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초기에 양쯔강에 있었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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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일식 기록은 기원전 54년~201년까지의 기록과 787년~911년의 기록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이 두 그룹의 연대의 차이를 상대와 하대로 나누는 것이 역사학에서 흔히 말하는 신라 상대와 하대의 연대와 동일한 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앞 그룹은 삼국통일 이전의 기록이고 두 번째는 통일 신라 이후의 기록인 것임은 확실하다.
앞 그룹인 신라 상대 시기의 일식 기록의 평균 식분을 보면 평균 식분이 가장 높은 최적 관측지라는 곳이 양쯔강 유역이라고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금의 우한시와 그 주변 지역으로 보인다. 그래서 식분의 비교는 중국의 우한시 지역과 경주를 비교하였다.
그러면 삼국사기 일식 기록의 신라 상대편에 있는 기록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기로 하자.
1. 기원전 53년 5월 9일
(한서 오행지) 五鳳四年, 四月辛丑朔, 日有食之, 在畢十九度.
위와 같이 달의 본그림자가 중국 남부 지역을 관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한반도에서도 신라 수도인 경주의 경우 0.74로 높은 식분으로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한서 오행지에는 다른 일식 기록들처럼 일식 시점의 태양의 천구상 위치까지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개기일식을 볼 수 있었던 지역이 있었으나 수도인 뤄양 지역은 해당되지 않아 개기일식으로 표현하지는 않고 있다.
2. 기원전 34년?
2번째 기록인 기원전 34년 음력 6월에는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해 전후로 비슷한 여름에 일어난 일식도 없다. 일식 자체가 없는 기록인데 한서 원제기와 오행지, 삼국사기에 동일한 역일 간지로 기록이 되어 있다. 없는 일식의 날짜까지 기록된 이유는 뭘까.
자치통감에는 역시 동일하게 음력 6월 일식이 있었다는 기록과 함께 다음의 기록이 있다.
'가을 7월에 여러 寢, 廟, 園을 다시 회복하였다.
上이 병환이 위독하여 오랫동안 평안하지 못하니, 祖宗이 견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다시 회복하였는데 오직 郡國에 있는 사당은 마침내 폐지하였다.' - 자치통감강목 (동양고전종합 DB)
무슨 말이냐면 한나라 원제는 유학을 중시하던 사람이었는데, 원제 이전까지 한나라에는 군국묘라는 게 있었다. 군국묘란 황제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지방에 설치한 것이다. 각지의 군국묘에서 지방관들이 제사를 주재하였다. 원래 고조시에 군국묘제를 실시했던 이유를 보면 황제는 백성의 아버지라는 관념에서 황제의 묘를 지방의 군국에 설치하고 지방관의 주재하에 제사를 지냈던 것인데 이것은 황제를 아버지로 하는 한 가족의 울타리 속에 황제 통치의 지방침투를 의도하였던 것이다. 즉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에 대한 지배를 국가유교를 이용해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사방식은 원래의 유교 이념에 위배된 것으로 이 시기 유학을 공부한 이들이 고위관직에 오르자 이 제도의 폐지가 논의되고 시행된 것이다. (이춘식, '중국고대사의 전개') 그런데 군국묘 폐지에 대한 논의가 구묘제로 옮겨갔는데, 본래 천자묘(天子廟)에서는 한 고조의 부친인 태상황묘까지 포함해 아홉묘였는데, 이것이 유가의 천자칠묘제(天子七廟制)에 어긋났었다. 그리하여 유학을 중시했던 한 원제는 파묘를 단행하는데, 이후 원제가 병에 걸려 위독한 것이 조상의 묘를 파묘했기 때문으로 해석하였다.
한서에 따르면 6월 일식 기록 후 7월 경자일에 태상황(太上皇)의 침묘원(寢廟園)과 원묘(原廟; 혜제때 위수 북쪽에 다시 지은 고조의 묘), 소령후(昭靈后; 고조의 모친), 무애왕(武哀王; 고조의 형), 소애후(昭哀侯; 고조의 누나), 위사후(衛思后=여태자의 모친)의 원(園)을 복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듬해 한 원제는 사망하고 만다.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일식이 있었다고 끼워 넣은 것은 한 원제가 한 행동이 재앙을 불러왔다는 유교의 '천인감응론'에 입각한 철학이 심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자였던 김부식이 이 기록을 넣은 것은 한 원제가 사망하는 사건을 가지고 연대의 기준을 삼음과 동시에 정확하게 한 원제 사망과 맞물려 '천인감응론'에 입각된 천문기록이었으므로 반드시 넣어야 할 천문기록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3. 기원전 28년 6월 19일
(한서 오행지) 河平元年, 四月己亥晦, 日有食之, 不盡如鉤, 在東井六度, …日蚤食時, 從西南起.
(한서 외척열전) 四月己亥, 日蝕東井, 轉旋且索, 與既無異.
중국 대륙의 중앙과 한반도의 서울지역을 포함한 중부 지역을 관통한 일식이다. 따라서 중국이나 한반도 어느 지역에서든 높은 식분의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한서에는 이 일식의 관측 기록에 대한 사례가 많았는지 어느 편에는 개기일식이라 하고, 다른 곳에는 다 먹히진 않고 갈고리 모양이었다라고 하는 등 표현이 다르다. 실제로 수도였던 장안이나 낙양에서는 개기일식을 볼 수 없었으나 중원의 꽤 넓은 지역이 개기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록들이 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4. 기원전 26년 10월 23일
(한서 오행지) 河平三年, 八月乙卯晦, 日有食之, 在房.
달의 본그림자가 동남아시아 지역을 지났지만 동아시아 전체가 관측이 가능하였고 한반도에서도 일식이 끝나가는 시점에 해가 졌으므로 관측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5. 기원전 15년 3월 29일
(한서 오행지) 永始二年, 二月乙酉晦, 日有食之. 谷永以京房易占對曰, 今年二月日食, 賦歛不得, 度民愁怨之所致也. 所以使四方皆見, 京師隂蔽者.
중국의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나간 일식이며 경주에서의 일식은 0.64이다. 한서 오행지에 나온 일식에 대한 언급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영시(永始) 2년 2월 그믐날 을유(乙酉)에 일식이 있었다. 곡영(谷永)이 경방(京房)의 «역점(易占)» 을 통하여 대답하기를, 금년 2월에 일식이 있어, 조세(租稅)를 거두지 못하여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여 초래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사방이 모두 보게 하여 경사(京師)가 막힌 것을 알게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한문고전 자동번역서비스 사용
이렇게 일식에 대하여 점쳤던 내용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기전체에서는 천문지나 오행지 같은 지(志)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고, 편년체에서는 해당 날짜에 일식 기록과 함께 적어 스토리텔링을 하곤 한다.
6. 기원전 2년 2월 5일
(한서 오행지) 元壽元年, 正月辛丑朔, 日有食之. 不盡如鉤, 在營室十度.
이번 일식은 본 그림자는 중국 남단과 대만 근처를 지나지만 동아시아 지역이 지구 구면의 한쪽에 치우쳐 있어 달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는 바람에 본그림자 영역과 멀리 떨어진 한반도에서도 0.8의 높은 식분으로 관측을 할 수 있었던 일식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不盡如鉤', 즉 다 먹히지 않고 갈고리 같았다는 합당한 기록을 기재하였다.
7. 2년 11월 23일
(한서 오행지) 平帝元始二年, 九月戊申晦, 日有食之, 既.
이 날은 금환일식이었는데 위 그림처럼 다른 일식에 비해 본그림자의 크기가 매우 협소하다. 수도인 장안이나 낙양을 지나간 것도 아니지만 한서 오행지에는 개기일식(日有食之, 既)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서기 2년은 왕망이 한 평제를 즉위시키며 전횡을 일삼던 시절이기 때문에 이를 강조하고자 할 때 마침 개기일식을 관측한 사료도 있었을 것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경주에서도 0.83의 높은 식분으로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8. 6년 9월 11일
이 날 일식은 달의 넓은 본그림자가 중국의 대륙 전체를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한나라 수도인 장안을 포함한 넓은 지역에서 금환일식을 볼 수 있었고, 경주에서도 0.83의 높은 식분을 보여주었다.
9. 16년 8월 21일
16년의 일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삼국사기와 한서 모두 '가을 7월'이라고 동일하게 기록한 것이다. 문제는 당시 한나라를 찬탈한 왕망의 주도로 개력이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1개월이 앞당겨졌다는 것이다. 종래의 역법으로는 '6월'이 맞다.
신라에서 일식을 관측한 후 '가을 7월'의 날짜로 기록하였다면, 당시 신라에서 왕망이 고친 역법을 사용하였다는 말이 된다.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10. 124년 10월 25일
(후한서 오행지) 延光三年, 九月 庚寅晦, 日有蝕之, 在氐十五度. (庚申晦가 正)
이 일식은 고구려 본기의 3번째 기록과 동일한 일식 기록이다. 당시 한나라 수도인 시안 지역과 양쯔강 지역 일대에서 금환일식을 볼 수 있었다.
11. 127년 8월 25일
(후한서 오행지) 永建二年, 七月甲戍朔, 日有蝕之, 在翼九度.
중국의 황하 지역을 본그림자가 지나갔으며 본그림자를 마주 보고 우한과 경주 모두 0.92의 높은 식분을 가진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12. 141년 11월 16일
(후한서 오행지) 永和六年, 九月辛亥晦, 日有蝕之, 在尾十一度
드디어 내가 찾던 일식이 나왔다.
이 날 일식은 중국 대륙에서도 일몰 시기와 겹쳐있던 일식이다. 한반도에서는 경주를 포함한 대부분 지역에서 관측이 불가했고, 서해안 일대에서는 해가 지기 전 약 5분 정도 일식이'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기에
사실상 관측이 불가한 지역에 있다.
한반도에서는 보지 못하고, 대륙에서만 볼 수 있는 일식이었으므로, 만약 독자 기록이라면 당시 신라가 대륙에서 일식을 본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에는 모두 대응하는 중국 사서 기록들이 있다. 후한서에서도 두 군데나 해당 일식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일식 기록에 대한 왜곡된 주장들의 전제는 모든 일식 기록이 '직접 관측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미 이전 글에서 그것은 참이 아님을 이야기한 바 있다. 고대에도 일식이 있을 것에 대한 계산이 있었고, 일식을 보지 못하면 일식이 있었는데 어떤 사유로 보지 못했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명실상부 한반도에서는 관측하기 힘든 유일한 삼국사기 일식 기록. 이것은 신라 내부에서 일식이 있을 것임을 스스로 계산하여 기록하였거나, 중국 사서를 인용했거나 둘 중 한 가지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13. 166년 2월 18일
(후한서 오행지) 延熹九年, 正月 辛卯朔, 日有蝕之. 在營室三度, 史官不見, 郡國以聞. (辛卯朔이 正)
식분 : 우한 0.30, 경주 0.44
이 번 일식은 앞서 141년 일식과는 반대의 경우이다. 비록 일출 시간보다 먼저 일식이 시작되었지만 불과 4분 차이였고 이후 경주 기준 0.44의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중국의 경우 장안이나 낙양 지역은 해가 뜨면서 일식이 끝났고, 양쯔강 유역은 식분이 낮아 사실상 관측이 힘든 지역이었다.
후한서 오행지는 솔직하게 '史官不見, 郡國以聞', 즉 사관이 보지 못했고 군국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위의 글이 없었다면 중국의 사이비들이 한반도, 아니 일본에 진출해서 일식을 보았다고 할 노릇이다.
후한서에 잘못 기재된 역일간지가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건 이제 놀랍지 않을 정도이다. 후한서는 역일을 제대로 기재한 오행지와 잘못 기재한 환제기를 같이 가지고 있는데, 삼국사기는 이 중 환제기와 같이 잘못된 역일간지를 기재하고 있다.
14. 186년 7월 4일
식분 : 우한 0.35, 경주 0.02
해당 일식은 고구려 본기 8번째 기록과 동일하다. 당시 일식은 한반도 남부에서는 0.01이 안 되는 작은 식분이었고 양쯔강 유역도 0.2 가량의 낮은 식분이었음에도 모두 기록되어 있다.
15. 193년 2월 19일
(후한서 오행지) 初平四年, 正月甲 寅朔, 日有蝕之, 在營室四度.
식분 : 우한 0.68, 경주 0.63
이 날도 중국 우한과 경주는 비슷한 식분으로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비록 경주는 최대 식분이 일어나기 전에 해가 지고 말지만 말이다.
16. 194년 8월 3일
식분 : 우한 0.81, 경주 0.83
한반도 동부 지역은 일출 뒤에 일식이 시작하였고 식분도 최대일 때 0.83까지 올라간 일식이었다. 일출 시기와 겹치는 중국보다 오히려 한반도가 관측이 수월하다는 것이다.
17. 200년 9월 26일
- 후한과 신라에서 공히 食이후에 군병 사열이 이루어짐.
식분 : 우한 0.52, 경주 0.70
194년 일식과 대동소이하다. 중국 대륙도 관측 가능지역이지만 주로 동부지역에 볼 수 있었고, 경주에서는 일식이 시작한 지 십 분 만에 해가 떠서 0.7대의 식분의 부분일식을 무난히 관측할 수 있었다.
18. 201년 3월 21일
(후한서 오행지) 建安六年, 十月 癸未朔, 日有蝕之.
*獻帝紀의 ‘三月丁卯 朔’은 ‘二月丁卯朔’의 誤記. 이 해에 三月丁卯 朔은 불가능.
*五行志의 ‘十月癸未朔’도 ‘二月丁卯朔’의 誤記. 10월에 일식 없음.
식분 : 우한 0.19, 경주 0.16
2월 정묘삭인데 3월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이 일식은 중국 대륙 전체와 한반도가 0.1 가량의 대단히 낮은 식분이었다. 그럼에도 기록이 되어 있고 역일 간지도 사이좋게 잘못 기록하였다.
19. 256년?
첨해 10(256) 冬十月晦 日有食之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삼국사기 일식 기록 중 대응하는 중국 사서가 없고 일식 자체도 없는 2개의 일식 중 하나이다.
이상으로 신라 상대의 기록을 알아보았다. 모두 19건의 기록 중 실현되지 않은 일식이 2건, 한반도에서 사실상 관측이 불가능한 (141년) 1건, 경주에서 0.1 이하의 식분 2건을 제외한 14건의 경우 본그림자의 경로와 상관없이 양쯔강 지역 뿐만 아니라 경주 지역에서도 높은 식분으로 일식 관측이 가능하였다.
평균 식분이 높은 곳이 비록 양쯔강 유역이라 해도 달의 본그림자의 경로가 최적 관측지라는 양쯔강 유역을 지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고, 경주에서 보았던 일식의 식분이 더 높은 경우도 있기 때문에 신라 상대 시기의 세력권이 양쯔강 영역이어서 이곳에서만 국한적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하는 엉터리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이 된다.
141년에는 한반도에서 일식을 관측할 수 없었는데 일식 기록이 왜 있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다음인 166년의 기록은 오히려 반대로 중국 쪽에서 관측하기 힘든 일식이었다. 그것도 중국의 사서에서는 보지 못한 것은 보지 못했고 주변에서 들어서 알았다는 사실을 기재하고 있다. 이것으로 일식과 같은 천문 현상이 있었을 때 관측된 사실이 국가 내 교류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일간지의 오기재는 지난 백제 본기에서도 다룬 바 있다. 신라 본기에도 대응하는 중국 사서에 잘못 기재된 역일 날짜가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16년 일식의 날짜가 신(新)나라 왕망이 잠시 제멋대로 고쳤던 역법을 따랐다는 것이다. 만약 신라가 독자적으로 기재한 것이라면 2천년전에 고쳐진 역법이 초고속으로 반사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차라리 신(新)나라가 어쩌면 신라일 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나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