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 같이 하얀 방, 아니 각자의 표현으로 화려해진 정육면체의 방을 뒤로하고 두 번째 통로로 나왔다.
처음 통로를 걸으며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지고 한 걸음씩 기대감을 가지게되었다.
이번엔 나 혼자가 아닌 형과 누나들, 동생 찬우가 함께 걸어가고 있었고다음 방은 어떤 방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앞쪽에 두 번째 방이 보이기 시작했다.
찬란한 햇살같이 화사했다. 그 이유는 방에 도착해 보니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방은 개나리와 해바라기 등 노란색의 꽃잎들로 도배되어 있는 방이었다.
그때 지후형이 뭔가를 알아낸 듯 말했다.
"첫 번째 방은 하얀색이었고 이번 방은 노란색이네요. 큐브의 색깔과 같아요.
또 각방이 정육면체이고요.
정말 큐브 방이 맞아요."
"그러네. 처음 알림 문자에 큐브 방에 온 걸 환영한다고 했었어. 과학고에 다니는 수재 아니랄까 봐 역시 똑똑하네."
민지 누나가 지후형을 칭찬했다.
"아니에요.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늘 큐브 맞히기를 해서 큐브가 익숙할 뿐이에요."
"겸손하기도 하지. 형! 내 방에도 큐브가 있는데 난 큐브 색깔이 뭔지 생각도 않나. 아니 생각이란 걸 안 해. 내 큐브도 뒤죽박죽인 상태이지만 사실 내 머릿속도 그런 거지. 큭~!"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지후형이 대단하다고생각했고 상대적으로 나와 비교가 되어서 순간 썩소(썩은 미소)를 보였다.
"누구나 큐브가 하나쯤 있지 않나? 나도 있지만 색깔까지 기억할 만큼 관심이 높진 않아. 어느 날부터 잠을 잘 시간도 없는데 큐브가 뭐 중요했겠어. 그냥 장식장에 넣어두었지."
아름이 누나의 말에 훈이 아저씨도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나도 한때는 큐브에 꽂혀서 동영상 보며 연습했었지."
"난 학교 방과후 수업에 큐브반이 있어서 배우고 있어요. 2 × 2 큐브 배우고 있거든요. 곧 3 × 3 큐브로 넘어갈 것 같아요."
찬우도 큐브에 관심이 많은지 신나게 말했다.
"띵~"
[나의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것들)을 적으세요.]
알림 문자를 확인하자 앞쪽 벽면의 중앙 꽃잎들이 양쪽으로 벌어지더니 그 사이로까만 세로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두 개의 대각선이 더 그어졌다.
키보드의 별표 모양 같았다. 그리고는 각 선의 끝을 연결하는 선이 그려지더니 정육각형이 그려졌고6개의 정삼각형 공간이 만들어졌다.
노란 꽃잎들 가운데 큰 벌집무늬 하나가 또렷하게 보였다.
우리는 각자의 칸을 선택했다.
"저 위칸은 너무 높은데."
훈이 아저씨가 낮은 쪽의 두 칸을 찬우와 나에게 양보하고 위칸을 선택했지만 난감한 눈치였다.
"아저씨 다리가 쭉 늘어나면 좋을 텐데요."
찬우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가제트 형사처럼 말이야. 너흰 가제트 형사 모르지? 내가 어릴 땐 엄청 인기 많은 만화였거든."
훈이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다들 모른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그 만화에서 가제트 형사가 어떻게 하는데요?"
찬우의 질문에 훈이 아저씨는 "가제트 팔! 가제트 다리!"라고 외쳤다. 콧소리도 아닌 특이한 목소리였다. 분명히 만화 속 가제트 형사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 같았지만 우리는 본 적이 없기에 비교를 하지는 못했다.
아저씨의 외침에 팔과 다리가 쭉 늘어났다.
다들 놀랐지만 아저씨의 모습이 괴기스러우면서도 신기했다.
"난 저런 모습 싫은데...힘찬아, 누나랑 자리 바꿀까?"아름이 누나의 부탁에
"네. 저는 해보고 싶어요."라며 바로 가제트 팔과 다리를 외쳤고 나는 늘어난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정말 이런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변신에 옆에 있던 찬우도 민지 누나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했다.
이렇게 육각형의 아래쪽 두 칸은 아름이 누나와 민지 누나가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자리를 잡자 벽에서 펜이 나왔다.
익숙한 펜이었다. 패드나 태블릿용 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면에 각자의 "소확행"을 적었다.
나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1. 내 방에서 게임할 때 행복하다.
2. 게임을 하며 컵라면을 먹을 때 행복하다.
3. 게임에서 레벨이 오르거나 아이템을 얻을 때 행복하다.
4. 금요일 저녁이 되면 행복하다.
5. 주말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날 때 행복하다.
6. 학교 숙제가 없는 날 행복하다.
7. 내가 좋아하는 고깃집에서 외식을 할 때 행복하다.
8. 내가 좋아하는 웹툰을 볼 때 행복하다.
9.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행복하다.
10. 방학식날이 되면 행복하다.
11. 명절이나 생일날 용돈을 받을 때 행복하다.
12. 웃기는 예능프로그램을 볼 때 행복하다.
13. 하교를 하고 내 방 침대에 벌러덩 누울 때 행복하다.
14. 거품목욕을 할 때 행복하다.
15. 편의점에 갈 때 행복하다.
16. 맛있는 걸 먹을 때 행복하다.
17. 가족여행을 가려고 여행가방을 쌀 때 행복하다.
18. 갓 지은 쌀밥에 갓 구운 햄을 올려 먹을 때 행복하다.
19. 츄츄를 만난 날, 함께 한 날들이 행복했다.
20. 새 옷이나 운동화를 살 때 행복하다.
'또 뭐가 있지?'
스무 개쯤 적으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아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거밖에 안되나? 더 많은 것 같은데.
아, 맞다. 그것도 있지?'
다시 글을 적으려 하자 펜이 작동하지 않았다.
"아이씨! 왜 이래? 왜 안 적히지?"
나도 모르게 "아이씨"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흠칫 놀라 주변을 힐끗 쳐다보았다.
훈이아저씨와 아람이 누나는 이미 바닥에 앉아 있었다.
나의 팔과 다리가 원래의 길이로 돌아왔다.
"넌 많이 적은 거야. 난 10개쯤 적고는 생각나는 게 없어서 잠시 멈췄더니 펜이 적히지 않더라고."
아름이 누나가 20개나 적었다며 나를 칭찬했다.
"그렇죠! 저도 더 쓰고 싶었는데 펜이 안 나오더라고요."
나는 펜을 쳐다보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잠시 후 지후형과 민지 누나, 찬우도 펜이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지후형과 민지 누나는 정말 많이 적었네요.
아싸, 그래도내가 3등이다!"
찬우가 갑자기 등수를 매기는 바람에 다들 본능적으로 자신의 등수를 매겼다.
나는 4등이었다. 나쁘진 않았다.
"찬우야, 등수를 매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개수가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내용도 중요하거든."
민지 누나의 친절한 말에 찬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마음속으로 등수를 매긴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다른 분들의 소확행은 무엇인지 볼까요?"
지후형은 모범생이 아니랄까 봐 차근차근 우리들의 소확행을 읽어나갔다.
"와~재밌겠다!"
찬우의 우렁찬 목소리에 우리도 덩달아 들뜬 기분이었다.
"아, 맞다! 이건 나의 소확행이기도 한데."
"와~이건 정말 멋진 소확행이다!"
나는 다섯 면의 소확행을 읽으며
내가 놓친 것들에는 안타까움을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는 감탄을
자아내며 읽어나갔다.
소확행 목록들을 읽어나가며 점점 행복감으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모두의 표정은 미소 짓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아니 이미 행복한 상태였다.
"힘찬아, 너의 소확행에는 친구가 나오지 않네?"
지후형의 말에 나는 나의 목록을 다시 쭉 훑어보았다. 정말로 친구란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네요..."
"친구보다 게임이 많네. 조금 걱정되기도 하지만, 괜찮아!이제부터 친구도 사귀고 친구와 소확행도 만들면 돼. 지금도 늦지 않았어."
지후형의 따뜻한 말이 위로가 되었다.
"아휴~나의 소확행에는 음식이 주는 행복이 전혀 없네. 그냥 바쁘니까 대충 때우는 한 끼라는 생각에. 나도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소확행을 느낀 적이 있는데 전혀 생각이 안나더라고."
아름이 누나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말했다.
"나도 그래. 다른 사람들의 소확행들을 읽고 내 목록을 보니 나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들을놓치며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훈이 아저씨도 담담하게 말을 했다.
"그래요. 사람은 완벽하지 않거든요.
좋은 기억은 까먹고 나쁜 기억만 떠올리기도 하고. 내 주변에 행복이 널려 있는데 먼 곳의 행복만 쫓아다니기도 하고."
민지 누나의 철학적인 말에 찬우도 거들었다.
"맞아요. 우리 선생님도 그런 말을 해줬어요. 운동장에서 식물 관찰 수업을 했을 때요.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고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인데 사람들은 네 잎 클로버만 찾느라 행복을 뜻하는 세 잎 클로버는 거들떠보지 않는다고요. 우린 행복을 가지자며 그곳의 많은 세 잎 클로버 중 예쁜 것을 하나씩 골라 책갈피를 만들었거든요. 아직도 그 책갈피를 갖고 있는데 세 잎 클로버를 볼 때마다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떠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