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그림자 안으로 달이 들어왔는데 그 이면으로 행성이 들어가 가려진다는 것은 태양과 지구, 달, 그리고 그 행성이 모두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보기 드문 매우 경이로운 상황인 것이다. 당시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유튜브 생방송을 하면서 썸네일에 "평생 딱 한번 볼 수 있는!"이라고 적었는데, 사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드문 현상이다. 지금이라도 월식 중 천왕성 엄폐 사건을 보고 싶으신 분은 유튜브 링크를 열어보시기 바란다.
서기 755년의 밤하늘을 보던 그리스의 시인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피 흘리는 아르테미스가 제우스에게 안겼다!"
왜일까?
삼국사기 통일신라 경덕왕 15년인 756년 2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5년(서기 756) 봄 2월, 상대등 김사인이 해마다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난 사실을 들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는 시국 정치의 옳고 그름을 극렬하게 비평한 것이었다.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경덕왕 [景德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경덕왕 시기에는 특히 천재지변에 대한 기록이 많은데, 경덕왕 8년에 천문박사를 두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가 특히 천변을 살펴보는 데 힘썼을 것이란 유추를 쉽게 할 수 있다. 따라서 756년 2월의 기록에 있는 천재지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로부터 가장 최근에 있는 특정 천문현상이 있었다면 그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의 기록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금이 당나라 현종이 촉(蜀) 땅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成都)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현종은 5언 10운 시를 직접 짓고 써서 임금에게 보내며 말했다...(생략)'
- [네이버 지식백과] 경덕왕 [景德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당시 당나라 현종은 수도인 장안에 있지 않고 옛 촉한의 수도인 성도에 있었다. 이유는 755년 12월에 발발한 안녹산의 난 때문이었다. 흔히 '안사의 난'이라 일컫는 안녹산-사사명의 난은 당시 당나라 동북면의 절도사이자 군의 실세였던 안녹산과 양귀비의 사촌오빠인 양국충의 권력 다툼에서 시작된 당나라 최대의 반란이다. 이 시기에 당나라의 인구가 3600만 명이나 줄었다고 한다. 안녹산의 난 초기 수도가 함락되었고 이때 당 현종은 촉 땅으로 피신해 있었던 것이다.
나당 전쟁 이후 경색되었던 신라와 당의 관계는 성덕왕 시기부터 원만해지면서 경덕왕 시기에 완벽히 회복되는 모습을 보인다. 743년의 기록을 보자.
'2년(서기 743) 봄 3월, 주력공(主力公)의 집에서 소가 한 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보내와 제사에 참여하여 조문하게 하고, 이어 임금을 신라왕으로 삼아 책봉하여 선왕의 관작을 잇게 하였는데 그 조서는 다음과 같았다.
“고인이 된 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영해군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持節寧海軍使新羅王) 김승경(金承慶)의 아우 헌영은 대대로 왕업을 계승하여 어진 생각을 품고 상도에 맞는 예의에 마음을 두었으니, 성인의 풍속과 교화는 조리가 더욱 밝아지고 중국 제도의 의관도 따르게 되었다.
바다를 통하여 사신을 보내오고 구름을 벗 삼는 먼 길을 따라 당나라의 조정에 왕래하여 대대로 사심 없는 신하로서 여러 번 충절을 나타내었다. 지난번에 왕의 형이 국가를 계승하였으나 그가 아들이 없어 동생이 그 뒤를 잇게 되니 이것도 일반적인 예법일 것이므로 이에 제후의 예로 우대하여 책명하노니, 마땅히 옛 전통을 지켜 번국(藩國)의 수장으로서의 명예를 계승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예우를 더해 중국 한나라 관작의 칭호를 주노니 형의 관작인 신라왕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충지절영해군사(新羅王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充持節寧海軍使)를 이어받으라.”'
- [네이버 지식백과] 경덕왕 [景德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김부식, 박장렬, 김태주, 박진형, 정영호, 조규남, 김현)
본래 천자국을 칭하는 나라에서는 제멋대로 '책봉'하는 것을 좋아하니 이런 내용만 걸러서 읽어 본다면, 바다 건너 먼 길로 당나라까지 사신을 보내 관계 개선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경덕왕은 이 외에도 순우리말로 되어 있던 지명(地名)을 처음으로 한자로 고치는 한화 정책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와 755년 안녹산의 난이 벌어졌을 때는 어떤 천문현상이 있었을까. 신당서 천문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천보 13년(754) 5월, 형혹성이 심수에 50여 일 머물렀다. 점사에 이르기를 '임금이 궁을 나간다' 하였다.
천보 14년(755) 12월, 달이 목성을 동정 별자리에서 먹었다. 점사에 이르기를 '나라가 망한다' 하였다. 동정 별자리는 수도(장안) 분야이다.'
화성이 심수(안타레스)에 있다던가 달이 행성을 엄폐하는 현상은 보통 전쟁이 날 징조로 보았으니 당시 일관이 안녹산의 난과 맞물려 설명하였을 좋은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해마다 이런 천변이 있었으니 천문에 관심이 많던 경덕왕이 정황을 살펴보았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달이 목성을 동정 별자리에서 먹었다, 즉 '월식세성'은 '월식'이 있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달이 세성(목성)을 먹었다'라고 읽어야 할까? 사실 둘 다이다.
755년 월식 후 목성 어폐 현상
이때 개기월식이 있었고 월식이 끝난 후 바로 옆에 있던 목성이 달에 가려지는 '목성입월(入月)' 현상이 동시에 벌어진 것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한다면 '월식후엄세성(月食後奄歲星)'으로 기록해야 할 것이다. 목성이 엄폐되는 시간은 한반도에서 해 뜨는 시각과 맞물려 있기는 했으나 새벽 내내 월식이 이루어지는 달 바로 옆에 목성이 있었으므로 신라의 일관들도 새벽녘까지 주의 깊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756년 2월 기록에 나타난 천재지변은 바로 이 개기월식을 바탕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까.
삼국사기에 나타난 개기월식 중 행성 엄폐 현상과 동일한 현상들을 찾기 위해 한 달의 기간 동안 만세력을 이용해 월식과 달-행성의 합이 동시에 있었던 현상들을 찾아보았고, 결국 1580년에 발생한 개기월식에서 동일한 현상이 발생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1580년 7월 26일 (음력 6월 15일), 이날 저녁 동쪽에서 이미 시작된 개기월식은 달이 완전히 가려진 시점에서 바로 옆에 있던 토성을 달이 엄폐하는 현상도 함께 벌어졌다. 해가 지는 저녁에 동쪽하늘에서 진행되었기에 날씨만 맑았다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1580년 개기월식과 토성 엄폐 현상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하여 제대로 서술한 역사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선조실록의 경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사초가 소실되어 많은 부분이 누락이 되어 있어 역시 이 날의 월식에 대한 내용도 수정실록까지 보았으나 존재하지 않았다.
1580년 선조실록
1580년 선조수정실록
하지만 명 실록에는 6월 15일 짧게나마 '월식'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명나라가 우리보다 서쪽이기에 월식 관측 가능 시간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토성이 달에 들어가 나오는 모습을 관측할 수 있는 충분한 위치에 있었기에 월식이 있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달이 토성을 가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혹시 플라네타리움 소프트웨어가 잘못된 정보를 보여주나?'라는 의구심도 가졌다. 이것을 검증하기 위해 1580년에서 얼마 되지 않는 시기에 달이 토성을 가린 확실한 기록이 있는지 찾아보았고 다행히 1637년 달이 토성을 가린 기록이 있었다.
1637년 인조실록
인조 15년인 1637년 달이 토성을 무난히 가리는 현상을 볼 수 있었어 플라네타리움 소프트웨어인 Starry night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1580년에 작성된 승정원일기가 있었다면 6월 15일에 날씨가 맑았는지 흐렸는지 월식에 대한 보고와 토성 엄폐에 대한 보고가 있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찾아볼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 날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1580년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율곡 이이가 형조판서가 되어 '십만 양병설'과 '시무 6조'를 주장하기 2, 3년 전이다. 1580년 당시 율곡은 대사간으로 있었고 당시 경연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엮은 '경연일기(석담일기)'를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당시 경연에서 있었던 일뿐 아니라 여러 인사(人事)들을 목격하며 붕당에 빠진 선비들을 탄식하며 바라보는 율곡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당시 선비들 개개인의 인품에 대한 율곡의 냉철한 판단은 왜란 전후 역사의 이해에도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1580년 6월에는 월식이나 토성 엄폐와 같은 천변은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1580년 음력 6월에는 극심한 폭우가 내려 전국적으로 대홍수가 발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장기간의 비가 내렸다면 기상 상황으로 인해 월식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시기 율곡은 국제 정세를 가늠하며 병조판서가 된 후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마침 공교롭게 일어난 월식을 보았거나, 전국 어딘가에서 보았다는 보고가 조정에 도착했었다면 그의 주장에 힘을 싣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그래서 '일기'나 장계 등 여러 고문헌을 뒤져봤지만 1580년 음력 6월의 일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찾다가 찾다가, 결국 '주화입마'에 빠져버릴 뻔했다. 어느 날 뉴스에서 없어진 줄 알았던 선조 때의 승정원일기가 짠 하고 발견된다면, 제일 먼저 찾아보고 싶은 부분이다.
여담.
개기월식 중 행성식(일본에서는 혹성식)이 발생한 것을 찾아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이런 미친 천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 더 많다. 아니나 다를까, 수첩에 일일이 찾아 적어놓았던 기록들을 일본의 국립천문대 홈페이지에서 보게 되어 아연실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