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전문가윤담헌 May 15. 2023

1596년 개기일식에 관하여

정유재란 1년 전, 어두운 미래를 예고한 천변

 선조 29년 음력 윤 8월 1일(양력 1596년 9월 22일)에 일식이 있었다. 이 일식은 특히 대륙조선설, 아메리카 조선설 등을 신봉하는 유사 역사가들이 조선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면서 근거로 드는 대표적인 천문현상이다. 그들은 일식이 '무조건 실제로 관측을 해서 기록한 것'이라는 전제 하에 해당 일식의 관측지 또는 개기일식이 발생한 관측지가 한반도가 아닐 경우 조선의 영토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 또는 아메리카까지 연결된다고 주장을 한다. 이 날의 기록을 알아보자.


사시(巳時) 정각에 일식이 있었고 미시(未時)에 도로 둥글어졌다.

巳正, 日有食之, 未時復圓。

선조실록


일식으로 낮이 어두워져 별이 보였다.

朔己丑/日食旣, 晝晦星出。

- 선조수정실록


 선조실록은 실록과 수정실록의 두 가지가 있는데 흥미롭게도 같은 날 일식에 대하여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선조실록의 기록은 사시 정각, 즉 오전 10시에 일식이 발생하고, 미시(오후 1시~3시)에 종료된 것을 서술하였고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발생 시각은 삭제하고 낮이 어두워져 별이 나타난 현상만을 기록하였다. 또한 선조실록에는 일유식지(日有食之), 즉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일식이 있었다고 적는 한편 선조수정실록은 일식기(日食旣)라 하여 개기일식을 표현할 때 쓰는 기(旣)라는 글자를 넣어 기록하였다. 이 날의 일식의 본그림자 궤적은 아래 그림과 같다.

1596년 9월 22일 일식 본그림자 궤적 및 한양에서의 일식 발생 시각

 대륙조선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은 이렇다. '조선의 일식도'라는 책에서 '한양' 기준에서 일식 시작 시각은 오전 10시 45분에 일어났다고 되어 있는데 오전 10시인 사시 정각은 이보다 45분 빠르므로 한양이 아닌 중국 대륙 쪽에서 관측한 것이며, 선조수정실록에 낮이 어두워져 별이 나타났다고 했는데 당시 한양은 부분일식이었으므로 낮이 어두워지고 별이 나타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개기일식의 본그림자는 중국 대륙 쪽에 있기 때문에 조선은 대륙에 있었고, 조선의 수도는 아래 그림처럼 개기일식의 본그림자와 가까운 츠펑, 즉 적봉(赤峰)이었다는 것이다. 적봉은 흔히 말하는 홍산 문화의 발원지로 주장되는 곳이다.

츠펑에서의 일식 발생 시각

 실제로 츠펑에서의 일식 발생시각은 베이징표준시각으로 10시 1분이고 해가 먹히는 정도인 식분(食分)은 0.993이다. 이 당시 서울은 최대 식분이 0.935, 즉 태양 지름의 93.5%가 가려지며 이 정도로는 하늘이 어두워지고 별이 나타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10시 46분은 서울의 경도를 기준으로 한 시각으로 표준시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지금 한국에서 동경표준시각을 쓰는 것처럼, 당시 조선은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표준으로 하는 시각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당시 한양에서 일식이 발생한 시각은 당시 표준으로 10시 16분, 즉 사정 초각으로 기록상 사정(巳正)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오차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기일식의 본그림자에 근접한 도시는 츠펑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도 있었다는 것이다. 베이징에서의 일식 발생 시각은 정확하게 오전 10시 정각, 즉 사정(巳正)이다.

베이징에서의 일식 발생 시각

 이 사실까지 안다면 좀 더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실록에서의 일식 기록은 한양에서 실제 관측한 기록일 수도 있지만 명나라에서의 일식의 추보 및 관측 기록을 전달받아 차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과학사학회지의 '숙종 대 관상감의 시헌력 학습: 을유년(1705) 역서 사건과 그에 대한 관상감의 대응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는 1635년까지 명나라가 주변 조공국에 역서인 대통력을 계속해서 반사, 즉 나누어 보냈다는 내용이 있고, '18세기 중반 조선 일월식 계산의 새로운 기준으로서 청나라 일월식자문'이라는 논문에서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된 조선과 청나라 및 일본 세 나라가 주고받은 외교문서인 ‘동문휘고’에서 청나라의 흠천감의 일관이 일식과 월식 시각을 예측하여 알려주고 북경과 한양의 경도차에 의한 시간의 차이까지 예측, 통보하여 구식제를 준비하게 한 내용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비록 조선과 명나라의 일월식 자문에 대한 외교 문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호란 이후에도 명에 대한 사대를 굽히지 않던 나라가 조선이었다는 점으로 볼 때 명나라와도 그리고 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역서를 받고 일월식에 대해 자문하면서 일식의 예측 시각 및 관측 시각에 대해 활발히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실록은 실시간으로 상황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실록 편찬 시 1차 사료들을 모아보는 과정에서 자국 내에 개기일식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리는 명나라의 외교문서 내용도 복합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식에 대하여 광해군 때 선조실록을 편찬한 당시 북인들은 개기일식이라는 언급 없이 일식이 시작하고 끝나는 시간만 실록에 기록하였고,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쥔 서인들이 펴낸 선조수정실록에는 개기일식으로 낮이 어두워져 별이 나타났다는 현상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로는 한양에서 개기일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굳이 그랬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일식이 발생하기 전후의 분위기를 알아야만 한다.

 1596년 9월 22일은 한참 이몽학의 난이 발생하고 두 달 뒤의 일이다. 정유재란 발발 1년 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기 6개월 전의 일이다. 이몽학의 난이 발생하던 7월에는 심지어 혜성까지 나타난다. 당시 선조는 이몽학의 난을 접한 이후 갖은 의혹으로 김덕령 같은 의병장들은 숙청하였고, 일식 발생 바로 직전에 병을 핑계로 세자였던 광해군에게 섭정을 지시한다.

 선조는 특히 툭하면 선위 하겠다는 말로 광해군을 견제하였다. 이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일식과 혜성이라는 참담한 천변에 대해서 이것이 세자를 섭정으로 두려는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경고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일식은 천변 중 가장 큰 재앙의 징조로 여겼기에 광해군의 섭정을 명하는 시기에 일식이 발생했다는 것을 광해군 시기의 북인 세력이 좋아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조실록을 편찬한 북인들은 이 날 일식을 단순한 천문현상으로, 단순히 '일식이 발생했다' 식으로 적어놓고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 입장에서는 이것만큼 광해군을 폭군, 암군으로 그려낼 만한 적당한 소재가 없었을 것이다. 낮이 어두워지고 별이 보였다는 개기일식의 현상을 기록한 문서를 찾아 실록에 기재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낮이 어두워져 별이 나타났다(晝晦星出)에서 주회(晝晦)라는 단어는 사기 한고제기에 여태후가 사망하기 직전 당시 수도 장안을 통과한 개기 일식의 기록했을 때 썼던 단어이다. 당시 장안을 정통으로 지나간 개기일식으로 이 때문에 이를 근심한 여태후는 병이 생겨 불과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선조 29년 일식에 대하여, 한양이나, 츠펑이나, 베이징이나 모두 개기일식의 본그림자가 지나간 영역은 아니다. 따라서, 이 주회성출이란 단어는 개기일식을 관측한 장소에서 보고된 내용에 의해 사서에 기록된 것일 뿐이다. 그 장소가 꼭 중국의 북경 근처여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목포, 해남 지역과 제주도에서 개기일식을 볼 수 있었다. 같은 논리라면 이 날 선조 임금이 제주도에 있었다고 해도 맞는 것일까. 

1596년 9월 22일 제주에서 바라본 개기일식

 1596년 윤 8월 1일의 일식에 대하여 실록이 아닌 다른 고전에는 어떻게 쓰여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난중일기

 임진, 정유왜란이 있던 이 시기에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만 한 사료가 또 있을까 싶다. 병신년 윤 8월 1일에는 어떤 일기를 남기셨을까.

난중일기 병신년 윤 8월 1일의 기록 (출처 : 올제 난중일기)

 일식 전날 충무공은 여수가 아닌 사천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날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진중에 이르렀으니 일식이 있는 시간이었던 오전 11시-오후 1시에는 한참 말 위에 앉아계셨을 시간이다. 사천에서의 이 날 일식의 식분은 0.97 가량 되었다. 비록 개기일식이 아니지만 상당히 깊은 일식이었는데 난중일기에는 '일식(日食)'이라고만 적어 놓으셨다.


2. 고대일록(孤臺日錄)

 고대일록은 경상남도 함양군 백연리 출신의 의병장 정경운(鄭慶雲)이 조선 선조 25년, 1592년부터 광해군 10년, 1609년까지 18년 동안 쓴 일기이다. 개인의 사소한 생활상부터 중앙 정계의 미묘한 정치 동향까지 상세히 적어두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출처 : 나무위키)

 여기에는 이 날 일식을 어떻게 적어 놓았을까.


'윤 8월〔閏八月〕을축(乙丑) 초하루 일식(日蝕)이 있었다. 정오(正午)에 일식(日蝕)하였는데, 햇빛이 어둑해져서 마치 달밤 같았다. 엷게 좀먹어 들어가는 변괴가 최근에는 없었던 일이다. 슬프도다. 오랑캐가 중하(中夏)를 침범하여 왕령(王靈)이 떨치지 못하고, 군사가 변방 밖에서 수고한 지 이제 4년이다. 하늘이 재앙으로 경계(警戒) 하니, 어찌 그것이 헛된 것이겠는가.'

乙丑朔日有食之卓午日食光彩晻靄正如月夜薄蝕之變近古 所無嗟乎夷虜傦夏王靈不振勞師塞外于今四載天灾之警豈其 虛耶

 - 고대일록 (출처 : 한국고전종합 DB)


 아직 하삼도에서 왜구가 물러나지 않았던 당시 의병장 정경운의 심경이 묻어 나오는 대목이다. 이 글에서는 '일식이 있었다'라고 적었고 '달밤 같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정경운이 있던 경상남도 함양에서의 식분은 0.96이었다.


3. 난중잡록(亂中雜錄)

 난중잡록은 임진왜란 당시 남원 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趙慶男, 1570년 ~ 1641년)이

선조 15년인 1582년 12월부터 인조 15년인 1637년까지 약 57년간 국내외에서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을 일기체의 형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기록물이다.(출처 : 나무위키) 1999년에 연세대 설성경 교수는 춘향전의 저자가 바로 의병장 조경남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인 이 기록에는 어떻게 쓰여 있을까.


'윤 8월 을축 일식이 있었다. 이날 아침에 천지가 맑고 백일(白日)이 하늘에 오르더니, 오시(午時)가 되자 일식하여 우주가 어두워 지척을 분변할 수 없어 별을 헤아릴 수 있다가 한참 만에야 회복되었다.'

閏八月乙丑朔。日有食之。是朝天地開霽。白日昇天。至午日蝕。宇宙晦暝。咫尺未分。星斗可數。移時乃復。

 - 난중잡록 (출처 : 한국고전종합 DB)


 당시 남원 지방에서 식분은 0.974였다.

 위의 세 기록물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장군과 두 의병장이 쓴 '일기'로 자신이 본 일식의 장면을 직접 쓴 기록물이다. 따라서 그 어떤 기록물보다도 일식을 본 시각과 보였던 현상에 대하여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각 또한 정오 또는 오시로 표현하였는데 식분이 가장 큰 식심 시각이 북경표준시각으로 했을 때 11시 40분가량이었던 것을 보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세 기록물 모두 日食또는 日有食之로 표현하였는데 개기식이라는 표현은 없다. 하지만 난중잡록에서 '별을 헤아릴 수 있었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비록 개기식은 아니었으나 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목포, 진도, 영암 일대에서는 개기식을 볼 수 있었으므로, 이상의 기록들과 수도로 전해졌을 지방 관아의 여러 문건을 갈무리하여 만든 것이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기사인 것이다.

 당시 전란으로 가족을 잃고 쌓인 울분에 변변찮은 무기로 일어나 왜적과 싸웠던 의병장의 일기를 보니 절로 숙연해진다. 1596년의 일식은 정유재란 1년 전이란 점에서, 특히 당시 개기일식의 그림자가 지나간 호남 지역이 1년 후인 정유재란 초기 최대의 격전지란 점에서 대륙조선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더 파렴치해 보이기도 한다. 개기일식이 발생한 곳이 임금이 사는 곳이라는 그 이상한 원리주의적 선입견을 버리면 대륙조선이나 아메리카 조선 같은 엉터리 주장보다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1596년 일식에 관하여 찾고자 하는 문헌이 하나 있다. 윤신(尹紳) 선생의 지석일고라는 책이다. 윤신 선생은 해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유재란 때 '병치(兵峙) 전투' 싸움에서 전사하셨고 함께 전사한 해남 윤 씨 일곱 분을 일컬어 '해남 윤 씨 칠충(七忠)'이라 부른다. 특히 부친이 천문습독관이었던 윤경우라는 분인데, 이 때문에 혹 윤신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 직접 보셨을 개기일식에 대하여 적어 놓으신 것이 있을까 해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을 아직까지 본 적은 없다.





 


이전 12화 금성과 목성이 만났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