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지난해부터 쭈욱 원서 읽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기존에 진행하던 챕터북을 읽는 모임 외에 조금 더 레벨을 높여 청소년용 소설을 읽는 모임을 만들었다. 매일 꾸준히 조금씩, 함께 하면서 읽다 보니 원더(Wonder)와 해리포터 작가가 쓴 크리스마스 피그(The Christmas Pig)를 비롯해 7권을 완독하고 이번에 처음 성인 소설로 넘어왔다. 그렇게 읽게 된 것이 바로, 블로그에도 여러 번 소개 글을 올린 조디 피코의 <Small great things_작지만 위대한 일들>이다.
사실 내가 소설을 즐겨 읽는 타입은 아니다. 소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늘 우선순위에 밀려 펼쳐보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겠다. 책을 통해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큰 변화가 필요한 인생의 시점에 서 있고 보니, 손이 가는 것들은 죄다 실용서다. 책의 저자가 책을 통해 전해 주고자 하는 것이 명확하면 독자인 내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바로바로 그것들을 받아들이기 편하니 그렇다. 그래서 독서모임과 같이 일종의 강제된 의무사항이 아니면 소설까지 고를 시간적 여유도, 마음도 생기질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끌고 있는 원서 읽기 모임(엄마가 먼저 즐거운 영어책 읽기, 이름하여 엄먼즐)의 멤버들은 자기 계발서 같은 실용서보다는 소설이라는 문학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소설을 그리 즐겨 읽지 않는 나도 이 사람들과 함께, 매일 30분이라도 문학소녀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책과 그 책이 나에게 주는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소설, 문학작품이 나에게 주는 것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실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내가 규정짓고 있는 '배움'이라는 선에서는 말이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혹은 'A+B=C이다'와 같은 분명하고 정확한 정보들을 주는 장르는 아니다, 소설이. 그래서 '잠깐의 재미와 즐거움, 혹은 긴장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책을 읽는 시간'이 바로 내가 소설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쌓인 시간 때문인 것일까? 이번 책을 읽으면서 소설이 나에게 무엇을 주고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음이 왔다. 앞으로 내가 계속해서 소설을 읽는다면 이것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 나는 좋고 싫고가 분명한 사람이다 보니 내 주변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뿐이다. 내성적인 성향 탓에 새로운 모임도, 새로운 사람들도 어울리는 것 또한 쉽지가 않다. 그래서 늘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다. 직장 생활을 하지 않으니 더 그렇다. 집단생활을 할 때에는 피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맞춰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었는데 성인이 되어서는 그렇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면 그만이다. 잠시 스쳐 지나가더라도 곁을 내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내 마음의 평안을 얻었지만,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보인 일면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기 일쑤다. 그런 나의 옹졸함을 깨닫게 한 것이 바로 소설이다. 이 <Small great things>를 읽기 전에 내가 들고 있었던 스토리와 등장인물에 대한 사전 정보는 다음과 같다.
Ruth는 신생아실에 근무하는 흑인 간호사로, 직장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아기에게 손도 대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는다. 그리고 이런 지시의 배후에는 그 아기의 아버지인 Turk가 있다. 이 사람은 인종차별주의자로 흑인 간호사가 자신의 아기를 담당하지 않도록 병원에서 조치를 취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아기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게 되고, 이 죽음에 대한 책임은 Ruth에게 돌아간다. 그런 Ruth의 사건을 담당하게 된 국선 변호사 Kennedy가 또 한 명의 주인공이다. 인종차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며 Ruth를 돕던 Kennedy는 자신도 모르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종차별이라니, 지금이 어느 시댄데! 상종도 하지 말아야겠구만! Turk에 대한 소개 글을 보면서 처음 한 생각이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살인자로 만들어 재판에 세우는 모습은 정말 비인간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Turk가 자라온 환경, 흑인에게 적대심을 갖게 된 사건, 인종차별 운동에 가담하게 된 계기 같은 것들이 자세히 묘사가 된다. 이 세 명의 등장인물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입장을 대변하고, 속 깊은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그 말과 행동의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로.
이 사람은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이 사람이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
이렇게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소설의 힘이다. Turk는 어린 시절에 흑인 운전사와의 교통사고로 형을 잃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의 가정은 점차 무너져내렸다. 부모님은 이혼했고, 엄마는 알코올중독으로 Turk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아빠는 사실 동성애자였던 사실이 밝혀졌다. 부모님 대신 Turk를 돌봐주었던 할아버지 또한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고 가치를 인정해 주었던 Raine은 Turk를 인종차별 운동 단체에 가담하게 이끈다. 그곳에서 배우자를 만났고, 그것이 바로 삶이 되었다. 자라온 환경과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를 지금의 그로 만들었다. 분명 잘못된 행동을 했고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를 그렇게 만들어온 것들이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다.
She never learned any other way of being.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네 삶은 선택의 연속인 것 같지만, 그 선택이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선택지조차 받지 못한 사람에게 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느냐고 비난할 수 있을까?
소설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소설을 통해 인간을 이해한다. 나와 다른 너. '틀림'이 아닌 '다름'을 안다. 더 나아가 틀린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이지 그 사람의 '인생'전체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 사람에 따라 대하는 법이 다르다. 그렇게 악랄한 행동을 했던 Turk도 자신의 부인과 아이에게는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더없이 가정적인 가장이다. 나에게는 이런 사람이었어도, 너에게는 저런 사람일 수 있음을 경험한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간접 체험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본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앞으로 소설을 읽는, 읽어야 할 이유다.