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바삐 오가는 행성들이 서로 만난 무수한 기록들
동양 천문학에서 사용하는 천문 현상에 대한 개념 중 행성간의 근접을 일컬어 '범(犯) 하였다' 라고 하는데 ,예컨대 '목성과 금성이 서로 범하였다'면 '木金相犯' 과 같이 서술한다. 또는 세성이 형혹을 범하였다는 식으로 '歲星犯熒惑'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태종 3년 8월 20일 실록을 보면 태종이 판서운관사 장사언과 달과 행성이 만날 때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 묻고 답하는 내용이 있다.
"월엄(月掩)이니, 월범(月犯)이니, 월입(月入)이니, 월수(月守)니 하는 것을 어떻게 구별하며, 또 달이 필성(畢星)을 가리면 그 응험이 어떠하냐?"하니, 사언(思彦)이 대답하기를,
"달이 별에 가까우면 ‘범(犯)’이라 이르고, 별을 막으면 ‘엄(掩)’이라 이르고, 별이 달에 들어갔다가 도로 나오면 ‘입(入)’이라 이르고, 별이 달에 들어가서 오래 있으면 ‘수(守)’라고 이릅니다. 만일 달이 필성을 가리면, 그 응험은 군사를 일으키는 일에 있습니다...."
- 태종실록
여기서 말하는 별은 일반적인 별일 수도 있고 행성일 수도 있다. 달은 면상의 천체이기 때문에 점상인 어떤 별이 달에 가려지지는 않고 근접했을 때는 범(犯), 달에 가려졌을 때는 입(入)이라는 단어를 쓴다. 달이 아닌 행성의 경우 점상의 천체이므로 '입'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는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목성이 토성을 가린다면 천체망원경으로는 확인할 수 있겠으나 육안으로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행성간의 만남에서 '입'을 사용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거니와 실제로 행성이 행성을 가리는 현상은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행성이 서로 얼마나 근접하면 '범'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무수히 많은 천문지에 무수히 많은 상범 기록이 있는데 도대체 행성들이 얼마나 근접해야 범(犯)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지 참고가 될 만한 자료가 있어 소개한다.
고려사 천문지 및 천동상위고(天東象緯考)에 수록된 내용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충렬왕 11년 을유년 10월 계해일. 토성이 목성을 침범하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기근이 들리라. 임금은 죽고 백성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되리라.”라고 하였다.
十一年乙酉十月癸亥. 土星犯木星. 占曰:“爲飢. 主死民流.”
- 한국고전종합DB - 천동상위고
충렬왕 11년은 1285년으로 음력 10월이므로 겨울이다. 이 시기에 목성과 토성이 가장 접근한 날을 보니 1286년 양력 1월 1일이다.
해질 무렵에 서쪽 하늘에서 보였을 상상도이다. 얼핏 보면 목성과 토성이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다. 위 그림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은 목성과 토성이 아닌 금성이다. 지금 목성과 토성은 거의 붙어서 보이는 상태이다. 그림을 좀 더 확대해 보자.
행성의 위치를 확대한 그림이다. 목성과 토성의 각거리는 11분 가량이다. 그런데 매우 근접한 거리에 금성이 위치해 있고, 금성과 토성의 각거리는 48분 가량이다.
매우 근접한 거리에 금성이 있었음에도 고려사나 천동상위고에는 목성과 토성이 범(犯)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금,목,토성이 범했다거나 합(合)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위 기록은 행성이 서로 범했다고 할 때 두 행성간의 거리가 얼마나 근접해야 범(犯)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단초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두 행성이 범할 정도의 위치에 도달해 있으면 비록 근방에 다른 행성이, 심지어 1도 내의 각거리에 있다 해도 더 가까이 범하고 있는 상황을 중요하게 다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역사상 행성이 서로 범하는 거리가 가장 근접할 때는 언제였을까. 행성이 만난 기록들을 다 뒤져보고 그것을 플라네타리움 소프트웨어로 검증해 보아야 하겠지만, Starrynight 소프트웨어 제작팀에서 자체 발견하여 Favorite으로 내장한 것에는 기원전 2년 예루살렘에서 본 금성과 목성의 대접근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금성과 목성은 가장 가까이 붙었을 때가 불과 37초였다.
만약 이 당시 천체망원경이 있었다면 그림과 같은 장관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별들의 만남, 즉 '상범', '범월', '입월'을 가지고 과거에는 길흉화복을 점쳤는데, 이것이 역사의 어떤 장면에서 나타나는 지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