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가족이랑 친구들과 즐거웠던 기억도 소중해. 나도 어릴 땐 친구들이 많았는데. 단짝 친구 민우도 있었고. 민우는 어떻게 지낼까?'
민우는 초등학교 친구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같은 반이어서 우리는 늘 붙어 다녔고 서로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였다.
하지만 민우는 5학년이 되어 서울로 전학을 갔다. 전학을 가서도 한동안 연락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 연락이 뜸해졌다. 민우의 전학도 있었지만 게임과 유튜브, 웹툰 등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건강]
'건강, 중요하고 소중하지.'
[시간]
'시간은 금이라는 말이 있지.
시간, 소중하지. 그럼!'
[강힘찬]
'뭐니 뭐니 해도 난 소중하니까~'
10가지를 다 적고 나니 나 스스로가너무 대견했다.
그때 나의 담쟁이 덩굴이 위로 쭉 올라가더니 천정에닿였고 담쟁이 잎들이 점점 커지면서 내가 쓴 글자가 크고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내 담쟁이 줄기 옆으로 다른 줄기들도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여섯 개의 줄기에 달린 10개의 담쟁이 나뭇잎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예쁘고 멋진 수직 블라인드였다.
"우와~멋지다!"
감탄사는 역시 찬우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우리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하나하나의 잎들을살펴보았다.
생명, 가족이란 단어는 모두에게 적혀있었고 찬우의애착 담요,
지후형의 공부,
훈이 아저씨의 자신감,
아름이 누나의 믿음,
민지누나의 사랑이란 단어가 참신하였다.
아름이 누나가 나에게 걸어왔다.
"힘찬아, 기억이란 단어가 있네."
"네. 누나가 인간만이 가진 소중한 걸 생각해 보라고 해서요. 누나 말대로 좀 더 넓고 깊게 생각했더니 가족, 친구들과의 소중한 기억이 떠올랐거든요."
"그래? 힘찬이 제법이네."
아름이 누나는 '기억'이란 단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띵~"
[지금부터 소중한 것들 중 하나만 남겨두고 하나씩 버리십시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슥하는 몸짓을 했다. 모두가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찬우가 담쟁이 잎들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레고 시리즈! 소중하지만 버려. 또 사서 조립하면 되니까."
그러자 레고 시리즈가 적힌 담쟁이 잎이 누런색으로 변하더니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그냥 가리키면서 말하면 되는구나!'
이런 깨우침은 나만이 아니었다.
각자의 바닥으로 담쟁이 잎들이 낙엽 지듯이 떨어졌다.
나는 돈, 게임, 음식, 시간, 공기, 건강, 기억, 가족, 생명을 차례대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나하나 가리킬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름 생각하고 고민하며 쓴 소중한 단어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본다는 것이...
나는 마지막까지 강힘찬을 버릴 수 없었다.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소중한 것들에 비하니 그리 소중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왠지 허무했지만 "강힘찬"이란 내 이름을 남겨두고 보니 내가 의외로 멋진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찬우는 엄마를
지후형은 꿈을
훈이 아저씨는 믿음을
아름이 누나는 생명을
민지 누나는사랑을 남겨놓았다.
"띵~"
[남겨놓은 한 가지를 버리지 못한 이유를 말하세요. ]
역시나 가장 어리지만 당찬 찬우가 먼저 말했다.
"저는요. 나의 목숨과 엄마를 두고 엄청 생각했는데... 난 나보다 엄마가 더 좋고 소중해요. 엄마가 없음 나도 못살아요. 그래서 엄마를 버리지 못했어요."
찬우는 초등학생 답지 않게 담담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찬우의말에서 우리는 찬우가 자신보다 엄마를 더사랑함을느낄 수 있었다.
찬우가 시작해서인지 어린 나이순으로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다음으로내가 입을 열었다.
"저는 생명과 저, 강힘찬을 두고 고민했는데 끝까지 저를 못 버리겠더라고요. 그냥 나, 내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후형은 마라톤 발표를 하듯이 자연스레 바통을 받아 설명했다.
"저는 제 꿈을 위해 가족들과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가족보다 꿈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고 꿈이 없는 나 자신을 생각할 수 없어서 꿈을 끝까지 남겨놓았습니다."
자신의 꿈이 분명한 지후형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저는 좌절을 하고 나서 후회를 하며 살았습니다. 이미 나에겐 소중한 것들이 많았지만 후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막다른 길에 도착했을 때...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여러 분들과 함께 하다 보니 나 자신을 믿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믿음을 끝까지 버리기 싫어서 남겨두었습니다."
훈이 아저씨의 말에 우리는 그동안 훈이 아저씨가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듯 무뚝뚝하게 말하고 노숙자처럼 의욕 없이 행동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는 생명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어요. 사실 의과대학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고 배울 것도 외울 것도 너무 많아서 부담도 컸고 너무 바빠서 잠잘 시간도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어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수능을 쳐서 다른 과로 대학 진학을 해야 하나 고민도 했는데 마지막까지 생명을 놓지 못하겠더라고요. 나를 믿고 자신의 생명과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 떠올랐거든요. 내가 의대 4년을 허투루 다닌 건 아니더라고요."
똑똑한 의대생이지만 늘 투덜대고 새침하던 아름이 누나가 지금은 완전히달라보였다.
마지막으로 민지 누나가 말을 시작했다.
"저는 지금 한창 사랑에 빠져 있어요. 나와 나의 가족도 사랑하고 스튜어디스라는 직업도 사랑하고
무엇보다 내 마음속의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프러포즈를 하려고요. 그래서 사랑을 버리지 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