔쯤이야 대수도 아니다.오늘은 아무래도 횡재수가 있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에서 꼼짝도 안 하는 양반이 가까운 곳도 아니고 그 먼 서귀포 끝자락인 성산 일출봉까지 간다는데 감격스러워서 기쁨의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우리 집 양반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원 가꾸기 다음으로 드라이브이다. 팔십 조금 넘은 노인네 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운전해도 까딱없단다. 아무리 피곤하다가도 운전대만 잡으면 피로가 싹 가신단다. 이것 또한 타고나는 것인가 보다. 한 시간 이상 운전 할 일이 생기면 미리 걱정부터 앞서는 나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워낙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덕분에 어디 가서 걷는 것은 못해도 가까운 곳 바닷가 해안도로는 가끔 한 번씩 드라이브를 나간다. 오늘은 큰 맘먹고 집에서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을 간 것이다. 모처럼 날씨도 화창해서 너무 신났다. 놀러 가는 데 신나 하는 것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을 것 같다. 신나지 않다면 그땐 이미 완전히 늙은 것이겠지… 아직도 이런 감성이 남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사는 곳이 애월이라서 늘 애월 주변만 맴돌다가 이렇게 멀리 나오니 눈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새롭다. 이래서 뇌 건강을 위해서라도 매일 같은 곳을 다니지 말고 이 길 저 길로 다니라고 하나보다.



드디어 성산일출봉 주차장에 도착했다. 애월하고는 완전히 또 다른 시야가 펼쳐졌다. 얼마나 근사하던지 신이났다. 남편도 모처럼 나온 나들이에 기분이 좋았는지 이번에는 정상까지 가 보잔다. 귀신이 곡할노릇이다. 여기까지 드라이브 삼아 온 것만도 놀랄 일인데  정상까지 올라가 보겠다니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신나서 발을 통통 구르다시피 해서 정상을 향해 한 발 한 발을 내디뎠다.


언제나 시작은 참 좋다. 불과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무척이나 가파른 계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냥 계단이 아니고 돌계단이다. 아이고 하늘님 소리가 절로 나오기 시작했다. 앞에서 아무 소리 안 하고 올라가던 신랑도 힘이 들었는지 생전 안 하던 뒷짐을 지고 올라가고 있었다. 나 힘들다는 무언의 표시이다. 천천히 조심해서 가라고 뒤에서 연신 잔소리를 하면서 숨을 헐떡이며 조심조심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갔다. 확실히 우리둘 다 운동부족이었다. 얼마나 안 다녔으면 한 두 번 쉬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을 무려 10번 이상은 쉰 것 같다. 그래도 우리 두사람 다 포기하겠다는 소리는 안 하고 무사히 정상까지 올라갈 수가 있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의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상까지 왔다는 기쁨에 신나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열심히 산에 오르나 보다.


미국에서의 오랜 이민 생활이 가져다준 무릎 관절염이 심하다보니 아예 등산이라는 것은 엄두조차 못 내고 살아서 이런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지를 못했었다. 그래서 제주도 살면서도 아직 한라산을 한 번도 못 가봤다.과욕은 금물이라고 나한테 버거운 지나친 욕심은 안 부리고 살려고 한다.오늘 이 정도의 등산 정도면 대 만족이다.



성산 일출봉 정상에 오르니까 다른 오름과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평야 같은 분화구도 직접 볼 수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마주 보고 있는 바다가 태평양이라는 것에 왜 그리 가슴이 설레던지…. 특별히 가슴이 설렐 이유가 딱히 있는 것도 아니면서 가슴이 설렌다는 사실이 약간 우습지만 그래도 가슴이 설레었다. 마침 해설해 주시는 분이 계셔서 열심히 들었다. 듣다 보니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듣는 것은 우리 두사람뿐이었다. 나이드신 분이 해설을 하시는데 어쩜 그리도 태연하게 바로 옆에서 떠들고 사진 찍으면서 해설사 양반을 완전 투명인간 취급을 할 수 있는지 너무도 놀라고 속상했다. 참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상에서 충분히 들러보고 잘 쉬고 다리가 풀려서 어떻게 내려가나 걱정을 하면서 또 한 발 한 발 주차장을 향해서 내려가는데 내려가는 길이 새로 공사를 했는지 아주 넓고 가파르지 않게 만들어져 있어서 생각보다 수월하게 내려올 수가 있었다. 우리 두 사람 모처럼 힘든 일을 해내었다는 그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늙어가면 되는 것이었다. 잘 늙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내 나라로 다시 돌아왔기에 느낄 수 있는 소중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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