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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냥한 김선생님 Feb 02. 2022

소통을 위한 언어

'외국어 능력치의 총합'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담

영어를 30년 넘게 공부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  억지로 외웠던 단어들을 기반으로 근근이 버텨고,  직업 특성상 영어를 쓸 일지만 줄곧 영어공부를 틈틈이 해둔 덕에 실력이 특별히 늘지도 않고, 그렇다고 줄어들지도 않았다. 대충은 알아듣고, 가끔은 대답할 수 있었다. 수능으로 영어를 공부하고, 토익으로 이어가는 평범한 혹은 목적 없는 영어 공부 방식.  

오랫동안 영어공부를 했지만 외국인과의 대화는 늘 부담되고, 문장은 머릿속에서만 맴을 돌았다.

그러다 얼결에 중국으로 초빙교사를 가게 되었다. 중국어는 이얼싼스, 니하오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가겠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무모해도 이렇게 무모할 수가 없다.  상하이 근처니까 영어 조금 하면 되겠지? 무식이 죄다. 내 죄는 택시에 올라탄 순간 심판받았다. 마침 통역을 담당해 줄 보조선생님도 없었는데 나는 영어로, 중국인 택시기사는 중국어로, 서로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각자의 말로 우기고 있었다.  10분 거리에 있는 대형마트로 가는 길, 영어와 중국어의 합의점은 그 마트의 이름이었다. 마트의 이름을 간신히 알아들어 준 기사에게 감사하며 시에서 내렸다. 영어를 할 수 있는 중국인 택시기사는 그 이후로도 만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택시기사를 찾는 격이랄까. 아무튼 없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괜히 남편을 한국에 두고 왔나? 아이들만 데리고 멀리 왔지만 나는 마트를 가는 것도 힘들구나!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욱이 내가 담임할 우리 반 애들 중 절반이 중국인인데,

당장 그들과는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 대책이 없었다.

우선, 파파고(네이버 번역 앱)로 소통해보기로 했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중국인 보조선생님을 통해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당장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에서 살아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새벽에 인터넷 강의로, 학교에서는 초급 중국어반에, 퇴근 후에는 과외선생님과 함께 공부했다. 처음에는 중국어 발음과 성조가 낯설어서 늘지 않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알아듣는 중국어가 늘어가고 재미도 붙었다.  

메뉴판을 보고 혼자 주문을 할 수 있게 된 날 감격해서 찍은 사진( 코코넛 젤리가 들어간 백향과 쥬스 주세요!)

식당에 가서 주문도 척척, 택시를 타도 기죽지 않고 목적지를 말할 수 있게 될 무렵,  그다지 잘하지도 않았던 영어가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망했다! 나의 외국어 능력치는 총합이 아마도 딱 1인가 보다. 중국어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그나마 유창했던 한국어도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점점 문장의 반은 중국어로, 반은 영어로 섞여 나오는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중국인 집주인이 영어 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중국어 반, 영어 반인  엉뚱한 문장으로 대화를 이어가도 이해해주고 대답해줄 수 있었다. 중국인 집주인 언니(姐姐, 지에 지에라고 읽는다)는 처음 임대주택사업을 시작한 사람이었고 나는 첫 세입자이자, 집주인 제제가 처음 친해진 한국사람이어서 늘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어색하고 서먹하기도 한 건 잠시, 우리는 자주 만나서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고충을 털어놓거나, 좋아하는 드라마, 연예인 이야기. 자식 키우는 이야기 등을 하면서 끊임없이 즐거울 수 있었다.  

 불현듯 내가 오랫동안 영어 공부를 했어도 영어가 어려웠던 이유를 깨달았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소통을 위한 언어에서 완벽한 문장과 세련된 표현 , 원어민 같은 발음은 큰 의미가 없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통역을 위한 짐을 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완벽하려고 했을까.

틀리면 좀 어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도 아닌데.


한국에 돌아와 복직한 학교, 이제 원어민 선생님이 두렵지 않다.  유치하고 평범한 단어들의 나열로 대화를 이어간다.

가끔 문법에 맞지 않는 요상한 표현을 던질 때 움찔하는 선생님의 표정을 읽지만, 모른 척한다. 그도 모른 척한다.

 " 다음에 또 좋은 영화 추천해줘요~ 약속!!"  


언어는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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