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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Feb 01. 2023

백댄서와 편집자

숨어 있는 존재ㅡ가리어진 사람들

‘스트리트 우먼 파이트’(스우파)는 여성 댄서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매주 화요일 밤마다 새벽까지 이 예능을 보느라 잠을 설쳤다. ‘댄서들’을 주제로 다룬 프로그램은 처음이었기에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인상이 깊었던 점은 아무래도 댄서들의 ‘생계유지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댄서들은 아이돌도 아니고,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춤을 추며 돈을 벌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백댄서’로, 가수들 뒤에서 춤을 추어야만 했다. 백댄서는 어쩌면 댄서들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단어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지만, 자신의 존재는 철저히 감추어져야만 하는.


아마도 ‘모니카’라는 댄서의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기까지 와서 우리가 백댄서를 서야 하는가?” 모니카가 이 프로그램에 나왔던 이유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뒤에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춤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진실한 마음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물론 나의 마음까지도.


최근에 백댄서들이 하나둘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도 어떤 가수의 무대를 보면 뒤에서 누가 춤을 추는지 유념하며 지켜보기도 한다. 그리고 아는 댄서가 나오면 반가워한다. 어쩔 때는 가수보다 뒤에 있는 댄서들이 더 부각되어 보이기도 한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보다 뒤에서 춤을 추는 댄서가 더 돋보인다는 점, 나는 이 점이 유의미하게 느껴진다.


요즘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은 편집자의 존재감을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저자의 뒤에서 열심히 춤을 추는 것에 그치는 것이 편집자의 기본값인가, 질문하게 된다. 편집자는 왜 감추어져야 하는가? 편집자는 왜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면 안 되는가? 어쩌면 댄서가 가수보다 화려하면 안 되는 것처럼, 편집자도 저자 뒤에 가려져 철저히 자신을 은폐해야만 하는가?


사람들은 책을 만드는 에디터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북에디터? 그게 뭔데?” 아니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데?” 하며 묻곤 한다. 대체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일은 이상하게 꽁꽁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업의 특성상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숨긴다.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묻는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왜 책 뒤로 숨어야 하는가. 그것이 책을 위하는 일인가. 그것이 책의 위상을 높이는 태도인가.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태도를 가지는 것, 이것이 편집자의 소양인가.


오늘은 책을 한 권 마무리하며, 왜인지 모를 아쉬움을 가졌다. 오늘 하루만 해도 하루종일 책 한 권을 위해 모든 마음과 시간을 다 쏟았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책 한 권을 위해. 하지만 편집자는 어디에도 그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아니면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어느 한 구석에 이름이 적힐 뿐이다.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묵묵히 주어진 일들을 거뜬히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필요하고, 멋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편집자의 기본값으로 정의하는 것은 꽤 마음 아픈 일이라 생각한다. 꼭 편집자가 뒤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지 않나. 지금처럼 이렇게 슬금슬금 기어 나와서 사람들 앞에 글을 쓸 수도 있지 않나.


우리 사회에서 지워진 이름들이 있는데, 특별히 부모님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서도 엄마. 21세기 엄마는 모르겠지만, 내가 듣고 살아온 엄마라는 존재는 희생의 아이콘이다. 사람들은 엄마에게 헌신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맡은 일들을 묵묵히 해내는 것이 미덕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암묵적으로 엄마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라는 프레임이 씌어 있다. 희생의 강요는 다른 의미로 폭력일 수 있다.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는 것이 왜 미덕인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말을 좋게 해석하면, 자기 자신을 사람들에게 잘 표현하라는 말이다. 타인의 존재에 자신의 존재를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뿜뿜하며 살라는 것이다. 희생이나 겸손이라는 말로 우리의 존재감을 억누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억눌릴 필요도 없다. 자신감은 정체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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