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약한 스토리텔링이 원도심 복원사업의 핵심이 되다
제주도 여행 마지막에 들렀던 제주 칠성로 쇼핑타운.
북수구광장 바로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오는데 사진과 같은 표지석을 만났다.
간단히 얘기하면 옛 제주 읍성터에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대라는 일곱 개의 터가 있었고 삼성혈에서 나왔다는 제주의 대표 성씨인 고, 양, 부씨 부족이 이 칠성대를 기준으로 세 지역을 나누어 살았다고 한다. 북두칠성 자루의 끝 별인 알카이드(Alkaid), 또는 파군성, 요광성이라고 알려진 별의 자리를 나타내던 터라며
세워진 표지석을 보게 된 것이다.
제주 칠성로 쇼핑타운은 명동이나 대구 동성로, 부산 PIFF 거리처럼 깨끗하게 조성된 거리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예전부터 있던 것은 아니었고 비교적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이렇게 칠성대 표지석과 구 도심지인 칠성로 쇼핑타운이 조성되는 데에는 2015년부터 추진된 '제주시 원도심 도시재생사업'이란 것이 있는데 당시 사업의 총예산이 1445억 원이고 이 중 부처 협업사업인 '제주성 보존 및 복원사업'은
530억 원이라는 큰 규모로 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다른 여러 종류의 사업이 그렇듯이 제주읍성의 옛 모습을 제대로 고증하고 복원하는 가에 대하여 많은 의구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칠성대 표지석 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미디어제주의 김형훈 기자는 그의 기사에서 지속적으로 칠성대 표지석의 현 위치가 근거가 없는 스토리텔링일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제주도 내 고고학 또는 민속문화 관련 전문가들은 현재 칠성대 표지석이 세워진 자리에 대해 충분한 검토와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우려를 표했지만 사업은 그대로 이어져서 내가 보았던 표지석이 설치되었고,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논문이 나왔다.
이 논문은 제주대학교 건축학부의 김태일 교수와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라는 곳의 소장으로 근무하는 강문규 씨가 쓴 논문이다. 당연히 북두칠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데 이 논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참담하였다.
위 논문은 칠성대의 실제 위치에 대하여 고증하고 북두칠성의 첫 번째, 두 번째 별인 두브헤와 메라크로 북극성을 찾는 방법을 이용하면 북극성이 있는 곳에 삼성혈이 위치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선 이 논문에서 언급하는 칠성대에 대한 사료는 '탐라성주유사'에 책갈피처럼 삽입되어 있는 연농 홍종시라는 분이 그린 제주고적도에서 얻은 제주읍성도가 있는데 그림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 보면 제주 읍성의 남문과 북문(?)에 끝과 끝이 걸쳐 북두칠성의 모양의 터가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탐라성주유사 안에는 홍순만이라는 사람이 쓴 기고가 있는데 여기에 칠성대의 각각의 터의 지번이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1923년 김석익이 쓴 '파한록'과, 1954년 제주 향토사학인 '담수계'에서 펴낸 '증보 탐라지'에도 칠성대의 위치가 적혀 있는데 이 두 문헌에서의 위치는 대체로 일치하나 홍순만이 제시한 위치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한다. 논문의 저자는 arcGIS라는 프로그램으로 파한록과 증보 탐라지에서 제시한 위치를 그렸고 다음과 같다.
칠성대 터의 위치가 연농 홍종시가 그린 제주고적도의 그림과는 많이 차이가 있다. 하지만 논문의 저자는 파한록과 증보 탐라지를 더 신뢰하는데, 이유는 김석익의 경우 향토사학자로서 1915년 제주도 연구의 필독서라고 평가되는 '탐라기년(耽羅紀年)'을 완성, 1918년 이를 간행했던 인물로 평가되며 '파한록'에는 ‘칠성대의 터는 지금까지 질서 정연하게 남아 있다’고 언급했듯이 당시까지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음과 또 그중의 하나가 일본인에 의해 평지로 훼철한 사례를 목격한 인물이며, '증보 탐라지'의 편찬에 참여했던 담수계 회원들 역시 칠성대가 사라질 무렵인 1930년대에 30∼40대의 연령층이면서 향토사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인물들로서 칠성대의 의미와 위치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출처 : 상기 논문)
다만 탐라성주유사에 쓰인 기고를 논문 주제의 근거로 삼는데 '주성 내(州城內)의 주요 유적’에도 칠성대를 소개하며 “삼성혈이 북극성 자리가 되는 칠성도의 시점(始點)으로서 이를 중심으로 큰 고을이 발달하게 되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 구절은 문맥을 잘 봐야 하는 게 '북극성 자리가 되는'이 꾸며주는 단어가 삼성혈인지 칠성도인지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어쨌든, 이 정도의 문헌의 서술이 있어 칠성대 터가 있었느냐의 가부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로 정리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애당초 이것을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논문의 저자는 위의 그림에 각각의 칠성대 위치의 거리를 재어 보았고 이 거리들의 평균 거리 및 첫 번째, 두 번째 별의 거리와 삼성혈과의 거리를 비교하였다.
논문의 저자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와 같이 북두칠성을 이용해 첫 번째와 두 번째 별 간 거리의 5배를 가면 북극성이 있다는 것이고 검토 1안과 같이 칠성대와 북극성 간의 거리 비율이 5.98:1이므로 삼성혈이 북극성이라는 것이다.
나는 우선 arcGIS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거리를 쟀다고 해서 얼마나 대단한 프로그램인지 비교해 보기 위해 그냥 네이버 지도로 똑같이 거리를 측정해 보았다.
전반적으로 논문상에서 제시한 거리와 대동소이하다. 그냥 네이버 지도를 보면 될 것 같다. 이번에는 삼성혈과의 거리이다.
여기서는 북두칠성 1,2번 별 간 거리가 작아서 그런지 6.28대 1이 나왔다. 5.98대 1이라고 했으니 대략적으로 6:1의 거리 비율이다. 또한, 북두칠성 1, 2번 별과의 거리에서 정확히 직선 방향으로 갔을 때는 삼성혈이 아니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을 향한다. 정확히 일직선 상에 있다는 말이 아니란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지형이 울퉁불퉁해서 각이 틀어졌을 수도 있고 거리의 비율도 조금 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저자들은 위의 칠성단과 삼성혈을 실제 별자리와 비교하면 더 정확히 들어맞는다며
이상한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 논문의 백미, 크리티컬 포인트이다. 갑자기 북두칠성에서 삼성혈로 가는 방향이 중간에 꺾이는데, 이런데도 삼성혈이 북극성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아래 그림을 보자.
논문의 그림에서 북두칠성의 1,2번 별의 경로가 중간에 꺾이는 이유는 바로 꺾이는 그 지점이
북극성(폴라리스)이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성혈이 있는 위치는 폴라리스가 아니라
흔히 '책'성이라 불리는 카시오페이아 감마 별이 있는 곳이다. 논문 그림의 삼성혈 위치에 희미하게 카시오페이아를 그려 놓아서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엉뚱한 별자리 위치에 칠성대와 삼성혈을 대입시켜 놓고 두루뭉수리하게 북극성이 맞다고 우기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교양 천문학 수준만 되어도 저지르지 않을 실수가 명백한 논문이 지금까지 비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천문학계 또는 아마추어 천문학회 등의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논문의 저자들이 알고 있는 천문학 지식의 한계가 고작 북두칠성으로 북극성을 찾는 법 정도인데 그것에 칠성대와 삼성혈을 끼워 맞추기 위해 아전인수를 하고 있는데 여태까지 어느 정도 천문학을 이해하는 이들의 비판을 피해 온 것이다.
애당초 논리가 이것이었기 때문에 연농 홍종시의 제주고적도에 그려진 칠성단의 그림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연농 홍종시는 구한말 당시 서예가로 이름이 드높았고 일제 강점기에 현재 제주도지사인 제주 읍장을 지낸 인물이다. 무슨 향토사학자가 아니라 당시 제주의 행정수반을 지내고 개화파 인물들과 교류하던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인물이라는 뜻이다.
천문학 적으로 보았을 때 논문의 저자들의 궤변은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세차운동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제주의 세 성씨인,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가 삼성혈에서 나와 부족을 형성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른다. 하지만 탐라인이 삼국사기에 출현하는 것이 신라시대인 것을 볼 때 탐라의 시작이 최소한 삼국 시대라면 지금의 북극성은 당시에는 북극성이 아니다.
위의 그림처럼 세차운동에 의해 기원전 2000-3000년 대에는 용자리의 알파별인 투반이, 그리고 기원전후 고대에는 작은곰자리의 코카브가 북극성이었다. 아예 동양 별자리에서 코카브는 북극삼성 또는 북극오성이라 부른다. 지금의 북극성인 폴라리스는 북극성이 아닌 구진성으로 불렸다.
탐라국의 시작에 대하여 여러 주장이 많은데 논문의 저자의 말이 맞다면 탐라국의 시작은 폴라리스를 북극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고려 시대 이후부터라고 한정할 수 있다. 폴라리스가 북극성이 아닌 시대에 굳이 삼성혈을 폴라리스에 맞춰 칠성대를 배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탐라 성주는 세차 운동도 몰랐던 바보'가 된다. 논문의 저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