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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Aug 01. 202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일식기록 검토

평균식분도의 허구 벗어나기

https://brunch.co.kr/@fbf3b2ca4e37487/8

 본 편부터는 위 링크글인 '삼국사기 일식 기록과 대륙삼국설'에서 박창범 박사가 주장한 '평균식분도'에 의한 최적 관측지론의 무의미성의 근거로 삼국사기에 기재된 개개의 일식 기록을 하나하나 검증하고자 한다. 삼국사기와 대응하는 중국 사서 기록은 아래의 논문을 참고하였으며, 실증을 위해 독자 여러분도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일권 교수의 논문, '삼국사기 일식기록의 한중 사료 대조와 일식상황 비교'

- 신라사학보 37, 2016, 133-250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용훈 교수의 논문, '삼국사기 천문 기록의 재검토: 중국 사서(史書) 의존성 기록을 중심으로' - 한국과학사학회지 42(1), 2020, 29 - 64


 논문을 간추린다면 김일권 교수는 박창범 박사의 논문도 간단히 언급하면서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67개의 일식 기록(日有食之) 중 2개를 제외한 65개의 기록이 중국의 사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들어 삼국사기의 기록은 독자적으로 관측한 기록이 아니라 중국 사서의 내용을 참조하여 첨입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중국 사서에는 없는 2개의 기록은 실제로는 일식이 발생하지 않았다.

 '한국 천문학사'의 저자이기도 한 전용훈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김일권 교수의 주장을 한 편으로는 수긍하면서도 몇 가지 기록의 상이점을 들어 우리가 독자적으로 관측한 것은 맞는데 나중에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중국의 사서를 참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고구려본기부터 보기로 한다. 박창범, 라대일 씨의 논문에서 고구려 일식 기록의 평균 식분도에 의한 최적 관측지는 바이칼호 근처라고 하는데, 평균식분도라는 개념은 잊고 하나하나 들여다보자.

 그전에 '식분(Eclipse magnitude)'이란 개념은 일식이 일어난 시간 동안 달이 태양을 가장 많이 가렸을 때 태양의 지름을 달이 가린 정도를 말한다. 즉, 식분이 0.5라는 말은 태양 면적의 절반이 가려진 게 아니라 달이 태양을 최대한 가렸을 때 태양의 반지름만큼 가렸다는 의미가 된다. 면적비(Obscuration)는 이와 달리 태양의 전체 면적에서 달이 가린 정도를 나타내며 간략하게 아래 그림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일식의 식분과 면적비

 일반인의 경우 '식분'이라는 용어를 면적비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어 미리 알린다.


1. 114년 11월 15일

(삼국사기) 태조 62(114) 春三月 日有食之

(후한서 안제기) 元初 元年三月癸酉, 日有食之

식분 :  보르자 0.35, 국내성 0.50

 대응하는 사서인 후한서 안제기에는 삼월 계유일의 회삭간지가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삼월로만 기재되어 있다. 이 날 일식도는 아래와 같다.

114년 11월 15일 일식도

 일식도를 처음 보는 분들을 위해 각각의 선들이 나타내는 의미를 적어 보았다. 일식의 그림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가운데 두 줄의 적색선이 나타내는 음영지역이 일식의 본그림자가 지나가는, 개기일식을 관측할 수 있는 영역이다. 개기일식은 해가 완전히 가려지므로 당연히 식분은 1.0이 된다.

 양 쪽 노란색 선의 제일 끝 부분이 일식과 일출 또는 일몰이 겹쳐지는 곳이므로 일식을 볼 수 있는 경계선이라 할 수 있다.

 이 날 중국 대륙 전체에서는 일출 또는 일몰과 상관없이 일식을 볼 수 있었고, 한반도 및 만주 지역에서도 해가 질 때 일식이 끝나는 점과 맞물려 있어 일식이 진행하는 것을 보는 데 무리가 없는 지역이었다.

 이전 글에서 박창범 박사가 주장한 고구려 본기의 최적 관측지가 바이칼호 부근이라 하여 바이칼 호 부근의 지역 중 '보르자'(북위 50º 21', 동경 116º 28') 지역과 국내성이 있을 곳으로 추정하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 (북위 41º 7', 동경 126º 10')에서의 식분을 비교한 바 있다. 이 날 일식의 최대 식분은 바이칼 호 부근의 보르자는 0.35, 국내성은 0.5로 확인되어 국내성 쪽이 더 많이 가려진 모습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116년 4월 1일

(삼국사기) 태조 64(116) 春三月 日有食之

(후한서 안제기) 元初三年, 三月辛亥, 日有食之

(후한서 오행지) 元初三年, 三月辛亥, 日有食之 在婁五度, 史官不見, 遼東以聞.

식분 :  보르자 0.87, 국내성 0.98

 이 기록은 중국의 황해를 인접한 지역에서는 일출 시에 약간이나마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을 뿐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일식이었고 한반도와 만주 지역 또한 일출 시에 일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사진을 확대해 보면 아래와 같다.

 당시가 한나라 안제(安帝) 시기였으므로 수도인 양은 일식을 관측할 수 없었다. 이 절묘한 일식의 경계는 후한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오행지에 '사관이 일식을 볼 수 없었고, 요동에서 들었다'는 말을 삽입한 것이다. 116년 당시 요동 지역까지 한나라의 세력권 뻗어 있었으므로 이 지역의 보고로부터 일식이 발생했음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116년의 일식은 당시 고구려와 한나라의 세력권을 나누는 중요한 기록으로 후한서와 삼국사기 모두 합당한 기록을 남겼다. 만약 고구려가 위 그림의 노란색 선 보다 서쪽에 있었다면 후한서처럼 일식을 보지 못했다고 기록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124년 10월 25일

(삼국사기) 태조 72(124) 秋九月庚申晦 日有食之

(후한서 안제기) 延光三年. (九月)庚申晦, 日有食之.

(후한서 오행지) 延光三年, 九月庚晦, 日有蝕之, 在氐十五度.(*庚申晦가 正)

식분 : 보르자 0.49, 국내성 0.59

 위의 세 일식은 고구려 태조대왕 때 일어난 일식이다. 이 시기에 기타로 폭설과 지진의 기록이 있다. 주된 내용을 간추리면 태조대왕 궁(宮)이 한나라의 현도와 요동을 공격한 내용들이다. 이 당시 전공을 세웠던 이가 바로 동생인 수성(遂成)이다.

 수성은 태조 69년 봄 한나라가 침입했는데 이를 잘 막았고 오히려 여름부터는 역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해 11월부터는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통괄하게 한다. 이 수성이 바로 차대왕이다. 동생인 수성이 임금에 욕심을 내는 부분이 태조 72년 일식 기록 다음에 나타나 있다.


80년(서기 132) 가을 7월, 수성이 왜산(倭山)에서 사냥을 하며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관나(貫那) 우태 미유(彌儒)와 환나(桓那) 우태 어지류(菸支留)와 비류나(沸流那) 조의(皂衣) 양신(陽神) 등이 남몰래 수성에게 말했다.

“초기에 모본왕이 돌아가셨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再思)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자신이 늙었다 하여 아들에게 양보하였다. 이는 형이 늙으면 아우가 잇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임금이 이미 늙었으나 양보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대책을 생각해 보시오.”

수성이 말하였다.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은 천하의 떳떳한 도리이다. 임금이 지금 비록 늙었으나 맏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왕위를 탐내겠습니까?”

미유가 말했다.

“아우가 어질면 형의 뒤를 잇는 일이 옛날에도 있었으니 그대는 이를 의심하지 말라.”

이로써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왕위 계승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병을 내세워 벼슬을 하지 않았다.

 - [네이버 지식백과] 태조대왕 [太祖大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태조대왕 90년인 142년에는 환도에 지진이 난 기록이 있다.

 이후 태조대왕 94년에는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내 나이도 들어가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계책을 생각해 보라.”라며 가까운 신하들에게 독촉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이 해 겨울 우보 고복장이 다음과 같이 간언 한다.


겨울 10월, 우보 고복장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수성이 장차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바라건대 먼저 그를 처형하십시오.”

임금이 말하였다.

“나는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을 세웠다. 나는 수성에게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 하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복장이 말하였다.

“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해 오늘 대왕의 왕위를 받으면 내일은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은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 알고, 무고한 자손들에게 재앙이 미칠 것을 알지 못하시니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 [네이버 지식백과] 태조대왕 [太祖大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그러나 12월 태조대왕은 결국 동생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4. 149년 6월 23일

(삼국사기) 차대 4(149) 夏四月丁卯晦 日有食之

(후한서 환제기) 乾和三年, 夏四月丁卯晦,日有食之.

(후한서 오행지) 乾和三年, 夏四月丁卯晦,日有食之, 在東井二十三度.

식분 : 보르자 0.90, 국내성 0.60

 중국과 한반도 모두 일식 관측이 가능한 영역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일식의 본그림자가 바이칼 호를 지나가고 있다. 고구려의 평균식분도에서 바이칼 호 부근이 높은 이유가 되는 일식이라 할 수 있다.


5. 158년 7월 13일

(삼국사기) 차대 13(158) 夏五月甲戌晦 日有食之

(후한서 환제기) 延熹元年, 夏五月…甲戌晦,日有食之.

(후한서 오행지) 延熹元年, 夏五月甲戌晦,日有食之, 在柳七度

식분 : 보르자 0.90, 국내성 0.97

 이번 일식도 149년 일식과 동일하게 바이칼 호 부근으로 본그림자가 지나가지만 동시에 한반도, 그것도 압록강과 평양 근처도 지나가는 일식이다. 이 일식을 높은 식분으로 관측할 수 있는 지역은 바이칼호 근처로 국한되지 않는다. 국내성으로 추정되는 위치에서의 식분 또한 0.97로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165년 2월 28일

(삼국사기) 차대 20(165) 春正月晦 日有食之 - 백제 5번째 동일 기록에서 正月丙申晦 확인.

(후한서 환제기) 延熹八年, 春正月丙申晦,日有食之.

(후한서 오행지) 延熹八年, 春正月丙申晦, 日有食之, 在營室十三度.

식분 : 보르자 0.84, 국내성 0.50

 이 기록 또한 한반도 지역은 비록 일몰 시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으나 일식을 보는 데는 무리가 없는 지역이다. 여기도 본그림자가 바이칼 호 부근을 지나간다.


7. 178년 11월 27일

(삼국사기) 신대 14(178) 冬十月丙子晦 日有食之

(후한서 영제기) 光和元年. 冬十月丙子晦, 日有食之.

(후한서 오행지) 光和元年. 冬十月丙子晦, 日有食之, 在箕四度.

식분 : 보르자 0.05, 국내성 0.07

이 날의 일식은 인도, 네팔, 동남아시아를 본그림자가 지나가고 바이칼호 및 만주, 한반도 지역은 반그림자의 끄트머리가 걸쳐 있었다. 즉 고구려의 활동 지역으로 볼 수 있는 지역 모두 0.1 이하의 식분을 가지는 지역이어서 과연 일식을 제대로 관측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반면 중국 본토는 본그림자에 더 가까운 지역으로 뤄양의 경우 0.37, 시안의 경우 0.43의 식분을 가지고 있었다.


 차대왕이 즉위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우보 고복장을 처형한 것이다. 처형당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고복장이 탄식하는 것을 볼 때 태조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안 된다고 간언한 것이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이듬해에는 태조대왕의 맏아들인 막근도 죽이고 둘째 아들인 막덕은 자살하는데 결국 고복장이 걱정했던 바가 그대로 실현되고 만다. 차대왕 4년인 149년 일식 기록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5월, 오성(五星)이 동쪽에 모였다. 일자(日者)가 임금이 성낼까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말하였다.

“이것은 임금의 덕이며, 나라의 복입니다” 임금이 기뻐하였다. 겨울 12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149년 음력 5월의 오성취 기록은 시간의 이정표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동쪽에 오성이 모였던 시기는 149년이 아닌 151년으로 확인된다.

151년의 오성취합

이후에도 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나더니 결국 차대왕 20년에 명림답부(明臨荅夫)가 난을 일으켜 임금을 시해하고 신대왕을 옹립한다. 신대왕도 또한 태조대왕의 동생으로 차대왕과 달리 치세로 기록되어 있다. 국상으로 임명한 명림답부는 유명한 재상으로 특히 신대왕 8년에 침입한 한나라의 병사들을 물리쳐 말 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치세가 이어지는 동안에 위에 기록된 것처럼 신대왕 14년에 유일하게 일식기록은 아래와 같이 기재되어 있다.


15년(서기 179) 가을 9월, 국상 명림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임금은 몸소 가서 애통해하고 7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다. 질산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고, 수묘(守墓) 20가(家)를 두었다.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곡(故國谷)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신대왕(新大王)이라 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신대왕 [新大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신대왕 시기의 애석한 사건은 바로 국상 명림답부의 사망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3개월 만에 신대왕도 죽으니 바로 전 해에 있었던 일식을 맞물려 기록한 것이다.


8. 186년 7월 4일

(삼국사기) 고국천 8(186) 夏五月壬辰晦 日有食之 - 신라 14번째 일식기록과 중복

(후한서 영제기/오행지) 中平三年, 五月壬辰晦, 日有食之

 186년의 일식은 우선 바이칼호 부근에서는 관측이 불가능하거나 낮은 식분이었고, 만주 지역은 관측이 불가능한 일식이며 한반도에서는 평양 부근도 매우 낮은 식분이다. 이 기록은 신라의 일식 기록과 중복된다. 그림을 좀 더 확대해 보자.

 한반도, 특히 남부 지역은 그나마 일식의 반그림자 안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평양이나 요동 지방에서 관측이 가능하기는 했는데 낮은 식분이어서 관측이 가능하지만 직접 관측에 의한 기록인지 신빙성에 의문이 드는 일식이다. 만약 대응되는 중국의 사서가 없었다면 이 기록을 가지고 고구려의 영토는 대륙의 중원 지역이었다 주장하는 사람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애석하게도 삼국사기 내 실제 관측 가능한 65개의 일식기록은 모조리 대응하는 중국 사서가 있어서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다.


9. 219년 4월 2일

(삼국사기) 산상 23(219) 春二月 壬子晦 日有食之

(후한서 헌제기/오행지) 建安二十四年, 二月壬子晦, 日有食之.

식분 : 보르자 1.0, 국내성 0.69

 흔히 '삼국지'의 시대였던 219년 일식은 바이칼 호 부근을 일식의 본그림자가 지나갔다. 하지만 한반도 지역에서도 0.6 이상의 높은 식분으로 일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10. 273년 10월 28일

(삼국사기) 서천 4(273) 秋七月丁酉朔 日有食之

(진서 무제기/천문지) 太始九年, 秋七月丁酉朔, 日有食之.

식분 : 보르자 0, 국내성 0

 고구려 일식 기록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일식이다. 이 날 달의 그림자는 중국은커녕 아시아 대륙 전체를 비껴가는 일식이었다. 즉, 우리가 아는 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일식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서와 삼국사기 모두 일식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실제로 관측하여 기록된 일식이라 주장한다면 사마염은 아프리카를, 서천왕은 호주 대륙을 점령이라도 한 것일까.

 이런 비현실적인 기록이 왜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글에서 계속 전제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실제로 기록자가 관측을 하였다는 전제 하에'라는 것이다.

 이 전제의 근거는 없다. 일식의 기록은 반드시 그것을 관측한 사람만 적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116년의 일식처럼 요동 지방에서 발생한 소식을 들어 적을 수도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일식이 있을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에 적은 것일 수도 있다.

 일식을 볼 수 없다 하여 일식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헌력이 보급된 조선 후기까지도 일식의 추보는 비록 일식이 일어날 날짜는 예측할 수 있어도 일식이 발생하는 위치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삼국 시대라니.

 이 기록은 누가 누구를 베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관측된 사실이 아닌 추산에 의해 예측한 것을 공유한 것이다.


 고구려의 일식기록은 한 개 더 있는데 양원왕 10년의 일식 기록은 중국 사서에도 대응되는 기록이 없고

실제로 일식이 발생하지 않은 날짜이다.


 이상으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일식 기록에 대해 알아보았다.

 273년의 관측불가 일식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식에서 중국과 한반도, 만주 영역이 관측 한계선 안에 있었다. 어디서든 일식을 볼 수 있었다는 말이다. 후한의 경우 관측 한계선 밖에 유일하게 있었던 116년 기록에관측 한계선 밖에 있었음을 스스로 기록하고 있다.

 기록된 일식 중 4개 정도가 일식의 본그림자가 바이칼호 부근을 지나기 때문에 평균 식분도가 높은 것일 뿐 그 곳에서 모든 일식이 한결같이 높은 식분으로 보였던 것은 아니다. 바이칼 호 부근에서의 식분들의 평균값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하더라도 최적 관측지로 불리기에는 너무 편차가 심해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몇 개의 예외사항이라고 하기에는 그 몇 개가 전체 표본의 절반 이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273년의 일식은 동아시아 전체가 식분이 0인데 이것도 평균식분도를 구할 때 데이터로 썼던 것인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설득력이 더 떨어지고, 그렇지 않다면 표본의 취사선택이므로 조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기록이 후한서, 진서와 같은 중국의 사서에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럼 이 기록들의 평균식분도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후한과 진나라의 평균 식분도 이기도 한 것이다. 심지어 후한서에는 단순히 일식이 있었다(日有食之)는 말 외에도 태양의 위치가 어디었는지, 실제로 보았는지 아닌지도 기록해 놓고 있다. 후한서는 삼국사기보다 800년가량 앞선 4세기 쓰인 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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