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관측지는 한반도 남부라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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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평균식분도를 이용한 최적관측지설에서 고구려, 백제 및 신라 상대는 최적관측지가 중국 대륙 쪽인 반면에 신라 하대는 한반도 남부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반대인데 결국 대륙삼국설을 주장하는 어떤 이들은 신라가 삼국 통일 이전까지는 대륙에 있다가 영토가 축소되어 한반도로 이주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장은 자유니까 그렇다 치고, 평균식분도에 의한 최적관측지설 자체를 부정하는 나에겐 역시 한반도 남부 지역 중 대표로 경주를, 그리고 중국 쪽에서도 상대와 동일하게 우한 지역을, 그리고 특별히 위 식분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각각의 일식에서의 관측 가능성과 식분을 비교해 보려 한다.
1. 787년 9월 16일
(구당서 천문지) 貞元三年, 八月辛巳朔, 日蝕.
(신당서 천문지) 貞元三年, 八月辛巳朔, 日有食之, 在軫八度.
최적관측지라는 경주에서의 식분은 0.24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동아시아 전체가 일몰 전에 일식이 일어나는 것을 관측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2. 789년 1월 31일
(신당서 천문지) 德宗貞元五年. 正月甲辰朔, 日有食之, 在營室六度
몽골과 바이칼호 지역을 본그림자가 지나간 일식으로 중국과 한반도 모두 무난히 관측 가능하며 식분도 비슷한 일식이다.
3. 792년 11월 19일
(구당서 천문지) 德宗貞元八年. 十一月壬子朔, 先是司天監徐承嗣奏, 據曆, 合蝕八分, 今退蝕三分
(신당서 천문지) 德宗貞元八年. 十一月壬子朔, 日有食之, 在尾六度, 宋分也
이번 일식은 본그림자가 멀리 오호츠크해를 지나가는 일식이었고 경주에서는 0.50의 식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응하는 중국 사서 중 구당서에는 해당 일식에 대해 자세히 기입하였는데 내용인즉슨, '먼저 사천감의 서승사가 아뢰었는데 역법에 따르면 식분이 8분에 이를 것이라 했지만, 지금은 물러나 3분에 그쳤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일식에 대하여 사천감에서 나름 역법에 따른 추산을 아뢴 사실이 있고 실제로 관측해서 식분의 차이가 있다는 말도 적은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일식 기록들이 이런 절차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사서의 천문지에 기록된 많은 일식들은 식분은 적지 않았어도 28수 별자리 중 가까운 별자리로부터 몇 도 떨어져 있는지로 일식이 발생하는 위치가 적혀 있다. 물론 일식 발생 날짜와 황도의 위치를 알아서 적기도 할 것이지만 단순히 '일유식지'라고만 적은 것보다 좀 더 실제 관측했다는 사실에 가까운 기록임을 알 수 있다.
4. 801년 6월 15일
(구당서 천문지) 德宗貞元十七年. 五月壬戍, 蝕
(신당서 천문지) 德宗貞元十七年. 五月壬戌朔, 日有食之, 在東井十度
삼국사기는 모든 일식에 '일유식지(日有食之)'라고만 적어 일식이 어떤 일식이었는지, 어느 위치였는지 알려주거나 하지 않지만 유독 801년 일식 때는 반대로 '일당식불식(日當食不食)', 즉 '해가 먹혀야 했으나 먹히지 않았다'라며 일식을 관측하지 못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김부식이 신라의 사료를 검토하면서 굳이 여기에 '일당식불식' 하나 넣어야지 하고 삽입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의아한 것은 당시 경주에서는 0.41 식분의 일식이었지만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고 동아시아 전체가 이와 비슷한 식분의 일식 경로 안에 들어와 있었는데 일식을 관측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특수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전후맥락은 살피지 않고 단순히 일식 기록만 뽑아다가 줄 세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일당식불식은 우선 일당식, 즉 '해가 당연히 먹혀야 되는데'라는 점에서 일식이 발생할 것이라는 추산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문장이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역법의 수준이 낮아 일식의 발생을 추산하기 어려웠던
고대 및 중세 사서에는 제법 나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식의 추보가 정교해지면서 조선 시대 이후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다.
그런데 조선에도 이러한 '일당식불식' 또는 '월당식불식'이 존재한다. 이유는 일식과 월식의 발생과 상관없이 '당식불식'이라는 단어가 정치적인 도구로 쓰였기 때문이다. 태양은 임금을 가리키고, 달은 신하를 가리키므로 일식이 발생하는 것은 곧 신하가 임금을 해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 여겼기에 일식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임금의 치세가 올바름으로 여겨 하례하기도 하였다. 특히 성리학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던 연산군 시대에는 '월당식불식'이란 말이 3건이나 나온다.
801년이 신라 애장왕 시절이기에 당시의 정치 역학 구도를 조사해 봄으로써 '일당식불식'이란 문장이 왜 기재되었는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애장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숙부인 김언승의 섭정을 받다가 결국 김언승(헌덕왕)의 반란에 잡혀 죽음을 맞은, 수양대군과 단종의 이야기와 유사하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5. 808년 7월 27일
(구당서 천문지) 憲宗元和三年. 七月癸巳, 蝕 (辛巳를 오기하였음)
(신당서 천문지) 憲宗元和三年. 七月辛巳朔, 日有食之, 在七星三度
801년 일식을 더욱 의아하게 만드는 것이 808년 일식이라고 볼 수 있겠다. 801년 일식과 경로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주에서의 식분은 0.29로 801년보다 식분이 더 낮은데 일식을 관측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808년은 애장왕이 죽기 1년 전인데, 어린 애장왕이 등극할 때는 일어나야 할 일식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808년은 일식이 일어났고 이듬해 애장왕이 반란을 맞아 죽었다는 스토리텔링은 아니었을까.
6. 815년 9월 7일
(구당서 천문지) 憲宗元和十年. 八月己亥朔, …皆蝕
(신당서 천문지) 憲宗元和十年. 八月己亥朔, 日有食之, 在翼十八度
지금까지 일식의 본그림자가 한반도 근처에도 오지 않았는데 호남과 제주 지역을 본그림자가 훑고 지나간 일식이다. 경주에서의 식분은 0.94이지만 중국의 베이징과 산둥반도를 정확히 관통한 일식이다. 당연히 동아시아 전체에서 관측 가능하였던 일식이다.
7. 818년 7월 7일
(구당서 천문지) 憲宗元和十三年. 六月癸丑朔, …皆蝕
(신당서 천문지) 憲宗元和十三年. 六月癸丑朔, 日有食之, 在輿鬼一度, 京師分也
본그림자는 연해주를 지나가고 경주에서는 0.71의 식분으로 보였던 일식이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 모두 해가 지기 전 무난하게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8. 836년 1월 22일
(신당서 천문지) 文宗開成元年. 正月辛丑朔, 日有食之, 在虚三度
이 날 일식은 있었으나 남극대륙을 훑고 지나가는 일식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당서 모두 일식이 있었다고 기재하였다. 천문지에 나와있는 '허(虛) 수'로부터 3도라는 천구상 위치는 맞으나 실제로 일식의 관측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관측이 불가능한 일식 기록이 있는 것은 단순히 조작이니 그런 것으로 보지 말고 왜 이런 기록이 기재되었는지 당시의 역법의 수준과 함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9. 844년 2월 22일
(구당서 천문지) 武宗會昌四年. 二月甲寅朔, …皆蝕
(신당서 천문지) 武宗會昌四年. 二月甲寅朔, 日有食之, 在營室七度
역시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서 무난하게 비슷한 식분으로 볼 수 있는 일식이다. 본그림자가 동남아시아 지역을 지나가 쿠알라룸푸르 같은 지역의 식분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10. 888년 4월 15일
(삼국사기) 문성 6년 春三月 戊戌朔日有食之
(신당서 천문지) 僖宗文德元年. 三月戊戍朔 日有食之, 在胃一度
식분 : 우한 0.83, 경주 0.96, 쿠알라룸푸르 0.87
신라 후기 일식 중 유일한 경주에서의 개기일식이다. 동시에 동남아에서 중국 남부를 관통하는 일식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개기일식으로 표현한 것은 신당서이다. 삼국사기는 일관되게 일식이 있었다(日有食之) 고만 적혀 있으나 신당서에는 개기일식이 있었다는 의미로 '日有食之, 既'라고 표현하였다.
비록 수도였던 장안에서는 부분일식이었으나 세력권 내에서 개기일식이 있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이다. 신라 후기의 평균 식분도상 최적관측지가 한반도 남부임에도 불구하고 개기일식을 표현하지 않은 것은 과연 신라본기의 일식 기록이 자체 관측 기록이었을지 강한 의구심이 들게 한다.
11. 911년 2월 2일
(요사 본기) 遼太祖五年. 春正月 丙戌朔, 日有食之
(신오대사 양신전) 後梁太祖乾化元年. 正月庚寅, 日有食之 (*干支오류)
식분 : 우한 0.83, 경주 0.03, 쿠알라룸푸르 0.00
이 날의 일식은 본그림자 자체가 지구를 지나가지 않아 부분일식이었고 동아시아 전체가 관측 가능 영역이었으나 매우 낮은 식분(0.1 이하)여서 실제 관측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상으로 신라 후기의 일식기록을 살펴보았다. 총 11건의 일식 중 836년 남극의 일식을 제외한 모든 일식에서 한반도와 경주 지역은 관측 가능 지역에 있었다. 심지어 일식을 보지 못했다고 기록한 801년 일식까지도 말이다. 경주 지역의 식분은 대부분 낮았으나 815년과 888년에 달의 본그림자가 가까이 지나가면서 식분의 평균을 높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일식에서 중국 대륙도 일식 관측 가능 지역이었기에, 삼국사기 신라본기 일식 중 하대에 속하는 일식기록이 경주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만 기록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일식의 평균식분도가 중국과 베트남까지만 나와서 몰랐는데, 이 신라 후기의 일식 기록의 본그림자가 높은 식분으로 가장 많이 지나간 곳은 공교롭게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이다. 787, 801, 808, 844, 888년의 무려 5개의 일식의 본그림자가 쿠알라룸푸르나 그 주변을 지나갔다.
일식이 일어나지 않은 836년 일식을 제외한 열 번의 일식에서 경주의 평균식분은 0.48, 쿠알라룸푸르는 0.44로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쿠알라룸푸르의 경우 위의 5번의 일식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식에서는 달의 그림자가 지나가지 않아 식분이 0이라는 점이다. 경주의 경우 식분이 0.9 이상으로 높았던 2건 외에 작은 식분이라도 관측 영역 안에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평균식분은 쿠알라룸푸르보다 높다.
다시 말해 평균식분도는 그저 평균만을 언급할 뿐 개별적인 데이터들과 평균값과의 편차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위의 그림을 보라. 흔히 일식 기록의 본그림자를 겹쳐서 그곳이 수도라는 왜곡된 주장을 하는 이들의 논리를 따르면 신라는 당시 말레이시아 지역을 다스린 스리위자야와 같은 나라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