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동안 몰랐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건인데, 어느 순간 발수건으로 변해있더니 이제 버린다고 하네." 여행지에서 남편이 말했다. 좀 씁쓸하게...? 그도 아니면 포기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친구네 가족이랑 1박 2일로 여행을 왔다. 숙소에 수건들이 구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흙모래 묻은 아이들 발 씻길 일이 많을 것 같은데 그 용도로 쓰기엔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집에 굴러다니는 발수건 중에 하나를 챙겨온 참이었다. 씻고 나오면 닦으라고 욕실 앞에 놔둔 거였는데 숙소에 있는 수건이랑 달라서 그런지 친구가 우리 집 거냐며 물었다. 그래서 쓰고 여기서 버리고 가려고 가져왔다고 이야기하는 중간에 남편이 끼어들어 말한 것이다. 본인이 아끼는 수건이라며. 이 수건을...? 여기저기 올이 풀려서 걸레도 써도 아깝지 않을 이 수건을...? 몰랐다, 전혀.
남편의 말에 따르자면, 우리 집에 있는 수건 중에 이게 제일 보들보들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수건이었는데 어느 날 집에 와보니, 발을 닦는 수건으로 변신을 한 것. 이때도 남편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미니멀라이프를 한답시고 집에 있는 형형색색의 수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멀쩡히 잘 쓰던 것들을 버리기는 어려우니 내가 주로 사용하는 안방 화장실 전용 진회색 수건을 샀다. 그러면서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리고, 좀 낡았다 싶은 건 발수건으로 만들었다. 여기까지가 이 사건의 전말. 사실 남편이 나가 일을 하고, 내가 전업으로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집에 관련한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책장같이 큰 가구 들이는 것이야 같이 의논해서 결정했지만, 자잘한 살림살이들은 사는 것도, 처분하는 것도 나에게 달려 있었다. 그래서 집 안 대부분의 공간에 내 취향이 담긴 것들로 채워졌다. 수시로 바뀌는 물건들의 위치에도 남편은 입 한 번 댄 적이 없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많은 사람은 나니까, 내 몸과 마음이 편하면 됐다고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된 수건들도, 화장실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걸어두는 방향도, 거실 화장실을 건식으로만 사용하는 것도. 모두 나에 맞춰진 것이었다.
남편에게도 수건 취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사실 머리숱 많은 내가 머리를 잘 말릴 수 있을 만큼 물기가 흡수 잘 되고, 넣어두었을 때 통일된 색으로 눈이 피곤하지 않을 것. 그것이 내가 수건을 고르는 기준이었다. 수건의 촉감, 은 사실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건조기를 사용하고 나서는 마른 햇볕에 말렸던 예전처럼, 수건이 거칠거칠하지만 않으면 됐다. 따끔하게 얼굴을 찌르지만 않으면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데 나와 8년째 사는 이 남자의 취향은 좀 다르다는 것을, 이제야 새삼스레 깨닫는다.
너무 사소해서,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부분들까지도 나는 배려 받으며 살고 있었다. 배려 받는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나를 배려하며 살았던 거다, 이 사람이. 결혼하고서는 나의 취향에 맞춰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는 남매의 취향에 맞춰서. 그렇게 자신의 취향을 잠시 접어두었던 남편의 다가오는 생일에는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 취향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