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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Feb 16. 2023

불필요한 문장들

글을 고치다 문득

출판사마다 편집의 방향이 다른데,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불필요한 문장을 삭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령 중복되는 단어들이나 의미가 반복되는 단어들은 과감하게 삭제하라는 것이 편집지침이기도 하다. 번역서를 다룰 때도 비슷하다. 어떤 출판사는 원서에 충실하게 번역하고 그것에 맞게 교정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은 원서보다 한국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건 뭐 정답이 없다. 각자 추구하는 가치가 있는 거니까.

요즘 내가 편집하고 있는 책은 원서로 약 1500쪽 정도 되는 벽돌책이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글자가 더 늘어나는데, 오늘은 아주 조금 잠시 구역질이 날 뻔했다. 몸이 아픈 것도 있었지만, 약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똑같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글들을 교정하려니, 매번 그랬던 것처럼 잠시 지쳤다. 정신은 지쳤지만, 몸은 모니터 앞에서 문장을 다듬고 있었다. 목적은 불필요한 단어를 삭제하는 것. 문장을 다듬는 것.

문장을 다듬다, 문득 삶에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가졌다. 마치 불필요한 단어들을 지우는 것처럼, 내 삶에도 치워야 할 것들이 꽤 많아 보였다. 어질러진 자리를 보며, 언제 쓰레기들이 이렇게 쌓였지 하면서, 내게 불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네 삶은 더하지 못해서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한히 나를 확장하려고 하는 그런 욕망 때문에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를 충분히 살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과하게 넘치는 내 삶을 덜어내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빼기보다 더하기, 어떻게 하면 무언가를 덧붙이고 더할까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아마 최근에 몸이 조금 아팠던 탓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몸이 아프니 평소에 좋아하던 먹을 것 앞에서도 별로 입맛이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흥미가 없었다. 이것저것 관심을 유도하는 것들에도 눈길이 가지 않았다. 집에 와서 그냥 잠이나 자고, 몸을 회복하는 것, 그 정도가 제일 간절한 소망이었다. 몸이 아프니, 삶을 돌아보고 인간의 본질에 가까워지는 그런 기분. 그리고 주변에 있었던 사치품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그런 생각들.

불필요한 문장들을 치운다는 건, 문장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고 명확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삶에서 조금 사치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잠시 치우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 옆에서 웃으며 함께하는 동료, 친구, 연인. 참된 삶의 가치들. 삶을 산다는 건 어쩌면 수많은 부수적인 것들을 떨어뜨리는 작업일지도, 우리의 삶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들을 치우는 과정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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