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공부하는 나의 모습과 간간이 친구들과 수다 떨며 즐거워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
저 깊은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짧은 감탄사는 얼른 그 시간들을 지나쳐버리고 싶은 외마디였다.
고3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너무 길어서
하루라도 얼른 대학시험을 처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50세를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나는
스트레스나 걱정이 많은 날에는 어려운 문제를 푸느라 끙끙대는 악몽을 꾸곤 한다.
고1인 아들과 나의 고1과 비교해보면
내가 보는 관점에서의 아들은
"철없는 천하태평의 청소년"이다.
인간인 엄마의 시선에서 분석하기엔
커서 되고 싶은 것도 없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교사이자 멘토인 엄마의 시선에서 분석하기엔
아직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딱히 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책보다는 휴대폰을 가까이하고
잠을 깨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침대에 누워버리고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찌 되겠지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아들은 고2까지의 총 8번의 시험 중에서
이미 1학년 1학기 2회의 시험에서
바닥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음에도
오픈 채팅방과 게임, 웹툰, 유튜브에 빠져있다.
착하고 순둥이인 아들이지만
한마디로 철이 없는 고등학생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교를 랜덤으로 배정했는데 나는 내가 원하는 고등학교가 아닌 학교에 배정되어서
사실 3년 동안 학교가 맘에 들지 않았다.
집과 먼 동네의 언덕 꼭대기에 있었고
초등학교 바로 옆에 붙어 있었는데
학교도 낡았고 교통도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상위권 성적의 학생이었고 범생이였기에 성적 하나로 넉넉하지 못한 집안 환경과 반올림해서 160cm이 되는 작은 키를 커버하며 전혀 기죽지 않고 학교를 다녔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적이 우수하면 선생님들의 리스트에 올라 적당한 관심, 일명 칭찬을 받기에 학교생활이 편해진다.
사실 중학교 때는 매번 시험을 치면 전교 1등에서 100등까지의 명부를 학교 벽면에 게시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시절 중학생인 나에게는 공부할 의지를 불태워주는 자극이었고 내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엄마와 시장을 가면 주변 아줌마들이
"그 집 딸, 공부 잘한다며 좋겠다." 라며 한 마디씩 던지는 말들이 공부의 자극제이자 보상이었고 세상 제일의 효녀가 된 기분을 안겨주었었다.
고3의 우리 반은 1차 4년제 대학교 합격자가 고작 8명이었다. 다음 해 새 교과서의 도입, 그다음 해 수학능력시험 도입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회오리가 몰려오고 있었기에 담임선생님은 하향 지원을 하길 권했고 결과는 모든 학생들의 하향지원으로 중하위권 대학으로의 쏠림현상으로 소신 지원한 친구들만 합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목표가 분명했기에 고등학교 3년 동안 한 번의 흔들림도 없었고 그래서 소신 지원을 했으며 결과는 합격이었다.
아직도 전화 수화기를 들고 수험번호를 누르던 그때가 생생하다.
"000000번 합격. 축하합니다."
고3 때의 담임교사는
내가 정말 싫어하는, 아니 절대 저런 교사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블랙리스트에 올려진 인물이었다.
상담 오시는 부모님마다 책상 서랍을 열어 자연스레 돈봉투를 넣도록 하고
고3 담임 후에는 항상 자동차가 좋아진다는,
그 당시 우리 학교의 청렴하지 못한 교사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청렴하고 열심인 선생님들도 많았다. 하지만 하필 고3 때 그런 국어 선생님이 나의 담임이었다.
고3이 되어 친 총 5번의 모의고사 중 나는 한 번의 시험을 잘 치지 못했다.
그때 엄마의 자궁적출 수술과 입원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하지. 엄마가 수술하고 입원해있는데도 너만 병원에 한번 안 왔어."
엄마는 대학생이 된 나에게 뒤늦게서야 섭섭한 마음을 내뱉었었다.
"아빠랑 오빠, 막내가 갔잖아. 나는 고3이었고. 엄마는 평생 그 얘기 우려먹겠네."
나는 농담스레 답했지만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를 보면 내가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가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쑥스럽다고 해야 하나?
자존심을 세웠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런 한 번의 성적 추락은 담임에게 빌미를 주었다.
"엄마 학교 오시라고 해라. 원서 어떻게 쓸지 의논하게."
"엄마, 수술하고 회복 중이라 안 되는데요."
"그럼 아버지 오시라고 해라"
"아버지는 직장 다니고 바쁘신데요.
선생님, 제 성적은 충분히 제가 갈 대학교에 합격선이데 왜 상담이 필요하죠?
그냥 제가 가고 싶은 대학교에 원서 넣을게요."
"그렇지만 모의고사 성적 하나가 나쁘잖아."
"네 개는 좋거든요."
"그래도 오시라고 해라."
그때 엄청 기분이 안 좋았었다.
아니 요즘 말로 더럽고 개빡쳤다.
내 생애 가장 기분이 더러웠던 3순위 안에 들 정도로.
그 이유는 빼내어져 있던 서랍 앞 의자에 앉아있었기에 흰 봉투들 속에 들어있었지만
은근히 비치는 초록색과 그 두께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니가 선생이냐? 부끄러움도 모르네. 개보다 못한 인간아. 난 너 같은 교사는 절대 안 될 거다. 네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난 대학 합격한다.
두고 봐라.'
나는 내 눈빛에 그 모든 말을 담아 담임을 한번 째려보고 "네"라고 답하며 교무실을 나왔다.
우리 아빠는 학자의 성품을 지닌 분이시라 사업이 맞지 않는 사람인데 사업병이 들어서 동업자의 사기와 전망 없는 분야에의 도전으로 세 번의 실패를 맛본 분이다.
한마디로 사람은 참 좋으나 돈 복은 없다.
그런 아빠에게 모범생이었던 내가 담임샘이 학교로 오래요라는 말을 전하는 것 자체가 나는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했으며 아빠에게 죄송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갑은 담임교사인걸.
아빠가 교무실로 기꺼이 오기 전날 밤,
나는 아빠에게 담임이 서랍을 여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아빠가 학교에 불려 가는 것도 기분 나쁘다고 말했다. 아빠는 그냥 알았다고 하셨다.
아빠가 학교 교무실에 오기로 한 그 시각.
나는 교무실 앞으로 갔다. 아빠는 나를 보더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으로 들어가셨다.
교무실 미닫이 문을 조금 열어 나는 담임과 아빠를 지켜보았다. 마침 교무실 문과 대각선 자리가 담임의 자리여서 시야도 음향도 쉽게 확보되었다.
담임은 이런저런 말을 꺼냈고 서랍을 열며 말을 이어가려고 하자 아빠는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입을 여셨다.
"선생님, 우리 딸은 교사가 될 아이입니다.
그 서랍장 닫으시죠.
저는 제 딸을 믿습니다. 본인이 하겠다는 대로 원서 써 주십시오. 실력이 충분하기에 걱정 안 하지만 혹여 떨어진다고 해도 선생님이 아닌, 제가 재수시킵니다."
아빠의 통쾌한 말에 담임은 얼굴과 귀, 목이 빨갛다 못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때 담임의 얼굴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본인도 부끄러웠는지 서랍장을 슬~닫았던 모습도 생생하다.
'이보다 멋진 아빠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사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시작된 가난이 싫었고 부끄러워서 아빠를 미워하기도 원망하기도 많이 했었는데 그날 이후 나는 아빠에 대한 모든 나쁜 감정을 떨쳐버리게 되었다.
가난한 집안 살림으로 일찍 철이 들긴 했지만 그날 제대로 철이 들었던 것 같다.
졸업식날 나는 담임이 보란 듯이 환하게 웃으며 당당하게 졸업식장을 나왔고 담임은 웃지 못했다.
아들은 가난을 모르고 세상 곱게 자라는 중이다.
부모가 전문직의 맞벌이이기에 상위층은 아니더라도 중산층에는 속해서 먹고 입고 자는데 문제가 없고 외가에서는 삼남매 중 둘째인 나만 결혼을 해서 유일한 외손주로 사랑과 용돈을 한 몸에 받으며 컸다.
친가에서는 사촌 형들과 나이 터울이 많아 애정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성별이 다른 여동생이라 옷, 신발, 장난감 등으로 응석 부리고 고집부리며 떼를 쓸 일도 없었다. 물론 요즘은 사춘기가 절정인 중2 여동생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있겠지만.
하지만 그렇기에 철이 없고 절박함도 없다.
요즘은 도전의식이나 목표가 없이
그냥 하루하루 휴대폰과 패드를 들여다보는
재미에 빠져있는 순진한 고1일 뿐이다.
물론 오냐오냐하며 버릇없이 키우지는 않았기에 주변 이웃 어른들이 착하고 예의 바르고 붙임성 있게 말을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지금은 방콕 소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어 나는 많은 걱정과 초조함이 앞선다.
'이렇게 두어도 되나? 아님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나?
철들 때까지 믿고 기다려줘야 하나? 아님
철들자 노망일 수도 있는데 더 늦기 전에 이끌어줘야 하나?'
부모는 처음이기에 어찌해야 할지...
솔직히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 아들은 내가 아니란 것!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
-나 때와 지금은 다른 사회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로는 이해가 되나
입과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
-현실 속 행복한 삶과 잘 사는 삶은 다르다는 점.
-믿고 기다려줘야지 하는 마음과 불신과 불만으로 조급해하는 마음이 함께 공존하는 점.
이런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
아들과 딸은 매일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집에 살면서도
각자 방에 들어가면 알 길이 없고 얼굴 보기도 쉽지 않다.
엄마인 나는 그 나이를 치열하게 살아봤기에
현재 아들의 삶이 이해되지 않지만
본인은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고 행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뒤는?
본인이 오로시 책임지고 살아야 할 본인의 삶은?
"아들, 고3이 되었을 때 갈 대학이 없으면
군대 가야 해. 군대 가서라도 철들면 다행이고."
이 말이 최근에 내가 말한 최후통첩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공부에 대한 잔소리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본인들 인생이니 기다려주고 지켜봐 줄 뿐,
입을 대는 순간 점점 잔소리밖에 되지 않고 내성만 생길 뿐 나아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군대"라는 단어에서 본인도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요즘 나의 소망은
사랑하는 아들, 딸이
"철드는 것"이다.
철이 들어서 공부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목표가 생겨
후회가 남지 않는 학창 시절을 보냈으면...
진심으로 바라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