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보게 된 천상열차분야지도 필사본
2022년 늦여름의 어느 날, 열심히 비커를 저으며 연구에 매진하고 있던 중, 핸드폰에 블로그 알림이 뜨는 것이 보였다. 한 블로그 방문자께서 천문도를 하나 소장하고 있는데 한 번 봐달라는 댓글이었다. 그분이 보여준 천문도는 한지에 그린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필사본이었다.
제법 잘 보존된 이 천문도는 자세히 보면 주극원이나 황도, 적도, 외곽의 원까지 붓으로 그려서 비뚤거리긴 하였으나,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그려진 별그림을 거의 똑같이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위아래에 쓰인 글귀들도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있는 내용 그대로였다.
어떻게 소장하게 되셨는지를 묻자 소유자께서는 이것이 본인의 증외조부님의 소장품이었고 이제 골동품으로 감정을 받고 파시려는데 나에게 한번 봐달라고 보여준 것이다. 원을 대충 그렸는데도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거의 똑같이 필사하였다는 것은 원작자께서 기억에 의존해 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사실 골동품의 감정은 보존 상태, 저작자의 유명 여부 등이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므로 천문도 중에서도 붓을 이용해 손으로 필사하였다는 점은 특이할 만 하나 이 천문도의 감정가와는 크게 관련이 없을 듯싶었다. 보여주셔서 감사하다는 답장을 써 드리고 다시 본업을 하려 뒤돌아 서다 문득 지금까지 보아왔던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는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천문도의 왼쪽에 그려진 동방 칠수 중 하나인 방(房)수 별자리와 오른쪽의 서방 칠수 중 하나인 묘(昴)수 별자리 부근에 다른 별들과는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동그라미로 그린 일(日)과 월(月) 별자리를 볼 수 있었다. 이것을 아마도 동양 천문학을 모르는 일반인이 보면 천문도에 해와 달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일 것 같다. 그러나 동양천문학을 아는 사람에게 저 위치는 해와 달이 아닌, 日과 月이라는 한 개짜리 별로 된 별자리가 위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잘 알려진 목판본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저 위치에 있는 日, 月을 별자리의 하나로 그리고 있다.
조선시대 천문학 교과서라 볼 수 있는 '천문류초'에도 28수 중 방수와 묘수 분야의 별자리를 그렸을 때, 일과 월은 별 한 개로 이루어진 별자리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보천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방 아래 까마귀별 하나는 일이라 부르고
房下一烏號爲日
......
천아는 묘수 서쪽에 월은 동쪽에 하나씩 있고
阿西月東各日星'
- 단원자, 보천가 中
실제 별자리를 맞춰보는 동정 작업을 했을 때 일, 월, 천아 등의 별들은 매칭되는 별이 그 자리에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역시 특별함이 없다고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에 보게 된 천문도에는 바로 그 일, 월 별자리의 자리에 별자리를 그린 게 아니라 진짜로 태양과 달로 보이는 큼지막한 천체를 그려 놓은 것이다.
어 뭐지? 왜 천상열차분야지도에 해와 달이 그려져 있지? 그런데 저 해와 달이 그려져 있는 위치는 실제로 日이란 별자리와 月이란 별자리가 있는 곳인데? 그 순간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기토라 고분의 천문도가 생각이 났다. 기토라 고분의 천문도는 아래와 같은 구조로 그려져 있다.
기토라 고분 천문도의 특징은 천문도 왼쪽(동편)에 태양을, 오른쪽(서편)에 달을 나타내는 큰 원을 그렸다는 것이다. 이 천문도에서도 28수 중 정동 쪽에는 방수, 정서 쪽에는 묘수 별자리를 그려 놓은 것도 확인할 수 있다. 해와 달만 빼면 천문도의 기본적인 골격이 천상열차분야지도와 똑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던 동양 천문도에 단순히 별자리였던 일과 월의 위치가, 동명의 별자리가 아닌 태양, 달 그 자체를 가리켰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필사본에 표현한 유일한 천문도를 본 것이다. 이 필사본을 그린 분은 무슨 생각이셨던 걸까? 골동품의 처분은 소유자의 자유이기 때문에 소유자 분께 '나중에 감정가 나오면 한번 알려주세요' 하고 답글을 드렸는데, 이후 다른 여러 소장품과 함께 판매하며 정신이 없어 정확한 책정가를 모르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지금은 사진밖에 남지 않은 어딘가에 있을 천상열차분야지도 필사본. 내가 무엇을 보았나 싶었다.
별과 별자리만 그린 천문도는 흔히 성수도(星宿圖)라고 한다. 기토라 고분 천문도의 경우 해와 달을 그렸기 때문에 이 경우 일월성수도(日月星宿圖))라고 한다. 만약 추측이 맞다면 내가 본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필사본은 단순한 성수도가 아닌 일월성수도 형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알려져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 중 일월성수도의 형태를 지닌 천문도가 또 있을까? 이러한 호기심에 여러 방면을 통해 일월성수도 형태의 천문도를 찾아보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천문도 중 다음과 같이 희박한 사례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첫 번째로, e-뮤지엄 홈페이지에서 찾아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문도.
별의 크기를 상대적인 별의 밝기로 비교하는 경향을 볼 때 실제로는 저 위치에 매우 밝은 별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 월 모두 으뜸별에 해당하는 크기로 그려놓았다.
두 번째는 한국민화박물관의 소장품인 천문도.
자료의 해상도가 낮지만 위쪽의 방수 별자리 옆에 일, 묘수 별자리 옆에 월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일(日) 같은 경우 붉은색으로 도색을 해서 예사 별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별이 아닌 태양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현재 골동품으로 판매 중인 천문도에서 해당되는 경우를 찾았다.
https://stuv4.app.goo.gl/WnWfj
이 천문도를 판매하는 웹사이트에서는 300년 전 작품으로 추정되는 천문도라 쓰여 있었는데 해상도가 낮아 판매하시는 분께 직접 연락하여 고화질의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사례를 드리고 싶었는데 판매자 분께서는 이 천문도가 학술적 가치가 있는지 연구해 보라며 흔쾌히 자료를 제공해 주셨다.
주변의 별자리들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크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천문도의 특징은 관념적으로 중요한 별을 크게 강조하였는데, 예를 들면 천시원의 '제(帝)'별자리의 별은 헤라클레스 자리의 라스알게티로 별 자체는 일등성이 아니지만 중요성 측면에서 크게 부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일성과 월성을 특히 부각해서 크게 그린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는 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그려진 천문도 중 일부에서 방수 옆의 일, 묘수 옆의 월성을 크게 부각해 그린 경우가 드물지만 보이고 있다.
동양 천문학을 입문할 때 접하게 되는 보천가, 천문류초에서 일과 월을 28수 분야에 딸린 평범하고 어두운 별로 소개해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어느 현명한 선비가 일과 월, 두 개의 별자리가 북극을 사이에 두고 서로 180도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는 점, 그리고 방위 상 정동 쪽인 방수와 정서 쪽인 묘수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알고 단순한 별이 아닌 태양과 달로 인식하여 그렸고, 그렇게 태양과 달이 들어간 일월성수도 형태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일반적인 성수도 형태의 천문도보다 일월성수도 형태로 그린 천문도가 '뭘 좀 잘 아는' 분이 그린 귀한 천문도인 것이다.
이렇게 동양에서 별자리를 그릴 때 동쪽에 태양이, 서쪽에 달이 위치하게 된 것은 천문도에서 방위를 표현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이러한 천문 방위 표지 체계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알려면 조선시대보다 한참 전인 고구려의 고분 벽화까지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