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몰랐던 내 모습
어릴 적의 나는, 아니 20대 때만 하더라도 난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다. 아니 이건 어감이 좀 그러니까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고 하자. 내가 보내왔던 시간들, 그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 그 순간의 내 마음. 모든 것이 소중했다. 그런데 남길 수 있는 것이라곤 그때를 대변하는 물건들뿐이었다. 그래서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남들 눈에는 쓰레기일 뿐인 껌종이 하나까지도 소중했다. 그렇게 한참을 간직하던 것들이 많이 있었다. 늘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고 그땐 가까웠지만 지금은 데면데면해진 사이를 안타까워했다. 추억에 갇힌 사람처럼 살았다.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들이라는 사실이 그 기억들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었고 내 마음을 애닳게 했다. 그래서 나는 과거에 참 많이 연연하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계획적인 사람은 스스로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들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계획을 세운다,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고려해서.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그 상황을, 그 시간들을 통제해 보려는 발버둥질이다. 100%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 그냥 그 성향이 그러하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많이 내려놓았고, 많이 바뀌었다곤 하지만 그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난 것을 어쩌겠는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런 순간이 왔다. 몇 개월 전부터 문득문득 생각나서 날 걱정시켰던 문제. 나 혼자만 해서는 될 일도 아니었고 여러 사람이 얽힌 문제였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서는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미 당겼다 놓아진 활시위에서 날아간 화살이 이곳저곳에 꽂히며 나를 비롯해 여러 사람을 찌르는 모습을 보았다. 완벽한 통제불능. 다행인 것은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을 견뎌내고 지나오면 된다는 것. 그 한 가지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그동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리고 한껏 예민해져서 아이들에게 그 모든 화가 돌아가기도 했다. 올 한해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불안정했던 그때.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가고나자 끝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내 마음도 평안을 되찾았다. 이 상처,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었는데 그 마음마저 흘러가버렸다. 과거에 연연하는 지난날의 나였더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내 마음에서 보낸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무슨 일일까? 이것들은 최소 1년짜리가 아닌가? 내 마음에 콕 박혀서 두고두고 쓰라렸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껏 나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나도 몰랐던 나의 변화였다.
크리스찬이 아니라면 모를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이쯤에서 성경 속 인물 다윗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그 대가로 자신의 아이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예언을 듣는다. 즉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금식하며 눈물로 회개 기도하던 다윗에게 들려온 소식은 아이가 결국 죽었다는 것. 그때 다윗은 어떻게 했을까?
다윗이 그 신복들의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깨닫고 그 신복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삼하 12:19-20)
모든 것을 제쳐두고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그 '끝'의 순간에는 깨끗이 뒤돌아섰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2-23)
이미 끝난 것. 돌아올 수 없는 것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비단 이번뿐만은 아니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는 충실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떠하든지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 과거를 그다지도 그리워했던 것은 그 당시, 그 순간을 충분히 즐기고,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돌아서면 아쉬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동안 조금은 자라고 어른이 된 나는 현재를 즐기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어떤 상황이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내는 법을 배웠다. 그래서 이제는 잠시 아쉽고, 그리울 수는 있어도 마음에 맺히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가도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 후회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걸 이제야 알았다.
다행이다. 2021년이 지나가기 전 나에 대해 또 배웠다. 모든 것은 바뀐다고 말하면서도 바뀌는 나 자신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쉽게 확신했다. 그래서 이번 연말에는 나 자신에게 질문을 좀 던져보고 싶다. 질문받지 않은 것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이게 바로 질문의 힘이다. 알고 있다고 쉽게 확신하지 말자, 그것이 나 자신이든 무엇이든. 늘 우리 마음 한켠에 물음표를 간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