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12-6화 사월과 오월의 꿈

by 해어화
사월의 꿈

4월. 등나무 옆으로 두견새와 붉은 초승달이 그려진 문이 보였다.

네 번째 열쇠를 보여주자 두견새가 울었고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많은 대형 마트였다.

마트는 언제 와도 기분이 좋은 곳이다.

많은 물건들과 먹거리가 있고 특히 시식코너에서 만두, 스팸, 동그랑땡 등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매력이다.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고 나는 주저없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식품코너의 맛있는 음식들을 시식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배가 부르니 기분이 좋~구만! 이제 다른 매장을 구경해볼까?'

"넌 참 단순하구나. 배가 채워지니 금방 활기차지고 세상 편한 얼굴이네."

"응. 사람의 기본 욕구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식욕이야. 맛있는 걸 먹는 기쁨이 얼마나 큰데."

"그렇겠지. 누군 지금 소유욕이 가장 크지만."

감시자의 말에 두리번 주위를 살펴보니 한 아이가 울며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고 있었다.


장난감 매장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로 아이의 떼는 심해지고 있었다.

"안돼. 이건 살 수 없어. 오늘은 장난감 사러 온 거 아니야."

"싫어! 나 이거 사줘. 사달라고!"

엄마와 아이의 실랑이가 팽팽했다.

싸움구경이 재미있겠다 싶어 더 가까이 갔다.

헐~! 어린 나와 젊은 엄마였다.

'내가 저랬다고? 난 순둥이였는데.'

"순둥이는 뭔? 완전 고집불통이구만."

감시자의 말을 젊은 엄마가 들었을까 봐 걱정되었다.

"대성아, 저 누나도 너더러 고집불통이라고 하네.

여긴 마트야. 이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거야. 우리 착한 대성이~일어날까?"

"싫어. 저 누나도 싫어. 저리 가! 난 이거 사준다고 할 때까지 누워있을 거야."

젊은 엄마가 좋은 말로 달랬지만 어린 나는 막무가내였다.

"그럼 그 장난감이랑 여기서 살아.

엄마는 대성이가 좋아하는 고기랑 소시지, 요구르트 사서 집으로 갈 거야."

"난 안가. 엄마 혼자 가! 엄마 필요 없어. 가!"

어린 나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었다.

젊은 엄마는 카트를 돌려 냉장식품 매장으로 갔다.


"아니, 애를 혼자 두고 가면 어떡해. 엄마도."

"달랠수록 더 고집부리니까 그러시지."

"그래도. 아이가 미아가 되거나 실종이 되면?"

"여긴 마트야. 여기저기 cctv가 있고. 네 어머니가 진짜 가시는 걸까?"

감시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옆 통로로 걸어갔다. 어린 나를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감시자를 따라 옆 줄로 이동했다.

감시자의 말대로 젊은 엄마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그럼 그렇지. 엄마가 날 두고 진짜 가겠어?'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어린 나는 한참을 두러 누워있더니 다른 아이들이 장난감을 보러 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장난감은 가슴에 꼭 품은 채로.


"미운 네 살이라더니. 정말 속상해요."

"저 나이땐 고집 피우고 그래요."

"마트에 오면 한 번씩 전쟁을 치러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라 크게 야단도 못 치겠고.

애아빠가 같이 왔으면 울든 떼쓰든 번쩍 안아 집으로 데려갔을 텐데요."

"새댁은 마트 올 땐 꼭 신랑이랑 같이 와야겠네. 아들 고집이 한 고집하니."

"아파트에서도 유명해요. 고집부리기 시작하면 길거리나 현관, 놀이터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러 눕고 떼를 쓰거든요. 말도 막 하고..."

"아이고. 그럼 안되는데. 빨리 저 버르장머리를 고쳐야겠구먼."

"네. 저도 걱정이고 스트레스 많이 받아요.

며칠 전엔 아들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난처한 일도 겪고 요즘 파란만장해요."

"그걸 구설수라고 하지. 구설수에 오르면 쓰나.

좀 전에 새댁에게도 아이가 함부로 말하던데. 엄마가 가장 가깝긴 하지만 막대할 상대는 아니지.

높임말을 쓰도록 가르쳐 봐요. 부부끼리도 쓰면 더 좋고 아이가 보고 배울 테니 그게 "일석이조"지.

그럼 앞으로 구설수도 없을 거야."

"아. 좋은 생각이세요. 좋은 말씀 감사해요."

커피 시식코너에 있는 나이 지긋한 직원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젊은 엄마는 커피를 마셨다.


난 구설수란 말과 뜻을 오늘 알게 되었다.

(*구설수(口舌數)는 말을 잘못해서 어려운 일을 겪는 것을 말한다. 수(數)는 여기서는 '운수'라는 뜻이다. *)


한 시간쯤 더 흐르자 네 살의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장난감을 제 자리에 놓아두고 걸어갔다.

엄마가 보이지 않자 겁을 먹었는지 아님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어서 덤덤한 건지 어쨌든 뚜벅뚜벅 걸어 계산대 쪽으로 가고 있었다.

젊은 엄마는 걸어오는 어린 나를 보더니 엄지척을 보이며 말했다.

"김대성! 장난감 두고 씩씩하게 걸어오네요. 멋져요."

"응. 나 멋져요."

"대성이, 뭐 먹고 싶어요? 엄마가 대성이 씩씩하고 멋지게 행동해서 간식 두 개 사줄게요."

"정말! 와~! 그럼 나 초코과자랑 아이스크림요."

어린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한 양이 되어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내가 4살 때부터 높임말을 사용했구나."

그러고 보니 엄마와 아빠는 서로 반말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여보, 밥 먹어요. 식탁으로 오세요."

"그래요. 알겠어요." 등


나도 그랬다. 요즘은 말이 짧아지고 있지만

다시 높임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월 그림은 구설수를 뜻해. 이번 열쇠의 의미는 말조심하며 살라는 같아! 또 바른말과 높임말을 쓰라는?"

"너 생각보다 똑똑한데. 여전히 어릴 적 고집은 남아있는 것 같지만."

"칭찬이냐? 욕이냐?"

"네가 생각하는 그거."

감시자가 얄미웠지만 맞는 말이었다.

난 고집이 세다.


다섯 번째 열쇠가 눈앞 진열대 위에 보였다.

이젠 자연스럽게 다음 문앞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꿈을 이동하는 공간에서도 잘 적응하는 나를 보며 나의 뛰어난 운동신경이 감사했다.


오월의 꿈

5월. 난초가 그려진 문이다.

열쇠를 보여주자 기다란 난초의 잎들이 흔들리며 문이 열렸다.



낯익은 가게 앞이었다.

"어, 여기는!"

외할머니의 국수가게였다.

'외할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잔치국수, 정말 맛있었는데...'

국수가게로 얼른 들어갔다. 외할머니!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외할머니께서 계셨다.

"어서 와요. 여기 앉아요."

"네."

"뭐 먹을 거요?"

"당연히 잔치국수죠. 할머니 국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거든요."

"우리 집 단골인가 보네. 내가 손주 돌본다고 잠시 쉬었는데. 그러고 보니 얼굴이 낯이 익네."

"네. 어릴 때부터 자주 먹었어요."

"그래? 조금만 기다려요. 맛있게 해 줄 테니."


외할머니는 주방으로 가셔서 국수를 삶아 찬물에 여러 번 헹구셨다. 그리고 큰 사발에 국수를 담고 멸치육수를 붓고 여러 고명을 올리셨다.

잔치국수는 금방 완성되었다.

"여깄어. 식탁 위 양념장 넣어 맛있게 먹어."

외할머니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크게 한 입 먹었다.

"정말 맛있어요. 맛이 그대로예요.

진짜 진짜 먹고 싶었거든요."

"맛있다니 다행이네. 천천히 먹어요."

외할머니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곤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서너 젓가락질로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할머니, 한 그릇 더 주세요."

"학생이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국수를 넉넉히 주었는데, 게 눈 감추듯 먹은 걸 보니."

"네. 외할머니 국수는 매일 두 그릇씩 먹으라고 해도 먹을 수 있어요."

"허허. 나를 외할머니라고 부르는 걸 보니 우리 손자 같네. 우리 손자는 5살인데 내가 해주는 국수를 제일 좋아해. 먹이는 보람을 느끼지."

"네. 할머니 손자의 최애 음식일 거예요."

"최애? 최애 음식이 뭔데?"

"아, 최고로 좋아하는 음식이란 뜻이에요."

"요즘 학생들이 쓰는 말인가 보네."

외할머니는 웃으시며 두 번째 잔치국수를 주셨고

이번엔 잔치국수를 먹으려니 울컥하며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외할머니께서는 주방에 들어가셔서 내가 우는 걸 보지 못했다.


국수를 다 먹고 가게 안을 살펴보았다.

외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국수가게를 그만 두셔서 나의 기억에도 국수가게가 어느 정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할머니, 늘 궁금했는데 벽에 왜 화투 그림을 붙여놓았어요?"

"국수가게니까 국수를 의미하는 5월 그림을 붙여두었고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라고 12월 그림을 붙여두었지. 색도 알록달록하고 얼마나 예뻐. 아, 또 우리 손주가 화투그림을 좋아해서."

"그런 의미였구나. 가게와 잘 어울려요. 예뻐요."

벽에 걸린 난초 그림을 보며 그제야 생각났다.


'그래. 5월 그림은 국수를 의미해. 국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데 왜 요즘은 먹지 않았을까? 외할머니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 담긴 음식인데.'

생각해보니 나는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피하려고 국수를 잘 먹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잔치국수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이번 열쇠의 의미는 음식과 음식에 담긴 기억의 소중함인 것 같아. 난 외할머니가 해주신 국수가 늘 그리웠어. 하지만 아닌 척하며 잔치국수까지 멀리했던 것 같아.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감시자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사람들마다 추억이 담긴 음식들이 있고 좋아하는 음식들이 있지. 단순히 음식의 맛 때문에 음식을 찾는 게 아니라 그 음식과 관련된 사람들, 경험들이 소중하고 생각나기 때문이 아닐까?"

"응. 동감이야. 너에게도 그립고 소중한 음식이 있어?"

"호떡!"

"호떡 맛있지. 호떡에 담긴 사연은? 뭐야?"

나는 궁금해서 감시자를 재촉했다.

"말하고 싶지 않아!"

"호떡"이라고 대뜸 말하더니 이번엔 단호하게 대화를 끊어버리는 차가운 말투에 당황스러웠지만

'저 아이도 뭔가 사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섯 번째 열쇠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외할머니와 헤어질 시간이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계산대 앞에 서 계시는 외할머니를 꼭 안았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외할머니는 나를 밀쳐내지 않으시고 미소를 지으며 꼭 안아주셨다.

"학생, 또 국수 먹으러 와~."


'사랑해요. 외할머니! 저 대성이에요.'

울컥하는 울음을 참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잠시 어지럽고 깜깜하더니

일곱 번째 문이 눈앞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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