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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Apr 08. 2023

편집자는 편집을 하지 않는다


현재 내가 맡은 원고는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벽돌책이다. 문제는 원고 분량이 많은 것도 있지만, 중간에 여러 일들이 치고 들어온다는 점이다. 어쩔 때는 3개월 정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 3개월 내내 다른 일만 한 것이다. 요즘도 그럴 때가 있다.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은 못하고, 잡일(?)만 할 때가 많다.

누군가 말했다. 편집자는 편집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편집자는 무엇을 하는가? 말 그대로 편집을 하지 않고, 엉뚱해 보이는 일을 한다. 하루는 저자를 만나러 가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시간을 다 사용한다. 어떤 저자에 대해 조사하는 데 하루를 다 사용하기도 한다. 중간에 퇴사(?)한 사람의 뒷일을 마무리한다고 몇 날을 보내기도 했다(ㅎㅎㅎ). 이상하게 하루가 짧고, 하루가 지나고 나면 ‘아, 맞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나도 못했네’ 하고 퇴근을 하고 있다.

오늘은 그 사람의 말, “편집자는 편집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편집자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마도 글을 보는 일이다. 편집자의 소양은 ‘글을 보는 안목과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치는지’에 있다. 그런데 실제로 편집자에게 글을 볼 시간은 별로 없다. 아니 거의 없다. 대부분의 선배들은 그 일을 퇴근 후에 한다거나, 지하철에서 한다거나, 버스에서 등 시간이 날 때마다 한다. 심지어 집에서, 주말에, 그렇게 한다.


아니, 왜?

처음에 내 반응은 이랬다. 업무시간에 하지, 그걸 왜 집에서 하냐. 내가 처음에 가졌던 의문이었다. 업무시간 안에 처리하는 게 능력이고 일머리라고! 했지만 실제로 편집자에게 글을 볼 시간은 많이 없다. 아니면 이기적으로 “나는 글만 보겠습니다” 한다면 문제없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회사의 일은 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해야 한다. 전화가 오는 것도 받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어떤 걸로 어렵던지 돌아보지 않으면 된다. 그냥 내 할 말만 하고, 내 일만 하면 된다. 근데 나는 그런 성격이 안 되는 듯하다. 그러니 더더욱 글을 볼 시간이 없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기로 했다. 대신 짧은 시간에 집중력을 높여서 글을 보자!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면서 책을 만드는 중이다.

옛날에 김미경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고. 뭐 하기 싫은 일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관련 없어 보이는 일들도 해야 되는 건 사실이다. 뭐 이 말이 책을 만드는 일뿐이겠는가. 세상살이가 다 그러해 보인다. 내가 생각한 대로 세상은 흘러가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 때때로 착한 일도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도 하고, 가끔은, 정말 가끔은 나 자신을 낮추기도 하면서 타인을 높이기도 한다. 억울할 때도 있고, 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자신이 맡은 삶보다 조금 더의 삶을 살아낸다. 나만 너무 무거운 거 아닌가 싶어서 주변을 돌아보면, 저마다의 삶의 무게가 적절히 분배되어 있음도 보이기 시작한다.

옛 지혜자가 말하기를 인생에는 각자의 몫이 있으며, 자신의 몫에 수고하며 사는 것이 인생의 낙이라고 한다. 그래, 그게 인생이지.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몫 이상의 삶을 살면 그것도 멋진 삶이고. 또 너무 많이 맡았다 싶으면 타인에게 덜 수 있는 것도 지혜고. 그렇게 인생을 배워 나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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