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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어화 Oct 16. 2021

집콕 소년-4화. 각자의 표현

두 누나들의 관심이 나에게 쏟아지자 나는 이 순간을 피할 돌파구가 필요했다.

만만한 지후형의 벽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와~지후형. 뭐야? 미국에서 살다왔어?"

지후형의 벽면은 한마디로 멋짐 폭발이었다.

두 누나도 물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머. 정말 프로페셔널하다. 전문가급인걸!"

"나도 이런 벽화는 다큐나 뉴스에서 본 것 같아."

지후형은 검은색의 스프레이로 "Alex"라고 뿌리고는 스프레이를 내려놓았다.

"알렉스가 누구야?"

나의 질문에 지후형은 웃으며 자신의 영어 이름이라고 했다.

"형, 진짜 미국에 살았었구나! 그렇지?"

"응. 작년에 한국으로 어왔어. 맨해튼에 살았었고."

"어쩐지. 어메~리카 느낌이 팍팍 나더라고."

나는 100점 맞은 아이처럼 어깨가 솟아올랐다.

"미국에 살다왔다고 다들 이런 멋진 벽화를 그리지는 못해. 이건 예사로운 벽화가 아니야. 그리고 이런 그림을 뭐라 하던데..."

"그래피티!"

"그래. 그래피티!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들어보긴 했어."

지후형의 한 마디아름이 누나는 급 관심을 보이며 아는 척을 했다.

"저도 전문가급은 아니지만 아는 수준에서 간단히 설명해 드릴게요.

그래피티(graffiti)는 스프레이로 그려진 낙서 같은 문자나 그림을 뜻하는 말로 'spraycan art' 'aerosol art'라고도 해요.

유럽에서는 '거리의 예술(street art)'로서 자리를 잡았는데 그래피티가 예술로서 등장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라고 하고요.

현대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콘브레드(Cornbread) 쿨 얼(Cool Earl)이라는 서명(tag)을 남긴 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요.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콘브레드가 학창 시절에 신시아라는 여학생을 좋아하게 되는데 어떻게 하면 마음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거리의 벽마다 '콘브레드는 신시아를 사랑해'라고 낙서를 쓰고 다녔다고 해요.

이 낙서를 시작으로 뉴욕의 브롱크스 거리에서 낙서화가 범람하면서 그래피티 아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요. 낭만적이죠?"

"어머, 그런 로맨틱한 낙서에서 시작된 예술이라니 더 멋진걸!"

아름이 누나는 의대생이지만 순정파 소녀 같았다.

그런 누나의 반응에 지후형도 신이 난 것 같았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누나, 키스 해링 알아요?"

"응. 알지."

"요즘 유명한 그래비티 아티스트 중 한 명이예요."

나는 지후형의 원어민급 발음에 놀라고 또 해박한 미술 지식에 또 놀랐다.

"형, 나도 키스 해링은 알아. 미술책에도 나오고 색칠하기도 해 봤어. 그런데 그래비? 뭐라더라? 그런 화가인 줄은 몰랐어."

"그.래.비.티.가 어려우면 그냥 벽화가라고 불러도 돼. 같은 말이니까.

그리고 키스 해링의 그림만 본 사람들은 벽화가인 줄 잘 몰라. 힘찬이 너만 그런 거 아냐."

"그래. 나도 오늘 처음 알았어. 그래비티라는 말도 키스 해링이 그래비티 아티스트라는 것도."

민지 누나가 거들어줘서 다행히 부족한 나의 영어 듣기 실력은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형은 벽화가가 될 거야?"

나의 질문에 지후형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니. 난 소셜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 그래비티 작품들을 수집하있고 연습 정도로만 그리는 수준이야. 사실 낙서나 벽화도 재밌지만 환경문제에 더 관심이 많거든."

"그럼 환경운동가?"

"비슷해. 환경을 구하는 과학자! 그래서 과학고에 진학했어."

"뭐? 과학고는 진짜 공부 잘하는 사람만 갈 수 있다던데. 형, 대단해."

"아냐. 나보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도 많아. 한국은 경쟁 구조라 과학고를 다녀보니 상대적으로 내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더라고."

의대생인 아름이 누나는 경험자라 공감하는 끄덕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알지. 그 느낌! 나도 의대에 진학하려고 영재고를 다녔거든."

"우와~ 두 분 다 스펙이 장난 아니네요."

나도 모르게 존경과 부러움의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는지 훈이 아저씨도 열심히 듣고 있었다.

훈이 아저씨는 "음. 음!" 하며 주의를 끄는 소리를 냈다.

"이야~ 이건 뭐예요?"

먹물로 적힌 수많은 데이터가 적혀있었다.

SF영화를 보면 알파벳과 숫자들이 막 쏟아져내리는 장면처럼.

"응. 가 늘 접하고 있었는 알고리즘들과 코드, 명령어 등등."

아저씨는 이제야 표정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냥 이집트 벽에 그려진 고대 언어를 보는 느낌이랄까?"

민지 누나의 말에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 응대해 주었다.

"몰라야지. 모두가 이걸 알면 내가 필요 없지."

"이런 데이터를 벽면 가득 쓸 정도의 실력자인데 소개할 때는  전산팀에서 일했지라고 과거형으로 말했어요?"

"음. 그건... 지금은 그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야."

"왜요? 물어봐도 돼요?"

지후형의 질문에 아저씨는 벽면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잘 나가는 프로그래밍 기사였어. 전산 관련 쪽에서는 나름 유명한. 그런데 갈수록 AI 기술이 발달하면서 방대한 데이터를 저장하고 그 데이터로 스스로 학습까지 하니 인간이 이길 수 있겠어?

AI를 만든 건 인간이지만 그 창조물이 인간의 능력보다 우위에 있게 된 거지."

"그래도 인간이 기계보다는 우위죠."

"아냐. 나도 그걸 증명해보려고 했지만 그렇지 않더라고. 인간은 한계가 있어.

쉬운 예를 들면 인간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는 한계가 있지. 그래서 누구나 죽게 되고. 인간은 그 생명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가며 살아가지만 유한한 존재야.

하지만 AI는 스스로 학습하게 되면서 영원히 사는 우월한 존재? 아니 우월함되었어. 그걸 알게 되니 나의 미래가 없어졌어. 우리 정보와 삶이 다 수집되고 있고 곧 인간도 그 AI 시스템 속에 갇히게 될 거야."

"터미네이터  영화 같네요. 그렇다고 아저씨처럼 너무 낙담하거나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살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넌 존 코너처럼 말하는구나. 하지만 더 살아봐. 그리고 나처럼 한계에 다다르고 좌절감을 맛보게 되면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 들걸?"

"그건 모르죠. 제가 그런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아저씨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죠."

지후형과 훈이 아저씨의 의견은 팽팽했다.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를 깨트린 건 초등학생인 찬우였다.

"아저씨~, 형, 누나들~ 여기 좀 봐요!"

천정에서 찬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찬우가 천정에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찬우는 해맑은 얼굴도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찬우 너머로 보이는 벽면에는 커다란 스마트폰이 그려져 있었다. 까만 테두리가 천정의 네 모서리에 칠해져 있었고 화면 속에는 여러 가지가 그림이 크레파스로 알록달록 색칠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학생의 그림 같은 천정이었다.

"찬우야, 네가 설명해봐."

나는 찬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설명? 그냥 난 내가 좋아하는 내 폰을 그렸어요.

내 폰에는 나랑 우리 가족, 친구들의 생활이 사진으로 저장되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들이 폰에 가득하거든요. SNS에서 내 생각도 나누고. 나를 따로 나타내지 않아도 내 폰만 있음 될걸요?"

"찬우 말이 맞네. 찬우는 휴대폰을 정말 좋아하나 봐." 아름이 누나의 말에

"네. 저의 베프예요. 베스트 프렌드!"라며 찬우는 좋아했다.

"찬우가 휴대폰에 진심이네. 그런데 베프는 휴대폰이 아니라 친구여야 하지 않아? 4학년인데."

민지 누나는 찬우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저 친구도 많아요. 경훈이, 지호, 성민이, 아라, 예은 등등"

"그럼 다행이고. 휴대폰을 그렸길래 걱정했지."

"여기 친구들도 그렸는데요."

찬우는 천정 한쪽을 가리키며 머쓱한 듯 웃었다.

우리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졸라맨처럼 가느다란 선에 팔, 다리가 그려져 있고 둥근 얼굴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인정, 인정해. 친구들이 많네. 오해해서 미안해~"

"제 그림이 좀 그렇죠? 사람을 그림으로 그리는 건 어려워요. 그림 솜씨는 없지만 전 열심히 그린 거예요!"

우리는 찬우의 벽면을 보며 실컷 웃을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각자의 현실에서 한걸음 떨어져 모두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

[다음 방으로 이동하십시오.]

우리는 다 같이 휴대폰 알림을 확인하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서먹함은 사라져 있었다.


하얀 방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여기에 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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