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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어화 Oct 16. 2021

집콕 소년-3화. 자신의 벽면

[이 방의 한 면을 자신으로 채우십시오.]


어려운 과제였다.

"힘찬이 형, 이 넓은 면을 자신으로 채우라니, 무슨 말이야?"

마침 내가 싶었질문초등학생인 찬우가 걱정을 하며 나에게 물었다.

"나를 표현하라는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란 말인지..."

나는 한숨을 쉬며 천정에 떠 있는 찬우를 보며 답했다.


그때 아름이 누나가 말했다.

"그냥 해보는 거지 뭐. 큰 붓과 페인트가 있으면 금방 채울 텐데."

당찬 아름이 누나의 말이 끝나누나 옆에 큰 붓과 페인트가 나타났다.

"어머, 큰 붓과 페인트가... 여긴 내가 생각한 걸 말하면 그 물건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각자가 생각하는 도구랑 재료를 말해."

아름이 누나 도구가 생기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난 여러 색깔의 벽화용 스프레이! 막 뿌려보고 싶었는데. "

라고 지후형이 말하자 벽화용 스프레이가 나타났다.

"맞네요. 누나 말이!" 지후형은 기뻐하며 말했다.

찬우는 초등학생답게 크레파스를 외쳤고

민지 누나마카펜

훈이 아저씨는 먹물과 서예 붓을 외쳤다.

그리고 누가 시작이라고 하기도 전에 각자의 면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뭘로 벽면을 채워야 할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뭘로 채우지? 아, 난 그림에 소질이 없는데...'

한참을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으니 초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교실#

초등학교 6학년. 삼삼오오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고 장난을 치는 쉬는 시간이다.

나는 왕따는 아니었지만 온라인 세계와 더 친숙하여 친구들과 노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픈 채팅방에는 어떤 글이 떴을까?'

'저녁 9시에 게임 약속이 잡혔는데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하지?'

'빨리 수업 마치고 휴대폰을 켰으면 좋겠는데' 등

내 머릿속은 온통 휴대폰과 게임, 카톡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휴대폰을 켤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책상 위에 낙서를 했다.

연필로 이런저런 낙서를 하고 지우고.

지울 때는 지우개보다는 물티슈나 소독용 티슈를 쓰면 한방에 깨끗하게 지워졌다.

마치 게임이 리셋되는 것처럼.


'그래. 연필로 하자!'

"연필과 지우개"라고 하자 연필과 지우개가 나타났다.

나는 우선 내 이름을 크게 적었다. 신기하게도 벽면에 연필을 그어도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았다.

여러 번 덧칠을 하니 내 이름이 진해졌다.

"강힘찬"

바닥에 누워 나의 전신을 연필로 따라 그렸다. 그림 솜씨는 없었지만 머리카락과 눈, 코, 입, 귀를 그리고 티셔츠와 청바지, 양말과 운동화, 손과 발을 그려 놓으니 바닥의 절반은 채워져 있었다.

'이제 뭘로 채우지? 가족을 그려야 하나?'

엄마와 아빠의 이름을 적고 얼굴을 그렸다. 나의 그림은 피카소과에 가까웠지만 바닥을 채우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하늘나라로 간 반려견, "츄츄"를 그렸다.

그림에 자신이 없어서 남은 공간에는 연필로 떠오르는 것들을 그냥 적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명, 웹툰 제목, 음식, 좋아하는 색깔, 계절, 꽃, 곤충, 과목, 위인, 책 제목, TV 프로그램과 연예인 등과 싫어하는 것들, 기뻤던 일과 슬펐던 일 등 나의 희로애락들로 가득 찼다. 사실 이런 것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학년초마다 여러 번 적어봐서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도 연필을 들고 열심히 적고 있었다. 사실 휴대폰 터치에 익숙해져서 연필을 쥐고 이렇게 많은 것을 적고 낙서와 같은 그림을 그린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지만 이 경험이 나쁘진 않았다.

어느 정도 바닥이 다 채워졌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모두 열심이었다.

방안에는 붓과 연필, 스프레이, 크레파스 등이 벽면과 부딪히며 나는 마찰음외에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바닥면은 연필의 선들로 가득 찼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름이 누나의 벽면이 보였다.

"누나는 페인트를 써서 화려하네요."

아름이 누나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큰 붓에 초록색 페인트를 묻혀 붓을 힘껏 털었다.

초록색 페인트가 벽면의 여기저기에 튀었다.

"이만하면 다 채운 것 같아. 이렇게 마음껏 물감놀이를 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

"누나는 의대생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꼭 미대생 같아요."

"그래? 내 작품이 그렇게 멋지니? 칭찬 고마워!"


아름누나의 벽면은 붉은 하트와 선, 구불구불한 물결, 지층처럼 생긴 겹겹의 선, 푸른 선과 원 등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글자는 하나도 없었다. 나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벽화 같았다.


"그런데 멋지게 그려놓은 그림에 왜 초록색 페인트를 막 뿌렸어요?"

"음... 그건 피를 보다 보면 초록색을 많이 찾게 되거든. 초록색은 나의 피난처랄까? 휴식처랄까? 하여튼 나의 직업과 관련되지."

나는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민지 누나는 "일종의 직업병이네."라며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의대 다니면서 스트레스가 많았나 보네요."

"네. 실습을 통해 심장과 혈관, 장기와 피 등을 보고 만지고 자르고 묶고 하다 보니 점점 나 자신과 의사로서의 사명감은 없어지고... 

머릿속은 외운 의학용어들과 외어야 하는 의학용어들로만 가득 차고 육체라는 껍데기와 피와 장기들...

내 생각과 영혼은 사라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지극히 해부학적인 모습들을 여러 색의 페인트로 표현해 봤어요."

"설명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네. 아름 그림이 더 멋져 보이는데!"

칭찬을 하는 민지 누나를 보며 나와 아름이 누나는 자연스레 민지 누나의 벽면을 보았다.

우리는 턱이 빠진 사람처럼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 벽면을 자신으로 채우라는 알림을 본 순간, 나는 내 이야기를 만화로 표현해봤어요."

"만화가인 줄 알았어요."

"저도요. 개 멋져요." 나는 엄지척을 보이고는 만화를 한 칸씩 읽어나갔다.

"민지 누나는 꿈이 많은 아이였네요. 스튜어디스는 초등학생 때 꿈 중 하나였고 꿈을 이루었네요. 대단해요."

"나는 , 고등학생까지 만화가가 되고 싶었. 고등학생 때 접었지만."

민지 누나의 말에 나는 왜 접었는지 궁금했는데 마침 아름이 누나가 질문을 했다.

"그래서 만화를 잘 그리는구나. 재능이 있는데 왜 만화가의 꿈을 접었어요?"

"현실적으로 만화가는 밥 먹고 살기 힘들다고... 부모님이 반대했어요. 

나도 알아보니 만화 애니메이션과가 일부 대학에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대학이 아니었고 고2 진로체험을 할 때 그쪽 일을 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부분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현실적 안정을  선택하고 만화는 취미로 그려요.

취미라기엔 만화에 너무 빠져 있어서 웹툰 그리기가 중독 수준이라 문제지만요."

민지 누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갑자기 나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난 아직 아무 생각이 없는데. 민지 누나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이 많았네. 부럽다. 나는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갖게 될까?'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두 누나들은 나와 바닥을 번갈아보며 웃고 있었다.

"힘찬아, 바닥에 너에 관한 정보를 다 적어놓았구나. 네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연필로 다 적혀있네. 귀엽다. 너~!"

민지 누나의 말에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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