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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전문가윤담헌 Oct 26. 2022

일식 기록이 전부 실측 기록인 것은 아니다

유사역사학에서 특히 가지는 오해, 한나라의 수도는 북경일까

 현재 대륙삼국설, 대륙조선 및 아메리카 조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드는 천문 기록, 엄밀히 말해 일식 기록은 실제 관측자가 달의 본그림자가 지나가는 지역에 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고, 공인된 정사에 남았다는 것은 그 나라의 중앙 관청이 거기 있었다, 즉 도읍지였다는 논리의 바탕이 된다.

 그렇게 시간의 동질성도 없고, 무작위적이지도 않은 일식 기록들의 본그림자들을 레이어 쌓듯이 겹친 후 가장 많이 겹쳐지는 지역을 뽑아 여기가 수도일 가능성이 높은 곳이라는 결론을 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의 바탕인 '일식 기록은 실측(實測) 기록이다'라는 전제부터 반박해야 한다. 기록의 무오성을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反)하는 사례만 들면 되는 것이다.

 자치통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봉 원년(元鳳元年, 기원전 80년) 秋,七月,乙亥晦,日有食之,既。가을, 음력 7월, 을해일 그믐에 개기일식이 있었다'


 보통 개기일식이 있었을 경우 日有食之,既 또는 日食既 라고 표현한다.

한나라 때였기 때문에 당시 한나의 수도는 당연히 장안, 지금의 시안(西安)이다. 그럼 이 날 일식의 본그림자는 어디를 지나갔을까.

기원전 80년 음력 7월 1일 개기일식 궤적 (출처 : Eclipsewise.com)
기원전 80년 음력 7월 1일 개기일식 궤적 (출처 : Eclipsewise.com)

 위 그림처럼 달의 본그림자는 장안 근처에도 가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장안에서 부분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그럼 日有食之 라고만 해야지, 왜 끝에 既를 붙인 걸까.

 사마천이나 반고, 사마광 같은 역사가들은 역사서를 쓰면서 어떤 큰 사건의 맨 처음에 이와 같은 천문현상을 먼저 기재하였다. 즉, 대개는 비극인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천변으로 먼저 신호가 온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80년 개기일식 기록 다음에 따라오는 사건은 바로 연왕(燕王) 유단의 모반 사건이다.

 연왕(燕王) 유단(劉旦)은 한 무제의 4남으로 무고의 화로 형인 여태자 유거가 사망한 뒤 다른 아들 중 태자로 뒤를 잇기에 가장 출중한 기량과 적당한 나이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무제는 그를 태자로 세우지 않았고,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이 되어서야 8세의 막내 유불릉(소제)을 태자로 세우고 숨을 거두었다. 한무제가 유단을 태자로 세우지 않은 것은 단 하나, 그냥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다. 무고의 난으로 인해 장안이 피바다가 되었고, 여태자 유거와 그의 일족이 모두 주멸된 상태에서, 유단은 자신이 태자가 될 것이란 마음에 서둘러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장안으로 소환해 달라고 하였고 그것이 한무제의 눈에는 거슬리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어린 황제 유불릉의 고명대신인 곽광, 상관걸, 상홍양, 김일제 등이 서로를 견제하며 통치하기에 이르렀는데, 김일제는 불과 1년 만에 죽고, 상관걸과 상홍양은 한 편이라서, 결국 정치 구도는 곽광 대 상관걸, 상홍양 일파의 대결로 잡히게 된다. 처음에는 곽광과 상관걸이 친분이 있었으나, 상관걸과 황제의 누나인 개장공주가 인사를 청탁하였는데 이를 곽광이 거절하면서 반목이 생기게 되었다. 이 반목은 소금, 철, 술을 국가가 오랫동안 독점하면서 생기게 된 온갖 부작용으로 인해 이를 폐지하고자 하는 곽광과, 폐지를 반대하는 상관걸 간의 논쟁을 통해 가장 크게 벌어지게 된다.

 결국,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 개장공주 등은 연회를 열어 곽광을 죽이고 소제도 폐한 후, 상관걸을 왕으로 봉한다는 조건으로 유단을 황제에 올리고자 역적모의를 하게 된다. 그런데 한서에 의하면 연의 수도인 북경에서 이런저런 변고가 일어나, 유단이 크게 앓았다가 나은 뒤 마음속으로 불안함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즉, 어떤 기이한 사건들로 인하여 연왕 유단이 심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계획했던 반란을 도모하지 못하는 상황이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의 거사에 틈이 생기며 그들의 역적모의가 탄로나게 되었다. 상관걸, 상관안, 상홍양 등은 처형되었고, 개장공주 또한 자결하였는데, 상관씨의 일족이 멸하면서 오직 곽광의 외손녀이기도 한 소제의 황후만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소제는 직접 유단의 잘잘못을 꾸짖는 서신을 보내고, 이를 본 유단은 수치심을 느끼며 신하와 왕후, 부인들에게 사죄하고 목숨을 끊는다. 한서 무오자전에서 위의 기이한 사건들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무지개가 궁중의 우물에 드리우며 우물의 물이 바닥났다. 측간의 돼지 무리가 튀어나오고, 부엌이 무너지며, 까마귀와 까치들이 다투다 죽고, 쥐떼가 전각의 문 앞에서 춤을 추고, 궁궐의 문이 스스로 닫힌 뒤 열리지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성문에 불이 났다. 큰 바람이 성루를 무너뜨리고, 나무 가지를 꺾었으며, 유성이 땅에 떨어졌다' - 한서 무오자전


 여기에 가장 큰 변고인 개기일식까지. 이로써 기원전 80년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개기일식의 본 그림자가 수도가 있는 곳이라 하는 분들은 이 기록에 대하여 답해야 한다.

 한나라의 수도는 북경이었나?

 아니다. 자치통감에서 日有食之,既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 연경(燕京)이었던 북경 쪽이 역사의 주무대였기 때문이고 그곳에서 개기일식을 관측한 기록을 찾아 삽입한 것이다.

 애초에 도읍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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