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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어화 Oct 16. 2021

집콕 소년-6화. 버리기

통로를 따라 걸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그리고 방이 보일수록 눈이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세 번째 방은 온 사방이 초록색의 담쟁이 잎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싱싱한 담쟁이 잎들이 벽을 타고 뻗어있어서 싱그러움과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우와~여기는 식물원 같아요!"

찬우가 감탄하며 말했다.

"시멘트 건물 속에 갇혀 살다 이 방을 보니 숲 속에 와 있는 것 같네."

훈이 아저씨의 말에서 초록의 담쟁이 잎들로 인해 마음의 안정감을 찾았음을 알 수 있었다.

"자연과 아파트의 공간이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아요. 환경과학자가 꿈인 저에게는 너무 멋진 공간으로 보여요."

"의과대학이나 병원에 이런 초록의 푸르름이 가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물 내 옥상 정원도 있고 곳곳에 쉼터도 있지만... 병원은 사실 숨 막히는 곳이거든요."

"정말 아름답고 멋지네요. 힐링이 되네요!"

민지 누나의 말에 아름이 누나는 바닥에 드러누우며  힐링을 제대로 느껴보자고 했다.

우린 모두 드러누워 온 몸으로 맑은 공기를 마시며 힐링을 즐겼다.


"띵~"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10가지를 적으세요. 그중 하나씩 버립니다.]


'가장 소중한 것?'

나는 알림 문자를 확인하며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때 나의 앞에 10개의 잎이 달린 담쟁이 덩굴이 바닥에서 뻗어올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하나씩의 담쟁이 덩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이트 수정펜이 나타났다.

"어, 이건 볼펜으로 쓴 글씨를 지울 때 쓰는 펜이네." 나는 오래간만에 보는 수정펜이 반가웠다.

"학창 시절에 수정펜으로 나뭇잎에 글을 적었었는데 여기서 이런 걸 할 줄이야?"

민지 누나는 과거로 돌아간 듯 수정펜을 흔들더니 뚜껑을 열고 담쟁이 잎에 글을 적어나갔다.

우리도 민지 누나를 따라 수정펜을 흔들었다.

"따닥따닥따닥~" 수정펜 속의 쇠구슬이 플라스틱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수정펜은 준비되었고 나는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했다.

[생명]

'내 생명이 가장 소중하지.'

[가족]

'가족도 소중하고'

[게임]

'내 삶의 즐거움!'

[]

'용돈도 소중하고 돈은 많으면 좋으니까~'

[음식]

'음식이 없으면 굶어 죽을 테니'

[공기]

'아, 공기도 없음 죽고... 그럼 물도 소중하고 불도 소중하고. 소금도 소중한데. 너무 많은데? 뭐라고 적지?'

음식을 적자 공기가 떠올라 공기라고 적었는데 그러니 없으면 안 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남은 잎은 네 개인데 그런 것들로 다 채우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과학시간에 배웠는데... 지후형!"

나는 과학고에 다니는 지후형에게 물었다.

"형, 공기랑 물, 불, 소금 같은 걸 한 단어로 뭐라고 해?"

"환경요소. 환경요소에는 생물적 요소와 비생물적 요소가 있는데 비생물적 요소에 해당돼."

"그렇구나~과학시간에 들은 것 같은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환경요소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쓰려고?"

"응. 공기랑 물, 불 등 환경요소가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으니까."

나와 지후형의 말을 듣고 있던 아람이 누나가 웃으며 말했다.

"너는 너의 생명과 관련된 것들만 생각하는구나. 다양하게 생각해봐. 넓고 깊게."

"넓고 깊게?"

"응. 인간만이 가진 소중한 것들!"

아람이 누나는 말을 끝내자 담쟁이 잎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이제 네 잎만 쓰면 되는데... '

나는 내가 적어놓은 단어들을 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기억]

'그래. 가족이랑 친구들과 즐거웠던 기억도 소중해. 나도 어릴 땐 친구들이 많았는데. 단짝 친구 민우도 있었고. 민우는 어떻게 지낼까?'


민우는 초등학교 친구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같은 반이어서 우리는 늘 붙어 다녔고 서로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였다.

하지만 민우는 5학년이 되어 서울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가서도 한동안 연락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 연락이 뜸해졌다. 민우의 전학도 있었지만 게임과 유튜브, 웹툰 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건강]

'건강, 중요하고 소중하지.'

[시간]

'시간은 금이라는 말이 있지.

시간, 소중하지. 그럼!'

[강힘찬]

'뭐니 뭐니 해도 난 소중하니까~'

10가지를 다 적고 나니  스스로가 너무 대견했다.


그때 나의 담쟁이 덩굴이 위로 쭉 올라가더니 천정에 닿였고 담쟁이 잎들이 점점 커지면서 내가 쓴 글자가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내 담쟁이 줄기 옆으로 다른 줄기들도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여섯 개의 줄기에 달린 10개의 담쟁이 나뭇잎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예쁘고 멋진 수직 블라인드였다.

"우와~멋지다!"

감탄사는 역시 찬우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우리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하나하나의 잎들을 살펴보았다.


생명, 가족이란 단어는 모두에게 적혀있었고 찬우의 애착 담요,

지후형의 공부,

훈이 아저씨의 자신감,

아름이 누나의 믿음,

민지 누나의 사랑이란 단어가 참신하였다.


아름이 누나가 나에게 걸어왔다.

"힘찬아, 기억이란 단어가 있네."

"네. 누나가 인간만이 가진 소중한 걸 생각해 보라고 해서요. 누나 말대로 좀 더 넓고 깊게 생각했더니 가족, 친구들과의 소중한 기억이 떠올랐거든요."

"그래? 힘찬이 제법이네."

아름이 누나는 '기억'이란 단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

[지금부터 소중한 것들 중 하나만 남겨두고 하나씩 버리십시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슥하는   몸짓을 했다. 모두가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찬우가 담쟁이 잎들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레고 시리즈! 소중하지만 버려. 또 사서 조립하면 되니까."

그러자 레고 시리즈가 적힌 담쟁이 잎이 누런색으로 변하더니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그냥 가리키면서 말하면 되는구나!'

이런 깨우침은 나만이 아니었다.

각자의 바닥으로 담쟁이 잎들이 낙엽 지듯이 떨어졌다.


나는 돈, 게임, 음식, 시간, 공기, 건강, 기억, 가족, 생명을 차례대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하나 가리킬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름 생각하고 고민하며 쓴 소중한 단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본다는 것이...

나는 마지막까지 강힘찬을 버릴 수 없었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소중한 것들에 비하니 그리 소중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왠지 허무했지만 "강힘찬"이란 내 이름을 남겨두고 보니 내가 의외로 멋진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찬우는 엄마

지후형은

훈이 아저씨는 믿음

아름이 누나는 생명

민지 누나 사랑을 남겨놓았다.



"~"

[남겨놓은 한 가지를 버리지 못한 이유를 말하세요. ]


역시나 가장 어리지만 당찬 찬우가 먼저 말했다.

"저는요. 나의 목숨과 엄마를 두고 엄청 생각했는데... 난 나보다 엄마가 더 좋고 소중해요. 엄마가 없음 나도 못살아요. 그래서 엄마를 버리지 못했어요."

찬우는 초등학생 답지 않게 담담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찬우의 말에서 우리는 찬우가 자신보다 엄마를  사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찬우가 시작해서인지 어린 나이순으로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다음으로 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생명과 저, 강힘찬을 두고 고민했는데 끝까지 저를 못 버리겠더라고요. 그냥 나, 내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후형은 마라톤 발표를 하듯이 자연스레 바통을 받아 설명했다.

"저는 제 꿈을 위해 가족들과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가족보다 꿈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고 꿈이 없는 나 자신을 생각할 수 없어서 꿈을 끝까지 남겨놓았습니다."

자신의 꿈이 분명한 지후형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저는 좌절을 하고 나서 후회를 하며 살았습니다. 이미 나에겐 소중한 것들이 많았지만 후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막다른 길에 도착했을 때...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여러 분들과 함께 하다 보니 나 자신을 믿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믿음을 끝까지 버리기 싫어서 남겨두었습니다."

훈이 아저씨의 말에 우리는 그동안 훈이 아저씨가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듯 무뚝뚝하게 말하고 노숙자처럼 의욕 없이 행동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는 생명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어요. 사실 의과대학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고 배울 것도 외울 것도 너무 많아서 부담도 컸고 너무 바빠서 잠잘 시간도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어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수능을 쳐서 다른 과로 대학 진학을 해야 하나 고민도 했는데 마지막까지 생명을 놓지 못하겠더라고요. 나를 믿고 자신의 생명과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 떠올랐거든요. 내가 의대 4년을 허투루 다닌 건 아니더라고요."

똑똑한 의대생이지만 늘 투덜대고 새침하던 아름이 누나가 지금 완전히 달라 보였다.

마지막으로 민지 누나가 말을 시작했다.

"저는 지금 한창 사랑에 빠져 있어요. 나와 나의 가족도 사랑하고 스튜어디스라는 직업도 사랑하고

무엇보다 내 마음속의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프러포즈를 하려고요. 그래서 사랑을 버리지 못했어요."

우리는 모두 민지 누나를 보며 축하의 박수를 쳤다.

"누나, 프러포즈한다는 말. 정말이에요?

드라마 여자 주인공 같아요."

나는 물개 박수를 치며 누나의 멋진 말에 격한 공감을 보냈다.

민지 누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리는 큐브 방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을 정도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 알림문자가 왔다.


"~"

[다음 방으로 가십시오.]


이제는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다음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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