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의 꿈
정신을 차려보니 매화꽃과 휘파람새, 구름이 그려진 문 앞이었다. 2월의 문이었다.
구름 위로 열쇠가 떠올라 내려앉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여긴 어디지?"
빨강, 주황, 분홍빛의 제라늄 화분들이 있고 여러 화초들이 잘 자라고 있는 예쁜 데크였다.
"우리 엄마도 제라늄 키우는 게 취미인데."
집에서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제라늄이 새삼스러워 한참을 보고 있는데 갓 구운 고소한 빵 냄새가 내 코로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데크 뒤로
[Kim 's 베이커리]란 간판이 보였다.
어릴 적 우리 빵가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맛있는 빵들이 깔끔하고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와~. 다 맛있어 보이는데 뭘 먹을까?'
행복한 표정으로 쟁반에 종이를 깔고 집게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인사말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제빵실에서 젊은 아빠가 갓 구운 빵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
"어?"라는 말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젊은 아빠가 나에게 말했다.
"방금 나온 크림빵이에요. 우리 집 인기 빵 중 하나인데 갓 구워서 더 맛있을 거예요.
이거 먹어보세요."
"아, 네. 그런데 저 기억 안 나세요?"
"네. 처음 보는데요. 저희 빵집에 왔었나요?"
"아... 그게."
<띠리~ 띠리~ 띠리 리리리~>
경쾌한 엘리제를 위하여 벨이 울리며 가게 문이 열리더니 젊은 엄마가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아기는 공갈 젖꼭지를 빨며 아기띠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웃고 있었다.
"여보, 대성이 좀 봐줘요. 내가 빵 정리할게요."
"에구~대성이 왔쪄요? 아빠 보고 싶었쪄요?"
아빠의 애정 넘치는 말투에 나는 닭살이 돋았다.
'윽, 아빠 말투, 개쩌네.'
아빠는 자연스럽게 아기띠를 차고 나를, 아니 두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나를 안아 옮겼다.
"학생, 빵 다 골랐으면 계산할까요?"
"아. 네. 크림빵 두 개요."
돈을 내려고보니 주머니 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지갑은 더더욱 없었다. 난감했다.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감시자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내 옆에서 카드를 내고 있었다.
"여동생? 아님 여자 친구?"
엄마는 감시자와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당황해서 우물쭈물하는 나와 달리 감시자는 자연스럽게 말했다.
"아뇨. 제가 12시간 동안 감시하는 아이예요."
"어머. 감시를 해? 못 미더운가 보구나."
엄마는 나를 좀 모자라는 아이, 아니 말썽 부리는 아이인 양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카드를 주셨다.
"서로 감시하지 말고 믿어줘봐."
"얘가 보기에는 범생이처럼 생겼는데 부모님도 잘 속이고 거짓말도 잘하거든요."
"에고. 부모님을 속이면 안 되지. 그건 진짜 나쁜 거야. 거짓말도 나빠.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고."
옆에 계시던 젊은 아빠가 거드셨다.
"저 그렇게 나쁜 아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보여. 부모는 모든 애정을 쏟아 자식을 키우는데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알면 속이고 거짓말을 하면 안되겠지. 이제부터 하지 마~"
엄마도 나를 보며 진지하게 말하셨다.
'누가 엄마, 아빠 아니랄까 봐.'
나는 억울한 점도 많았지만 딱히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속이고 거짓말 한 건 사실이기 때문에.
가게를 나와 데크에 앉아 크림빵을 먹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크림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혀가 맛을 기억하는지 어릴 때 먹어본 그 맛, 그대로였다.
"음~맛있어. 어릴 때 먹어 본 그 맛이야. 정말 맛있어."
"그랬겠지. 부모님의 애정이 듬뿍 담긴 빵인데."
"애정?! 그래. 외할머니께서 2월 그림의 의미는 애정, 애인이라고 하셨는데. 뜻도 좋고 매화꽃과 새 그림이 예쁘다고 가장 좋아하셨거든."
"그렇구나. 두 번째 열쇠의 의미를 찾은 것 같은데?"
"응?"
나는 잠시 생각을 했다.
'애정, 애인... 애인은 아닌 것 같고. 애정이라면?'
"그래. 부모님의 애정! 자식에 대한 애정이구나!"
정수리의 두 번째 구멍이 닫히며 다시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세 번째 열쇠가 나타났다. 나는 열쇠를 잡았다.
다시 블랙홀로 빠져드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하지만 꿈속 여행에 익숙해지는 건지 어지러움은 조금 약해졌다.
삼월의 꿈
벚꽃이 가득한 문 앞이었다. 열쇠를 들고 있는 손 위로 벚꽃잎이 떨어지며 문이 열렸다.
'3월 그림의 의미가 뭐더라?'
나는 바로 열쇠의 의미를 찾아보려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잔머리 굴리지 마~"
"뭐? 너 혹시 내 생각도 읽을 줄 아냐?"
"그럼. 감시자인데 그런 능력도 없을까 봐?"
"야, 치사하네. 그걸 이제 말하다니."
"뭐가 치사해? 네가 물어보지도 않는데 내가 먼저 말해줄 필요는 없지."
"그래도 내 허락도 없이 생각을 읽는다는 건 개 매너지. 개 나쁜 거야."
"그건 네 생각이고. 그리고 말마다 '개'를 붙이냐? 개가 억울하겠다. 바른말 써!"
솔직히 나보다 어려 보여서 귀엽게 생각했는데
정색을 하며 바른말을 쓰라고 하니 담임 선생님께 야단맞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감시자의 능력을 알게 되니, 엄청 조심스러워졌다.
벚꽃이 활짝 핀 거리였다.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벚꽃길을 천천히 걸었다.
"여보, 대성이 좀 붙잡아요."
뭔가가 내 다리를 잡길래 내려다보니 귀여운 아이가 나의 바지를 붙잡고 있었다.
"대성아, 아빠 다리 아니야. 형아 다리야."
"학생, 미안해~"
엄마와 아빠가 다가와 어린 나를 안아 올리며 사과를 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이가 몇 살이에요?"
"대성이, 몇 살?"
엄마의 다정한 질문에 아이는 손가락 세 개를 들며 말했다.
"세짤"
세 살의 나를 만나다니! 내가 이렇게 작고 귀여웠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엄마랑 아빠랑 산책 나왔구나~"
"네. 우리 대성이 벚꽃 산책 나왔쪄요."
아빠는 대성이의 대변인처럼 혀 짧은 소리로 말하셨다. 닭살이 돋았지만,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으며 어린 나의 깜찍한 손을 잡아보았다.
포동포동한 손등과 꼼지락 거리는 손가락이 나의 손바닥에 닿이자 기분이 묘했다.
'그래. 내 기억 중 생각나는 가장 어릴 적 기억인 것 같아. 부모님과 산책을 나왔는데 꽃이 아주 많았고 떨어지는 꽃잎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지.
그 꽃이 벚꽃이었구나.'
"세 번째 열쇠의 의미는 어릴 적 산책을 했던 기억이야.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릴 적이니까 그 의미가 크겠지? 생애 처음으로 꽃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을 느낀 날이었어.
3월 그림도 산책을 의미하기도 하고. 맞지?"
"그래. 예쁘고 아름다운 기억이네."
머리 밑이 따뜻해지면서 네 번째 열쇠가 나타났다.
"감시자! 여긴 나의 기억과 외할머니가 알려주셨던 화투의 의미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
"맞아. 네 외할머니께서 열쇠를 숨겨놓아서 그래."
"외할머니가?"
"이번엔 빨리 의미를 찾았으니까 하나 알려줄게.
너처럼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에 오게 되면 이승으로 돌아갈 기회를 얻게 돼.
그 기회는 12번, 아니 자신의 나이 만큼의 꿈을 꾸면서 삶의 의미를 얻는 거야. 그 의미는 본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숨겨놓았지."
"그렇구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숨겨놓은 삶의 의미를 찾는거구나!"
그 순간 외할머니와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며 내가 조금은 철이 든 것 같아 으쓱해졌다.
정수리의 세 번째 구멍이 닫히며 다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네 번째 열쇠가 벚꽃잎과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열쇠를 잡았다.
이제는 두려움 없이 남은 꿈들을 여행하며
열쇠의 의미를 얻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