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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어화 Aug 07. 2021

여행가방에 갇힌 아이패드~!

-번호열쇠 4자리를 맞혀라-

토요일 오후, 영어 학습지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며 선생님이 오시는 시간 5분 전에 숙제를 끝냈다.

'다했다... 아~한꺼번에 하려니 힘드네.'

방학이라 시간이 충분한데 나는 숙제를 몰아서 한다. 나쁜 습관인 걸 알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엄마, 영어 선생님이 못 오신다는데요?"

"왜?"

선생님의 간식을 준비해두고 양치질을 하던 엄마에게 누나는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네. 선생님. 알겠습니다. 건강이 우선이지요. 괜찮습니다. 쉬세요."

엄마는 전화를 끊고 선생님께서 위경련이 일어나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왔는데도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자세한 설명과 함께 오늘 수업을 못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오늘 영어수업 없어?, 나 영어 숙제 다 해놨는데."

나는 엄마에게 칭찬이라도 받을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숙제는 당연히 다 해놨어야지. 그리고 숙제가 많지도 않은데."

엄마는 내가 숙제를 몰아서 한꺼번에 하는 걸 지켜보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하루에 3장씩이라도 모이면 많거든요.'

이럴 땐 엄마가 주부가 아닌 학교 선생님임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시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2학년까지 엄마의 차를 타고 같은 학교로 등교를 했다. 키는 제일 작았지만 학교 운동장을 하루에도 몇 번씩 뛰어다닐 정도로 활동량이 많고 명랑한 아이였다.

"우리 엄마는 5학년 1반 선생님이에요."라고 당차게 말하며 인사를 잘해서 온 학교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으며 초등학교 저학년을 보냈다.

물론 엄마뿐 아니라 나에게는 든든한 방패가 하나 더 있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우리 누나!

누나는 성격이 밝고 나름 털털하며 태권도 도장을 다녀서 운동을 잘한다. 특히 발차기!

엄마의 말이 떨어지자

"나 숙제 다했으니까 누나랑 놀아도 되죠?" 라며 누나 방으로 직진했다.

토요일에다 영어수업까지 없으니 누나와 게임하기 좋은 날이 또 있으랴!

나는 한층 업 된 기분으로 아이패드를 열었다.

"배틀그라운드" 전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생존게임! 한마디로 말하면 100대 1!

100명 중 최후의 한 명이 되어야 하는 치열한 게임으로 총을 쏘며 상대를 아웃시키면 된다. 혼자 할 수도 있지만 이 게임은 조를 짜서 단체로 하면 더 재미있다.

사실 나는 총 쏘는 게임에는 관심이 없었고 마인크래프트에 빠져있었다. 어릴 때부터 레고 조립을 좋아해서 내가 생각한 대로 만들고 조립할 수 있는 마인크래프트 게임이 좋았다. 물론 레고 조립과 마인크래프트는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다.

친구가 제일인 5학년! 

친한 친구들은 너도 나도 배틀 그라운드를 해서 나는 누나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다.

누나는 중 1인 데다 나보다 배틀그라운드를 오래 해서 나에게는 만만한 스승이었다. 처음엔 그것도 못하냐는 핀잔도 듣고 많은 기능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라서 바보냐라는 소리도 들었고 뒤쪽에 매복해 있던 저격수에게 총을 맞아서 시작하자마자 아웃된 적도 많았다. 게임규칙을 익혀가고 생존 방법을 터득하면서 서럽고 어설펐던 나는 고난의 시기를 지나 6학년이 되었다. 지금은 누나와 한 팀이 되어 게임을 하는 실력자!

누나는 게임을  하면 너무 몰입해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외치며 전두지휘를 한다. 지나치다 싶으면 엄마가 누나의 방문을 두드리며 주의를 주신다.

"동화야, 목이 다 쉬겠다. 너무 흥분해서 하지 마. 그리고 게임할 때 욕은 안 하면 좋겠는데."

그럼 누나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사실 내가 누나를 보아도 평소에는 욕을 거의 안 하는데 게임만 하면 욕이 툭툭 튀어나온다. 중학생이라 그런가? 아님 승부욕이 지나쳐서 그런가? 했는데 "씨발~"하며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라며 거친 말을 쏟아낼 때는 나도 엄마의 말에 공감이 된다. 하지만 누나에게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나는 욕 대신 "악~~~"하고 돌고래의 옥타브보다 높은 고음, 아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도 게임에 몰입 중일 때는 평상시와 달리 변하는 것 같다. 차분한 박사님이 화가 나면 덩치 크고 초록색인 헐크가 되는 것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누나 방에서 게임을 했다. 평소에는 누나가 욕을 하는 걸 누나는 내가 비명을 지르는 걸 싫어해서 각자 방에서 게임을 한다. 하지만 이번 여름은 너무 덥다. 

그래서 벽걸이 에어컨이 있어 시원하고 온라인 공부를 위한 빵빵한 와이파이가 지원되는 누나 방이 올 여름 최고의 PC방이다.  

올 여름 나 최애 거점지는 누나방이다.

게임 속에서도 우리에게 유리한 거점지가 있다. 공격하기 좋은 장소가 있고 숨어있기 좋은 장소가 있다. '매복'할 장소를 잘못 선택하면 적에게 쉽게 발각되어 총을 맞게 된다.

누나와 나는 한 조가 되어 사이좋게 게임을 해왔다. 1년 동안 실력을 갈고 닦은 나는 누나와 싸울 정도로 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세 번째 판에서 시작되었다.

"동진아, 이번에 한 자리 남는데 너 들어와. 내가 초대했어."

누나의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패드를 쳐다보았다. 다른 팀에서 나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누나에게 다른 팀에서 초대받았다고 말하기도 전에 게임이 시작되었다. 나는 말없이 게임에 집중했다.

누나는 옆에서 초대했는데 왜 들어오지 않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 다른 팀에 초대받아서 하고 있어"

"그럼 빨리 말을 해야지. 네가 들어오지 않아서 누나팀이 한 명 적잖아."

"왜 꼭 누나랑 같이 해야 해?"

"뭐라고? 이제까지 한 팀으로 같이 하고선, 갑자기 말도 없이 빠지면 되냐?"

그러고는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누나는 빨리 끝났는지 나의 패드를 쳐다보며 투덜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때, 적들보다 더 민첩하면서도 소리도 없이 우리 뒤로 와서 우리를 저격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제 그만해. 두 시간 했어."

엄마의 말이 나의 귀속을 명중하며 선명하게 들렸다.

"엄마, 동진이가 잘못해 놓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요!"

이건 뭔 말? 갑자기 누나가 엄마에게 내가 잘못했다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을 쏟아냈다.

"내가 뭐! 난 잘못한 거 없어!"

"네가 내 초대에 답하지도 않고 입장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는데 들어오지도 않아서 우리 팀이 불리해졌잖아."

"그럴 수도 있지, 꼭 누나랑 해야 돼?"

"다른 팀이랑 할 때 한자리 있었는데 말도 안 하고 그 친구들이 불편해할 것 같다고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며!"

누나는 울분을 터뜨리며 입술이 실룩거렸고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으며 눈이 빨개져 있었다.

'왜 저래?'

나는 누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게임에 집중했다.

"무슨 말이야? 천천히 설명해봐. 동진이 게임 그만!"

엄마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고 누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제야 나는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고 얼른 게임을 종료하고 누나와 엄마를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난 잘못한 거 없어요. 누나가 혼자서 그러는 거예요."

"뭐? 잘못한 게 없어? 네가 나를 무시했잖아!"

누나는 더 흥분을 했고 내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열을 냈다. 나와 누나는 각자의 입장에서 엄마에게 열심히 설명했고 엄마는 귀를 쫑긋 세우며 이야기를 듣고는 판사처럼 한마디 하셨다.

"서로 대화가 부족했네. 게임을 하면서도 서로의 생각을 그때그때 말했어야지. 얘기를 하지 않으니 서로의 생각이나 마음을 몰랐던 거네."

"아니에요. 난 동진이에게 여러 번 얘기했어요! 그런데 동진이는 개무시하고 게임만!"

"누나랑 하지 않으면 개무시야? 누나랑 하기 싫을 수도 있지."

"그럼 빨리 말을 해줬어야지!"

"말했는데. 누나가 게임하느라 내 말을 제대로 못 들었으면서."

"잘 못 듣긴! 같이 안 하려면 처음부터 하지 말던가. 계속 같이 하고선 갑자기 초대 무시하고 다른 팀과 같이 했잖아!"

한마디도 지지 않자 누나는 울분이 올라왔는지 이를 악물고 목에 힘을 주며 감정을 실어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거 맞아. 사-과-해-!"

누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누나를 보며 정찰병처럼 엄마의 표정을 살폈다. 엄마의 표정이 이미 굳어있었다. 누나는 토네이토급으로 말들을 쏟아내느라 엄마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엄마를 쳐다보며 혼잣말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냐. 난 누나에게 말했고 잘못한 게 없어..."

"둘 다 그만해라! 대화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게임이 문제네. 이렇게 상처 주고 감정 상하라고 패드랑 휴대폰 사준 게 아냐! 알지?"

"이 게임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게임을 엉망으로 하는 동진이가 문제라고요!"

누나의 말에 엄마는 드디어 폭발했다.

"동화 너, 이 상황에서도 게임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네!" 누나는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엄마에게 맞섰다.

"그래. 게임 자체는 문제가 없겠지. 하지만 너희 둘은 문제가 많아. 이러라고 게임 시간을 허락해 준 게 아냐. 즐겁게 게임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라고 시간을 준거지. 이럴 거면 게임하지 마!"

게임하지 마~! 게임-하지 마~!! 게-임-하지 마~!!!

엄마의 최후통첩이 울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희들 대화를 들어보니 서로 잘못이 아니라고 하고 상대방만 탓하고 계속 평행선이네."

엄마는 나를 보며 초등학교 4학년에게 평행의 개념을 알려주듯이 팔을 나란히 쭈욱 뻗으며 평행선은 영원히 가도 만나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러곤 각자 방에서 자신이 한 말과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했다.

"공부에 그렇게 열정을 쏟아봐. 초등학생 동생에게 억울하다고 목에 핏대 세우며 말하지 말고. 중학생이 아직도 저러니..."

엄마는 한숨을 쉬며 거실로 나갔고 나도 엄마 뒤를 따라 살짝 누나 방에서 빠져나왔다.

부엌 쪽에서 또다시 엄마의 잔소리가 들렸다.

"놀 땐 놀기에 집중하고, 공부할 땐 공부에 집중해. 엄마가 늘 하는 말이잖아. 놀지 말라는 게 아니라 놀 땐 놀고 공부할 때도 게임할 때처럼 집중하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게임할 땐 엉덩이 한번 안 떨어지더만 공부할 땐 10분이면 물 마시러 나오고 20분이면 간식 상자에 두리번거리고... 에휴!"

엄마는 크게 한숨을 쉬고나서야 잔소리를 멈추었다.

사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게임할 땐 100% 아니 200% 집중이 되고 2시간 아니라 몇 시간이라도 움직이지 않고 게임만 할 수 있는데 공부를 하려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내가 산만한 건 나도 안다.

누나도 중학교에 가니 생각보다 시험성적이 나오지 않아 나름 고민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누나의 성적에 엄마의 실망감이 컸겠지만 엄마는 이제까지 늘 긍정적이셨다. 그래서 플래너 쓰는 방법과 과목별 공부방법을 알려주고 관련 유투브를 찾아보며 가족 단톡방에 공유해 주며 정성을 쏟으셨다.


우리들의 1차 대전이 떠오른다.

1년 전쯤, 게임을 잘하다가 누나와 나는 감정이 나빠져서 크게 싸웠었다. 엄마는 한번 더 이런 일이 생기면 휴대폰과 패드를 걷어가서 돌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오늘이 그날이다.

"엄마가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잘 됐네. 너희 둘 다 패드, 휴대폰 가지고 나와!"

윽! 드디어 그 말만은 했던 말이 엄마의 입에서 나와버렸다.

나와 누나는 패드와 휴대폰을 가지고 나왔다.

"이번 여름방학은 기기 없이 살아봐!"

엄마는 휴대폰 두 대와 패드 두 대를 챙겨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방으로 걸어갔다. 누나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맞은편 안방에서 '드르륵~' 소리가 나더니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안방문에 귀를 살짝 갖다대고 엿들었다.

"공부할 때 사용할 거라고 패드 사달라더니... 내가 속았지..."

엄마의 불평이 작게 들렸다.

나는 엄마의 말보다 다른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침대 밑 캐리어다. 캐리어에 넣는다.'

그렇게 해가 저 물때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집안에는 무더위가 아닌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때마침 아빠가 퇴근해서 들어오셨고 엄마는 지원군이 나타난 듯이 우리의 일을 간결하게 요약해서 전달하셨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계셨다.

그러다가 문 틈으로 분위기를 정찰 중인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빠는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셨다. '모른척하고 들어가. 아빠가 해결할게'

"그런 일이 있었어? 내가 자식들한테 너무 정성 쏟지 말랬지! 당신만 상처 받는다고."

"내 자식인데 어떻게 정성을 안 쏟아요. 둘 다 철이 들어야 할 텐데 걱정이야."

"여보, 자식보다 남편인 나에게 신경을 써줘요."

"당신까지 왜 그래요? 뭘 더 신경 써 달라는 거예요?"

"우리 영화보러 간 지도 오래됐고 또..."

"영화요?"

영화를 좋아하는 엄마를 겨냥하듯 아빠는 미끼를 던지고 계셨다.

"작년 12월 결혼기념일날 봤잖아요."

"지금은 8월이에요. 직원들이 그러는데 영화는 꼭~ 극장에서 보래. 그렇게 재미있다네."

"알았어요. 내일 주말이니까 봐요. 저녁 먹고 휴대폰 앱으로 예매할게요."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저녁을 먹기 전 최신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엄마의 마음도 많이 풀린 것 같았다.

"나와서 저녁 먹어."

엄마의 부름에 우리는 방에서 재깍 나와 식탁에 앉았다.

아빠는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식사를 하셨다.

"내일 아침에 조조영화 보러 갈 건데, 너희도 볼래?"
"우리 둘이 보러 가자니까."

"재밌다면서요. 애들에게도 물어는 보고 예매해야죠."

"또 애들 생각한다. 애들은~"

아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조조영화라는 말에 진심이 먼저 튀어나와버렸다.

"그냥 늦잠이나 잘래요."

"동진아, 넌 누나랑 다툴 때도 그러더니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말해. 네 생각이 그렇더라도 달리 말할 수도 있잖아. 엄마도 기분이 나쁘네."

"어떻게요?" 나는 순간 말이 잘못 튀어나왔음을 직감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늦잠이나 잘래요가 아니라 저는 늦잠 자고 싶어요!"

나는 별 차이가 나지 않는 엄마의 말에 입을 삐죽거리며 "네"라고 말했다.

"동화, 동진이! 엄마가 생각해 보라는 건 생각해 봤어?"

"네. 벌써 다 풀렸어요. 언제 적 일인데요."

누나의 능청스러운 답변에 나도 거들었다.

"저도요. 누나, 아까 우리 싸웠어?"

내가 너스레를 떨자 누나와 짠 것처럼 동시에 친한 척을 했다. 물론 우리 둘의 속 샘은 서로 화해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빨리 패드와 휴대폰을 돌려받는 것이었다.

"전혀~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네. 이번에도 이렇게 넘어가면 조만간 3차 대전이 일어날걸?"

엄마는 진지하게 누나에게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점을 나에게는 남을 배려하지 않고 말하는 점을 족집게 선생님처럼 집어주셨다.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한 건 인정할 수 있어야 반성도 되고 발전도 있는 거야. 저녁 먹고 좀 더 생각해봐."

그렇게 우리 둘의 일은 마무리되고 열대야속에서의 잠 못 드는 밤이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아니 11시가 되어서야 누나와 나는 잠에서 깼다. 아빠와 엄마는 집에 없었고 식탁 위에 쪽지와 함께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엄마와 아빠, 10시 조조영화 보러 가. 아침 챙겨 먹어~(하트)"

아침 메뉴는 큼직한 두부가 들어있는 된장찌개와 십자로 칼집을 넣어 꽃 모양으로 벌어진 비엔나 소시지였다.

'맛있겠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네.'

누나는 된장찌개를 전자레인지에 넣어 데웠고 우리는 식탁이 아닌 거실 탁자에서 TV를 보며 아침을 먹었다.

"누나, 나 엄마가 패드랑 휴대폰 어디에 숨겼는지 안다!"

"그래, 어디?"

누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안방 침대 및 캐리어 있잖아. 거기가 분명해. 내가 어제 안방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거든."

"얼른 밥먹고 찾아보자."

누나와 나는 깨끗이 싹 비운 그릇들과 수저를 싱크대에 넣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 침대 밑에 있는 작은 캐리어를 꺼냈다. 누나가 수학여행 갈때 가져갔던 은빛색의 캐리어였다.

지퍼를 열려고 하는데 "헉!" 두 지퍼의 끝에 번호 열쇠가 떡하니 걸려있었다.

"이게 뭐야! 자물쇠잖아!"

나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네. 번호가 네 개네. 하나하나 돌려서 맞히려면 하루종일 해야할걸!"

"어, 누나. 여기 쪽지가 있어."

[너희 둘이서 네 자리 번호를 맞혀봐. 엄마랑 아빠가 영화 보고 들어올 때까지. 그럼 다시 돌려줄게]

캐리어에 붙여진 노란 포스트잇에는 낯익은 엄마의 글씨가 적혀있었다.

"아, 엄마는 줄 거면 그냥 주지! 이게 뭐야!"

"시간 별로 없어. 10시 조조영화면 영화 시간 두 시간 잡고 집으로 오는 시간까지 하면 12시 30분쯤 들어오실 건데 지금 12시야."

"그러네. 우선 전화번호, 가족들 생일부터"

나는 번호를 하나하나 돌려가면 맞혀보았지만 아빠, 엄마, 누나, 나의 생일도 우리 집 전화번호 끝자리도 가족들 휴대폰 번호 숫자도 아니었다.

"엄마가 그런 숫자들로 비밀번호를 설정하진 않았을 거야..."

누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캐리어 들고 거실로 나가자고 했다. 사실 선풍기도 켜지 않고 있어서 안방은 너무 더웠다.

"내가 유튜브에서 소리로 번호 열쇠 숫자 맞히는 걸 본 적이 있어. 기다려봐~"

누나는 유튜브에서 시청한 동영상을 검색했고 그런 동영상이 실제로 있었다.

"누나, 소리가 어떻게 다른데?"
"숫자를 돌리면 '따닥'하고 약간 다르게 나는 소리가 있대. 그게 맞는 숫자래"

나는 번호 열쇠에 귀를 대고 눈을 감을 채 숫자를 하나하나 돌려보았지만 소리를 구분할 수 없었다.

"따닥은 뭐. 다 똑같은 소리가 나는데..."

"나만 믿어, 누나가 절대음감이잖아"

그렇다. 누나는 절대음감을 가졌다. 피아노 학원을 일곱 살 때부터 다녔는데 피아니스트가 될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누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피아노 건반 소리를 듣고 계이름을 알아맞히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정도가 아니라 검은건반까지. 그래서 피아노 원장 선생님이 엄마에게 전화를 하신 적이 있었다. 피아노를 평생 치고 있는 본인도 절대음감이 아닌데 동화는 절대음감을 가졌다면서...

그날 우리 가족들은 피아노 건반을 치며 누나의 음감능력을 테스트를 해봤었다.

"그래 누나는 절대음감이지? 할 수 있을 거야. 파이팅!"

나도 모르게 누나를 응원하며 우리는 휴대폰과 패드라는 공통된 목표로 똘똘 뭉쳤다.

누나는 조용히 해달라고 했고 선풍기도 꺼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 번호를 돌리며 소리를 들었다. '따닥' 미세하게 다른 소리인데 누나는 기가 막히게 구분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숫자는 1이야"

첫번째 숫자를 1에 맞추고는 두 번째 숫자들을 돌려나갔다. 이번에는 소리도 듣지만 열쇠고리를 살짝살짝 들어 올리며 듣고 번호를 돌리고 있었다.

"두 번째 숫자는 2야"

"누나, 정말 대단해! 이번엔 왜 고리를 들어 올리면서 소리를 들었어?"

나는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누나는 동영상에서 본 걸 짧게 설명해 주었다.

첫 번째 숫자가 맞기 때문에 두 번째 숫자가 맞을 때는 열쇠고리가 좀 더 위로 들어 올려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숫자였다. 동영상은 아래 숫자는 '0'으로 맞혀두고 위쪽 두 개의 숫자만 알아내는 방법만 나와있었던 것이다.

"누나, 세 번째와 네 번째 숫자는 어떻게 해?"

"그냥 돌려봐야지."

누나는 다소 힘이 빠진 듯 말했다.

"이건 내가 해볼게. 누난 좀 쉬어."

"동진이 너 조금 멋진데?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어제는 누나가 화내면서 말해서 미안해. 네가 누나의 초대를 거절하니까 너무 속상했거든."

"누나, 내가 미안해. 누나가 게임하는 방법 다 가르쳐 줬는데 내가 스승님을 배신했지?"

"배신은 아니고 무시!"

"이제 안 그럴게."

우리는 번호 열쇠를 맞히면서 자연스레 서로를 응원하고 어제 일까지 사과하며 마음을 풀었다.

"엄마가 왜 이런 미션을 꾸몄는지 알겠네."

쇼파에서 지켜보던 누나는 엄마의 생각을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가 좀 유치하긴 하지만, 그래도 야단맞는 것보다 나는 이런 미션이 좋아."

나는 누나와 엄마 이야기를 하면서 세 번째 숫자와 네 번째 숫자를 막 돌리고 있었다.

십여분쯤 지났을까? 시간은 12시 30분이 넘어가 있었고 긴장감마저 돌고 있았다.

"딸깍!" 소리와 함께 자물쇠의 고리가 열렸다.

"와~! 열었다. 열었어!"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나왔다. 게임에서 1등을 했을 때보다 더 기뻤다.

"와, 대단하다. 내 동생!"

누나와 함께 해냈다는 성취감에 너무나 들떠 있어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뭐야. 벌써 열었어?" 

엄마는 우리 둘을 보고는 놀라며 말씀하셨다.

"엄마, 1202. 맞죠? 우리가 열었어요."

"어떻게 열었어? 아침 일찍 일어나 숫자를 하나씩 다 돌려본 거야? 만 번을?"

"아뇨. 내가 소리를 듣고 첫 번째 두 번째 번호를 알아냈고 동진이가 느낌으로 세 번째 네 번째 번호를 알아냈어요."

"누나, 느낌이 아니라 나의 뛰어난 직감력이지."

"그래 너의 뛰어난 직감력!"

나는 신이 나서 엄마에게 누나의 절대음감 능력이 짱이라고 칭찬하며 유튜브 동영상에 관해 아빠에게 설명했다. 아빠는 신기하다는 듯이 번호 열쇠를 가져와 보라고 하셨다. 누나는 같은 번호로 하면 알고 있으니까 재미 없다면서 번호 열쇠의 비밀번호를 다시 설정했다. 세번째와 네번째 숫자는 0으로.

"그런데 숫자를 왜 1202로 했어요?"

누나의 질문에 엄마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하셨다.

"응. 외할머니 생신~"

아~! 하며 누나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가족들 생일은 다 알지만 할머니와 외할머니 생신 날짜까지는 모를 테니까."

엄마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우리들을 쳐다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아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엄마, 그럼 우리 휴대폰이랑 패드 가져가도 되죠?"

"그래. 너희들이 미션을 해결했으니까. 단, 3차 대전이 일어나면 그땐 알지? 그땐 봐주는 거 없어. 삼진아웃이야!"

"네. 기회는 세 번뿐. 그 정도는 우리도 알아요."
"너희를 믿고 돌려주는 거야. 너희 기기니까 너희가 주인답게 잘 사용해. 게임만 하면서 싸우지 말고."

엄마의 잔소리가 우리를 뒤따라왔지만 이번엔 엄마의 잔소리가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누나랑 화해도 하고 이번 미션을 하면서 느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스릴도 있었고 살짝 재미도.

"아빠, 아직도 못 맞혔어요?"

"동화야, 아빠는 소리 구분이 안되는데. 소리가 어떻게 다르다고?"

아빠는 들어오신 이후로 계속 번호 열쇠를 가지고 끙끙대고 계셨다.

"첫 번째 숫자는 7! 두 번째 숫자 맞혀봐요. 1시간 드릴게요."

누나는 아빠에게 미션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에서 생각했다.

'아빠, 소리는 포기하고 아빠의 직감을 믿어보세요. 아무나 되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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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li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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